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양보단 기능성에 집중하는 내 눈에도 끔찍하기 그지없는 의복들을 쥐여 주니까, 볼턴은 질리지도 않고 사사건건 화를 냈다.
“뭐 어쩌라고?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저리 가.”
“블로썸이 이런 느낌을 좋아할 수도 있잖아. 시도해 보는 게 어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야! 아동복이잖아!”
말도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은근슬쩍 요만한 천 쪼가리를 몸에 대어 보는 볼턴이 쬐끔 짠한 동시에 너무 재미있어서 배가 터질 거 같았다. 나는 거의 울면서 웃었다.
“아, 맙소사, 마르퀴즈 볼턴. 청혼을 할 거면 이런 때 했어야지. 나 지금 너와 사랑에 빠진 거 같단 말이야.”
“꿈 깨시지. 나는 지금 너를 증오하게 됐으니까.”
배를 부여잡고 뒤집어진 나와 툴툴거리며 아동용 프록코트를 내던지는 볼턴 사이로 뭐가 불쑥 들어왔다.
“이거 가슴에다 꽂는 거 맞아?”
어두운 자주색 보석이 박힌 장식 핀을 따라 고개를 들었더니 소꿉친구의 얼굴이 나타났다. 흡혈귀의 망토를 두른 탓인지 카일의 목소리는 다소 음산하게 들렸다.
스치듯 시선이 맞았다가 금방 어긋났다. 왠지 추워진 듯한 기분에 팔뚝을 문지르며 이디스에게 갔다. 대경한 볼턴의 비명 같은 외침이 조금씩 멀어졌다. ‘젠장, 스티아시여. 일부러 그러는 거야? 심장에 구멍 뚫고 싶어서?’
“아리엘, 켈피 가죽과 만티코어 가죽 중에 어느 쪽이 더 예뻐 보이니?”
“오, 이디스. 내 입으로 말하게 되어서 유감이지만 나의 미감은 엘프만큼이나 구려. 어느 쪽이 튼튼하겠냐고 물었을 때 만티코어 가죽이라고 답해 줄 수는 있는데.”
내 자조에 이디스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 나서 켈피 가죽 벨트를 챙겼다. 검을 패용할 수 있도록 납작한 고리 모양의 가죽 조각이 덧대어진 벨트였다.
내가 기억하는 한 마베릭에게는 그런 게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기다란 창에 도끼날이 달린 할버드를 주로 사용했다. 그가 허리에 검을 차는 경우는 예장을 차려야 하거나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을 때뿐이었다.
“그건 누구 거야?”
그래서 이렇게 물었더니 이디스는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마베릭에게 완벽한 선물을 선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디스는 결국 적당한 가격의 담비 털 망토를 대충 골랐다. 치장에 진심인 남자, 마르퀴즈 볼턴의 마음에는 차지 않는 것 같았으나 이디스와 별로 안 친해서인지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건 볼턴이 마침내 그보다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상대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끔 행동하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뜻 같았다. 엄청난 정신적 성숙을 이루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어쩌면 실패한 짝사랑이 그에게 상처만을 남긴 것은 아닌가 보았다.
적당한 가격의 담비 털 망토와 그보다 비싼 켈피 가죽 벨트를 구매한 후에, 이디스는 피츠시몬스 재학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고 싶다며 웬 오락장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볼턴은 장비가 구식이네 건물이 낡았네 따지며 분위기를 가라앉히지 않았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띠고 볼턴의 등을 두드렸다. 그의 연애 교관으로서 감개가 무량해서 그랬다. 소소한 반사 이익은 덤이었다. 볼턴의 손에서 휘청이며 쏘아진 고무 화살은 그가 겨냥하던 자그마한 표적을 한참 벗어났다.
곧 엉성한 음향 효과와 함께 기다란 집게팔이 달린 마법 인형이 등장했다. 그것이 쥔 장난감 망치가 볼턴의 이마를 두드리자 방귀 소리 같은 게 났다.
볼턴이 씩씩대며 나를 노려보는 동안 활을 들었다. 내 궁술은 검술만큼 뛰어나지 않았고 내게는 볼턴만 한 자존심이 없었다. 비교적 쉬운 표적을 안전하게 맞히니 ‘샌크릭 최고 멋쟁이 여성 모임’이라고 쓰인 점수판의 숫자가 올라갔다. 활을 이디스에게 건네며 손바닥을 마주쳤다.
다음 사수인 카일은 나와 달리 집중력이 좋은 편에 속했다. 이디스가 울보 도련님 시절의 치부를 계속 들추었는데도 그의 팔은 흔들리지 않았다. 주먹보다 약간 큰 표적이 넘어간 뒤에 ‘샌크릭 최고 멋쟁이 여성 모임’과 ‘시한부 의형제’의 점수는 완전히 똑같아졌다.
이제 남은 표적은 볼턴이 노리다가 실패한 것뿐이었다. 이디스 페터슨의 어깨가 무거웠다.
다행히 이디스는 활을 꽤나 능숙하게 다루었다. 그녀가 시위를 당기기 시작하자 나는 가슴 앞으로 손을 모아 잡았다.
볼턴은 침을 삼켰고 카일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알록달록한 장난감 활이 자아낸다기엔 가당찮은 긴장감 속, 모든 것이 멈춘 듯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디!”
갑자기 나타나 이디스의 애칭을 부른 남자는 나나 카일과는 구면이었다. 깜짝 놀란 이디스가 팔에 힘을 풀자 고무 화살이 흐물거리며 떨어졌다. 나는 ‘시한부 의형제’에게 방금 건 무효라고 단단히 으르고 나서 치마를 가볍게 붙잡아 예를 표했다.
“며칠 동안 미친 듯이 힌리치를 뒤졌어. 얼마나 걱정했다고. 미아나, 누가 언질이라도 줬다면 진작에 만났을 텐데….”
귀 위로 올려친 짙은 밤색 머리에 볕에 그을린 피부, 다부진 턱선을 따라 거칠게 자란 수염, 여러모로 책보다는 검과 가까워 보이는 남자였다. 매부리처럼 구부러진 콧대와 얇고 긴 입술이 꽤나 각박한 인상을 주었다.
검에 매달린 밝은 주황색의 장식 끈만이 유일하게 부드러운 부분이었다. 수공예로 유명한 힌리치 출신이 가지기엔 지나치게 조악한 장식 끈은 이디스가 직접 엮은 것이었다.
페터슨 후작은 ‘누가’라고 발음하는 동시에 나를 쏘아봤다. 짓눌리는 기분에 어깨를 움츠리자 카일이 자연스레 그와 나의 사이에 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딱 떨어지는 걸음으로 다가온 후작이 이디스의 손목을 낚아챘다. ‘돌아가자.’ 그가 말했다.
“싫어요.”
“대체 왜 그래?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줬잖아.”
후작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꼬리처럼 매달린 수행원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부부싸움을 보이는 것이 창피한 듯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아니었다. 이디스의 낯빛은 고요했고 서 있는 자세는 견고했으며 남편을 포함하여 그 무엇도 그녀를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반성했어. 확실히 사냥 대회는 페터슨에 중요한 행사이고, 명색이 안주인인데 앉아만 있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디, 당신 같은 귀족 여성은… 그러니까… 당신은 말에 제대로 올라 본 적도 없잖아. 너무 위험하다고.”
“빌어먹을, 로버트!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군요!”
그야말로 불같은 노성이었다. 페터슨 후작이 입을 쩍 벌렸다. 그건 아마도 그가 아내로부터 들은 가장 거친 말인 게 분명했다.
“당신의 젠장맞을 사냥 대회에 내가 참여를 하고 아니고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 승마 실력이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고요!”
“이, 이디….”
“생각해 봐요, 로버트…. 뇌가 있으면 잘 생각해 보라고요. 내가 말을 타지 못한다는 사실을 승마 대회 참여자 명단에서 나를 제외할 때에 떠올렸나요?”
때로 몸짓 언어는 말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눈치가 지지리도 없는 브리아나 모슬리라도 후작이 아내의 이름에 취소 선을 긋고 나서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가져다 붙였음을 알아챌 것이었다.
이디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바닥에 널브러진 고무 화살을 집어 들었다.
“내 말은, 나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기회를 앗아 가지 말라는 거예요.”
그녀의 화살촉이 남편을 향했다. 시위에 걸린 손가락이 느리게 움직였다. 밝은 녹색의 눈동자는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도자기 인형이 아니라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사람이에요.”
낚싯줄에 약간의 마법적 처리를 한 장난감 활줄은 아주 약간의 힘으로도 금방 팽팽해졌다. 후작은 주춤거리며 조금 물러섰으나 아예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나는 그것이 아내를 존중해서인지, 아니면 여전히 유리 돔에 감싸인 꽃과 같이 여겨서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고무 화살 정도는 맞아도 싼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시는 나의 가능성을 무시하지 말아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쏘아진 화살은 후작의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가 표적을 강타했다. 곧 꽃잎처럼 오려진 종잇조각을 한 아름 안은 마법 인형이 나타나서는 나와 이디스를 향해 팔매질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의 턱에 뚫린 구멍에서 저품질의 환호성이 새어 나왔다.
점수판을 보았다. ‘샌크릭 최고 멋쟁이 여성 모임’은 ‘시한부 의형제’보다 정확히 1점을 더 땄다. 그러나 이디스의 마지막 화살에 1점이 아니라 10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음은 병적인 거짓말쟁이에다 나를 지독히 싫어하는 크리스타 에드워즈라도 인정할 것이었다.
페터슨 후작이 처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 뒤에, 나는 억지로 점수판을 넘겨 우리의 점수 제일 앞에 숫자를 더했다.
***
브리아나와 켈리에게 이디스가 얼마나 멋있었는지 말하느라고 식당에서 한 시간이나 있었다. 원래는 내기에 진 ‘시한부 의형제’에게 바닷가재 테르미도르를 얻어먹을 셈이었으나, 이디스가 부부끼리 이야기할 게 있다면서 가 버리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샌크릭 최고 멋쟁이 여성 모임’의 승리에 이디스 페터슨이 기여한 바가 컸다. 나는 일등 공신을 빼고 받는 보상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며 다음 기회를 기약했다.
근데 실은 셋이서 식사하는 게 너무 어색할 거 같아서 그랬다. 불편한 눈짓이 난무하며 꼭 필요한 단어 외에는 입모양으로 소통하는 저녁 식사 테이블을 상상만 해도 식은땀이 났다.
다툼(인정하기로 했다.)이 장기화되며 카일과 나의 심리적 거리는 유례없이 멀어졌다. 얼마나 멀었냐면 오락장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내내 서로를 놀릴 그 어떤 시도도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학기 초의 아리엘 달튼이 되었다. 제4의 벽에 갇혀 영원히 지속되는 외로움에 시달리던 아리엘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상황이 더 안 좋았다. 세계의 비밀에 대해 아는 모두가 나와 그것을 나누기 싫어했으니까. 막연히 혼자라고 생각하는 것과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혼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천지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