한 시간의 저녁 식사 후에 내게는 간만에 아무런 일정이 없었다. 나는 방에서 미래의 공용어 어쩌구 대회 대륙 남부 지역 챔피언과 움직이는 버저를 빨리 누르는 연습을 했다. 브리를 위해 기꺼이 버저를 자처해 준 나의 흙골렘 친구가 완전히 뭉개졌을 때쯤 이디스가 돌아왔다.
이디스의 표정은 너무 알쏭달쏭해서 나는 그녀가 남편과 어쩌기로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팔에 걸린 종이봉투에 켈피 가죽 벨트가 빠져 있었으므로, 대강 괜찮겠거니 추측할 뿐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화살이 그린 거침없는 궤도를 목격한 뒤에 나는 이디스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켈피 가죽 벨트 대신에 이디스가 챙겨 온 것은 동그랗고 윤기 나는 초콜릿이었다. 잇새에 끼우고 깨뜨리니 쌉싸름한 맛이 확 퍼졌다. 안에 술이 들었다고 했다.
제아무리 범생이 중 범생이인 브리아나 모슬리라 할지라도 아카데미 내에서 취하는 행위가 주는 스릴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샌크릭, 아니 피츠시몬스 최고 멋쟁이 여성 모임은 알딸딸한 기분을 즐기며 화난 레이디 에드워즈가 나타나기 전까지 노닥거렸다.
아무래도 나의 룸메이트와 의자매는 재작년에 태어난 볼턴의 막내 동생 이상으로 술에 약한 게 틀림없었다. 여자 기숙사의 왕이 이디스에게 추방령을 내리자, 나는 우선 거시기를 뜻하는 속어가 나라마다 다른 까닭을 탐구하고자 몇몇 채소의 철자를 중얼거리는 브리아나를 재웠다. 그러고 나서 비틀거리는 이디스를 교직원 숙소까지 데려다주었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찬바람이 불었다. 술기운이 사라진 자리가 쓸쓸하기에 나는 걷다 말고 아무 벤치에나 앉았다.
한때는 피츠시몬스에서 ‘방귀 마법 전문가’이자 ‘끈적이 투석기 권위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중에는 그나마 나은 빌라드’로 일컬어지던 이디스에 의하면 졸업은 나의 상상만큼 환상적이지 않았다.
나는 형편없는 성적이나 빡빡한 교칙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어른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디스는 어른이 되며 더욱 많은 족쇄를 손목에 찼다고 했다. 준비를 채 갖추기도 전에 말이다(실은 어른이 될 준비를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스무 살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끈다고 해서 갑자기 세법에 통달하거나 우는 갓난쟁이를 달랠 수 있게 되지는 않았다.).
어떤 것은 변하고, 어떤 것은 그대로 남는다. 변하는 것 중 하나는 관계였다. 귀족 사회에서 친밀감이 작위보다 우선시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주 사적인 만남이 아니고서야, 피츠시몬스를 벗어난 곳에서 내게 ‘레이디 라미레즈’를 ‘켈리’라 부르는 행위는 허용되지 않을 것이었다.
“변하지 않는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해.”
혀 꼬인 말투로 지껄이던 이디스의 상기된 얼굴이 떠올랐다.
“이건 비밀인데, 나는 아직도 페터슨 후작 부인보다 방귀 마법 전문가에 가깝단다.”
우스꽝스러운 악수 뒤에 적어도 십 분이 지났는데 아직 손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청결 마법진에 포함되는 바람 문양이 오른쪽으로 꼬였던가 왼쪽으로 꼬였던가를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별안간 다리에 뭐가 닿는다 싶더니만, 나무로 된 마법 인형 둘이서 발치에 나란히 섰다. 그것들이 하늘을 향해 팔을 뻗자 앙증맞은 잔가지와 나뭇잎이 얽혀 글자를 만들었다. 하나는 ‘안’, 다른 하나는 ‘해’였다.
“…안 해? 뭘?”
영문 모를 선전 포고에 눈을 휘둥그레 뜨니 우당탕 소리가 이어졌다. 곧 가까운 수풀에서 지긋지긋한 소꿉친구와 새로운 나무 인형이 나동그라졌다.
팔 사이로 ‘미’를 띄운 인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뒤뚱뒤뚱 걸어 동료와 합류했다. 선전 포고는 순식간에 사과 편지로 탈바꿈했다.
“하필이면 쟤가 말썽이어 가지고….”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면서 투덜거리는 카일을 보고 있으려니 저항 없이 웃음이 터졌다. 나는 최대한 엄숙해 보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뭐 하자는 개수작이야?”
“맘에 들어?”
“맘에는 들어.”
맘에 드는 건 맘에 드는 거였으니까 솔직하게 말했다. 요 귀여운 마법 인형을 설계한 것이 카일이 아니라 월시거나 케이틀린 대제였어도 똑같은 대답이 나왔을 거다. 깜찍이들을 앞에 두고 거짓말을 할 정도로 내 가슴이 팍팍해지지는 않았다.
그러자 카일은 과장스레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가왔다. 앉은 자리에서 꾸물꾸물 움직여 자리를 내 주었더니 약간의 더운 기운과 레몬 향 비스름한 게 섞인 바다 냄새가 끼쳤다. 공략 대상 하려면 향수를 되게 좋은 걸 써야 되는 걸까.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카일의 사과 편지를 집어 들었다.
“얘네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는?”
“너는… 뭐….”
내 소꿉친구는 이깟 나무토막보다 열 배는 행복해야 되는 애였다. 대충 얼버무리고 인형의 등에 박힌 태엽을 차례로 감았다. ‘안’과 ‘해’가 팔짝팔짝 뛰며 난리를 치는 동안 ‘미’의 허리가 반대로 꺾였다.
“급하게 준비하느라고.”
카일이 변명하며 내게서 ‘미’를 가로챘다. 가여운 나무 인형은 새까만 망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탤론 시청 마도구 관리 부서에서 이걸 알면 널 채용하지 않았을 텐데.”
“면접관이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답부터 말하는데 채용을 안 하고 배겨?”
공기 중으로 흩어진 짧은 웃음 뒤로는 기다란 멋쩍음이 나를 감쌌다. 카일과 손을 잡고 산책로를 걸었던 날이 까마득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열없이 신발코로 땅이나 파고 있다가 작은 헛기침에 고개를 들었다.
“페터슨 후작하고 내가 뭐가 다른지 모르겠더라.”
“…….”
“너를… 충분히 존중하지 않은 것 같았어. 네가 반드시 같은 길로 나아갈 거라는 보장도 없고, 그렇다고 한들 내게 너의 선택지를 제한할 권리는 없는데 말이야.”
다년간의 카일 빌라드 소꿉친구 경험에 기반하여 판단하자면 얘가 나와 대화하며 내 눈을 피하는 상황은 그다지 환영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나는 떼어졌다 도로 붙었다를 반복하는 입술을 끈덕지게 쳐다보다가, 영문 모를 불안감에 머리카락의 끄트머리를 매만졌다.
“네 추측이 맞아. 내 기억에는 있지만 네 기억에는 없는 5학년에, 너는 스스로 타메니 강에 몸을 던졌어.”
충격은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번개처럼 갑작스러웠다. 나는 게임이나 시스템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 멍해졌다.
자살? 내가? 말도 안 돼. 다른 누구는 몰라도 아리엘 달튼이라면 제법 잘 아는데, 걔는 스스로의 안위를 무엇보다 걱정하고 자존심은 별로 없어서 개처럼 기며 아흔아홉까지 살지언정 열아홉에 목숨을 버릴 애가 아니었다.
카일이 털어놓은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과는 별개로, 속는 듯한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의 태도는 진지했고 표정에서는 슬픔이 엿보였다.
또 내가 물 아래로 가라앉는 순간을 되새기면서는 안쓰러울 만큼 떨었던 것이다. 나는 물에 대한 카일의 공포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직감했다.
여느 때처럼, 그의 저주스러운 삶에서 내가 가지는 가치를 확인하기란 별로 재밌는 일이 아니었다. 뭐라고 캐묻는 대신 카일을 한 번 껴안았다. 그의 어깨 폭이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으므로 안는다기보단 안기는 자세가 되었으나, 여하튼 그랬다.
“카일, 나는 로즈마리 블로썸이 될 수 없어.”
문득 이 말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가 있다면 그건 바로 지금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냐.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왔는걸. 내 말은, 내 방식대로 하겠다는 거야.”
대답 대신 침음이 돌아왔다. 뭘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거 같았다.
“블로썸은 사랑의 묘약을 써서 호감도를 올렸어. 그건 시스템이 약간의 외도를 걸어 게임을 공략하는 걸 막지 않는다는 뜻 같은데.”
“막지 않는다기보단 막지 못한다고 하는 게 맞겠지. 구분이 안 되니까. 그래서?”
“스티아 신의 티아라, 성녀 에이레네의 묵주, 로즈마리 왕비의 귀걸이, 고룡 이그나스의 비늘, 다미앙 할아버지의 회중시계. 모으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도둑질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최후의 방법이지.”
“아니라는 소리는 안 하네.”
험프리스 교수의 사무실에서 위험하거나 지저분한 장난용 마도구들을 더러 훔쳐 냈다고 해서 일레스티아 황궁을 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당당하게 말했다. 마치 엄청난 묘수라도 지닌 듯이 말이다.
“샐러맨더의 무지개 비늘에 맹세코, 나는 중요한 내기에서 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그렇다고 하기엔 오늘 네 활 솜씨는 굉장하던걸. 내 누이가 너를 살렸지.”
“오, 카일. 그래서 네 누이가 누구와 편을 먹었더라? 그녀의 얼간이 남동생이던가?”
실은 쥐뿔도 없다는 것을 간파했는지, 카일은 나를 응원하기는커녕 빈정거리기나 했다. 하지만 내가 이미 제이든 스펜서를 거절했고, 앞으로 에드가 라모스에게도 똑같이 할 거라는 사실을 알자 티 나게 좋아했다.
어마어마한 비밀을 오래도록 숨겨 온 사람치고는 너무 속 보이는 반응이었다. 나는 히죽이며 소꿉친구의 어깨를 밀어냈다.
“네가 지금껏 여러 시도를 해 왔다는 걸 알아. 내가 성공할 확률이 극히 드물다는 것도. 하지만 믿어 줬으면 해.”
“…….”
“만일 잘 안 되면, 그렇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다음 9개월이 있잖아. 그때는 진짜로 최선을 다해서 꼬셔 볼게. 남자를 유혹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얘들은 자신 있어 하던걸.”
“맙소사, 기를 쓰고 너를 도와야 할 이유가 또 생겼네.”
손을 둥글게 모아 가슴을 받쳤더니 카일은 더는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거친 마른세수에 문대어지는 이마가 머리카락보다 빨갰다. ‘그런데.’ 이윽고 재빨리 말이 따라붙었다. 잡념이 끼어들 여지를 없애려는 듯한 행동이었다.
“이번 같은 기회가 또 온다는 보장은 없잖아. 이를테면, 지금의 네게는 거의 모든 기억이 있지만….”
“새로운 아리가 너를 잊을까 봐?”
그건 나로서도 꽤나 난감한 사항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좋아, 카일. 반드시 통하는 마법 주문을 하나 알려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