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09화 (109/178)

“저기, 미아. 나 십 분만 쉬다 올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미 잃은 아기 새처럼 따라붙는 제이든을 꽁무니에 매달고 나타난 나를 보며 미아가 의미심장하게 볼을 붉혔다.

“네 머리에 뭐가 들었든 간에 그거 아니거든.”

불현듯 엄습하는 불안감에 덧붙이자 그녀는 퍽 온순한 말투로 모가지가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카일에게만은 비밀을 지키겠노라고 했다.

뭔가 빌어먹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따질 여유도 기운도 없었다. 나는 응원이라도 한다는 마냥 박수를 치는 미아를 향해 대충 손을 휘젓고 돌아섰다.

조용한 장소를 찾는답시고 무작정 걷다 보니 기숙사 근방까지 왔다.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나무 벤치를 빙 둘러 방음 결계를 그렸다. 제이든은 방음 결계의 찌그러진 부분을 멀뚱멀뚱 보다가 내가 가리키는 자리에 앉았다.

“제이든, 그, 있잖아.”

“응.”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건데, 진심인 거지? 내가 민망할까 봐,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괜히 그러는 거 아니지?”

“아냐.”

제이든이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시선은 내게 고정한 채였다. 그는 내 뒤를 따라 광장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계속 그러고 있었는데, 진지한 눈빛에서 무시하기 어려운 열기가 느껴졌다. 급변한 태도에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한편 얼굴이 마구 화끈거렸다.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바뀐 게 아니야. 깨달은 거지.”

조심스럽게 묻자 제이든이 바로 대답했다. 머뭇거리는 시간이 신기하리만큼 짧았다. 마치 마음속으로 다음에 할 말을 정해 놓기라도 한 듯이. 손바닥에다가 써 놓고 읽는대도 그보다 오래 걸릴 거 같았다.

“대릴 코완이 왜 사랑을 마법에 비유했는지 알겠어. 네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정말로 마법에 걸린 것처럼 세상이 변하더라. 태양이 타오르고 꽃잎의 색이 선명해진 다음에는 구름이 내게로 쏟아졌어. 그것들은 내 뇌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너를 밀어 넣었지.”

“…….”

“덕분에 하루 종일 너만 생각했어. 이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어떤 게 사랑이야?”

내 판단은 이번에도 틀렸다. 공략 증표를 받는 조건에 우정이 포함될 수도 있겠다는 거 말이다. 대신 주디스 그린의 판단은 옳았다. 조디처럼 사교에 정통하지 않더라도 이 순간 스펜서 공자가 ‘익명의 자작가 영애’에게 푹 빠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힘들었다.

숨통이 조여드는 듯한 기분에 가슴을 내리눌렀다.

“좋아, 일단, 고마워. 그러니까, 값진 마음이잖아. 용기 내서 전해 준 거고.”

“용기까지 낼 필요가 있나? 없는 말 지어내는 것도 아니고.”

“그래, 그 부분은 빼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샐러맨더의 무지개 비늘에 맹세코 이만큼 확신에 가득 찬 제이든 스펜서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브리아나의 귀를 멀게 하고 브레넌의 자존심을 짓밟은 사랑이 제이든에게는 확신을 주었나 보았다.

나는 밀루아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동경했을 남자애를 변화시킨 사람이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에 다소 으쓱해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스스로가 지독한 얼간이처럼 느껴졌다.

“아무튼.”

빠르게 내뱉는 동시에 눈을 꼭 감았다가, 바로 부릅떴다. 누군가에게 칼을 휘둘러야 한다면 내게는 그것이 남길 상처 자국을 직시할 의무가 있었다.

“내가 너에게 나를 좋아하냐고 물어봤던 건, 확인하기 위해서였어.”

에드가의 고백을 회피한 날에, 나는 따끔거리는 심장을 붙들고 창가에 앉았다. 그리고 별과 별을 이어 몇 가지 모양을 만들면서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사유했다.

이를테면 붉은 게 모양에서 카일을 끄집어내고, 왕관 모양을 만든 뒤 켈란을 떠올리는 식이었다. 또 커다란 곰이 앞발을 든 모양은 제이든의 것이었다. 손을 맞잡은 쌍둥이별의 가운데에는, 일차원적이지만, 에드가가 있었다.

어떤 것은 브리아나의 별이었다. 다른 별은 릴루 거였다.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들을 꺼내 반짝임 하나하나에 붙이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산기슭 사이에서 해가 떠올랐을 때,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생각만이 남았다. 얼마나 대단한 명분이 있든 ‘학생회의 공주님’은 내 길이 아니었다.

‘이벤트’를 봐서 ‘공략 대상’들의 호감을 사는 것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실은 꽤 괜찮았다. 잘나고 잘생긴 학생회 애들하고 어울리기 싫은 여자애는 드물었고, 나는 지극히 평범한 여자애였으니까.

문제는 그 뒤였다. 쌓아올린 호감을 바탕으로 다수와 동시에 연인 비스름한 관계를 유지하는 거.

카일은 애초 게임이 만들어진 목적이 그것임을 계속해서 강조했으나 나는 여전히 내가 친구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딱히 정의 같은 걸 운운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결코 선량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만약 내 담이 조금이라도 컸더라면 죄책감은커녕 일말의 자극도 없었을 게 분명했다.

“만일 내가 너를 ‘햄의 노래’로 울리게 된다면….”

나는 끝내 능동적인 쓰레기로 거듭나지 못했고 제이든 스펜서는 내 진심을 알아 마땅했다.

“너무 미안해질 거 같아서.”

깊은 한숨 끝에 말을 붙였더니 전력질주를 한 듯이 심장이 뛰었다. 나는 요란하게 가슴을 들썩이며 호흡했다.

반면 제이든은 아주 고요했다. 그의 표정은 언제나와 같이 덤덤해서 나는 그가 나의 거절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틀렸어.”

도망치고 싶어질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 제이든이 대뜸 내뱉었다. 드물게도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투였다. 이윽고 그의 코끝과 이마 중간, 그리고 광대뼈 부근이 물에 색소를 풀어낼 때처럼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사랑은 아름답고, 숭고하지만… 전혀 즐겁지 않아.”

제이든 스펜서의 우는 얼굴은 웃는 얼굴만큼 충격적으로 예뻐서, 만일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오래도록 감상했을는지도 몰랐다. 그의 눈물이 감동해서거나, 기뻐서거나, 하다못해 나와는 관련이 없는 이유에서 비롯되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지저분한 피츠시몬스에서 마지막 양심과도 같은 제이든을 울린 무뢰한은 다름 아닌 나였다. 나는 소매를 당겨 쥐지도 못하고 맨손바닥으로 허겁지겁 제이든의 상처를 받아 냈다. 엄지와 검지 사이의 우묵한 공간에 눈물이 얕게 고였다.

“나 싫어?”

“아냐! 내 말은, 너는 내 친구고, 다른 방향으로는 고려해 보지 않았다는 거야.”

“그럼 고려해 봐.”

기이하게도, 그렇게 말하는 동안 제이든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조금도 없었다. 귀는 홍당무보다 빨갛고 볼은 릴루의 코보다 축축하면서. 어쩌면 둥지를 만들면서 여물어진 것은 용의 몸뚱어리만이 아니었나 보았다.

“내게는, 아리엘… 시간이 많아. 네가 몇 시간을, 며칠을, 하다못해 몇 년을 고려한다 해도 신경 안 써.”

나와는 다른 의미로 영생을 살아갈 남자가 말했다. 불현듯 암녹색 홍채의 테두리에 미세하게 섞인 노란빛이 눈에 들어왔다. 정원보단 타원에 가까워진 동공도.

스스로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했기 때문인 듯했는데, 재미있게도 검은 날개나 커다란 송곳니보다 오히려 그것이 제이든을 더욱 용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

주말에 나는 삼두견의 왼쪽 머리통이 되었다. 마르퀴즈 볼턴과 함께 외출했다는 뜻이다.

단 이번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내가 세 번째로 좋아하는 빌라드인 페터슨 후작 부인이 원하는 바를 내가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현 시점 최악의 빌라드인 카일과 동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도움이 되었던 적이 별로 없는 마베릭 빌라드의 생일이 다음 주였다. 이디스는 피니건 거리에서 그녀가 구입할 남성용 망토가 최대한 멋들어지길 바라서, 마베릭과 외모도 체형도 판박이인 카일을 옷걸이로 사용하기로 했다.

불행하게도 당장 프릴 달린 천 갑옷을 걸치고 있는 내가 이디스에게 줄 만한 도움은 전무했다. 하지만 나는 이디스와 외출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볼턴은 누군가의 안목을 헐뜯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평소의 재수 없는 안경남을 생각하면 놀랄 만큼 흔쾌하게 기숙사까지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볼턴에게 고마워서 그가 내 옷장에 참견해도 될 정도로 관대하게 굴었다. 적어도 내 존재가 여성 의복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폭언을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볼턴과 서로 빈정거리며 기숙사를 나설 쯤에 이디스와 카일을 만났다. 우리가 나란히 있는 것을 본 카일이 볼턴에게 왜 여자 기숙사에서 나오냐고 물었다. 볼턴이 내가 불렀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자 카일은 내가 볼턴을 부른 까닭을 그의 누이에게서 찾았다.

이디스가 내게 직접 물어보라고 말한 순간 대화가 단절되었다. 볼턴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가 내게 딱 붙어 속삭였다.

“너희,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보다 이 환상적인 나뭇잎 모양 단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드라이어드의 수의에나 달려 있을 거 같아.”

소매를 여미면서 거기 꿰매진 못생긴 단추와 이리저리 튀어나온 실밥을 볼턴의 눈앞에 들이댔더니 그는 참을 수 없어진 것 같았다.

나는 순식간에 정색을 한 볼턴의 어깨를 깔깔대며 밀쳤다. 그러고는 이디스의 팔짱을 낀 채 피니건 거리로 가는 내도록 쫑알거렸다. 리즈는 바쁘고, 카일과는 어색하고, 다른 애들은 밀루아식 농담의 이해도가 떨어져서 요사이 약간 쓸쓸해지려는 참이었다.

정말로 피니건 거리의 모든 의복점이 흡혈귀 의상을 취급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덕분에 이디스의 선택 폭은 아주 넓어졌다. 멋진 망토는 흡혈귀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마르퀴즈 볼턴은 피츠시몬스에서 제일 의복에 까다로운 애였다. 카일은 금사로 다양한 무늬가 수놓인 적어도 서른 벌의 망토를 입었다.

빌라드의 차남은 장남처럼 기사는 아니었으나 그리폰 크리켓을 포함하여 여러 운동에 뛰어났다. 그의 어깨가 옷을 돋보이게 만들 정도는 맵시 있었다는 뜻이다. 나는 은여우의 털에 감싸인 카일이 근사하다고 생각하기 싫어서 자꾸만 볼턴에게 장난을 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