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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08화 (108/178)

올리브오일에 마늘을 달달 볶아 향을 내고 관자 버터구이와 루꼴라를 곁들인 파스타를 접시에 담아 돌아오면서, 테이블의 한쪽에 엘리자베스와 브레넌, 그리고 그 맞은편에 카일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카일의 옆에 앉기 어색해서 굳이 리즈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그녀가 남친의 옆구리를 포크로 찔러 반대쪽으로 이동하게끔 했다. 브레넌이 옆구리를 감싸 쥐고 억울함에 치를 떨었다.

“뭐야, 대체! 왜 그래, 너네? 피츠시몬스의 바늘과 실, 바람과 구름, 환상의 짝꿍 아니었어?”

“환상 다 뒈졌다.”

“환장이겠지.”

빈정거리는 소리가 동시에 나왔다. 참 지독하게도 죽이 맞는다는 생각을 했다. 속으로 혀를 차며 카일을 봤더니 그도 비슷하게 질린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 얘기 들었어?”

사뭇 가라앉은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하여, 리즈가 관자를 씹다 말고 재빨리 말했다.

“블로썸이 원소 마법 방어술 수업에서 메이나드를 다치게 만들었다는 거.”

가엾은 내 룸메이트는 여름 방학을 만끽한 대가로 2학기 수강 신청을 말아먹었다. 덕분에 나는 풍미 깊은 빌라드산 과실주에 취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안 골랐을 원소 마법 방어술을 듣는 브리아나-확성기-모슬리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낱낱이 들었다.

어제 원소 마법 방어술 담당 로슨 교수는 드디어 브리를 제외한 그의 제자들에게 하품 나오는 이론 따위가 가지는 가치가 전무함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지긋지긋한 교재를 집어던지고 마법진을 그릴 때가 도래하였는데, 켈란 일레스티아는 언제나와 같이 비밀스럽게 분주했고 에드가 라모스는 징계 중이었으므로, 로즈마리 블로썸의 실습 파트너 자리는 당연히 자칭 절친 미케일라 메이나드가 자치했다.

실습은 한 사람이 주문을 시전하면 다른 사람이 막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메이나드는 겁 많고 걱정 많은 브리와 달리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블로썸의 특기는 치료술이지 원소 마법이 아니었으니까.

메이나드가, 로슨 교수가, 그리고 블로썸마저도 간과했던 점이 있다면 그녀가 능력치를 올리기 위해 과도한 치트를 썼다는 거였다. 어쩌면 그녀의 마력은 입학 이래 단 한 번도 학년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켈란 일레스티아를 끌어내릴 만큼 강해진 것 같았다.

브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메이나드는 파트너의 마법진에서 나온 소용돌이에 휩쓸려 진짜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로 ‘쏘아졌다’. 실습실 천장에 세게 부딪힌 몸뚱어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걸레짝 신세가 되었다.

블로썸과는 대여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조그마한 파도를 만들고 있던 나의 겁쟁이 친구가 끔찍한 방향으로 뒤틀린 팔다리를 고스란히 목격했다. 이제 브리는 졸업을 앞두고 성적이 개판 날 것을 감안하고도 원소 마법 방어술 수강을 철회하기를 심사숙고하는 중이었다.

“월시에 이어 또 그런 일이 터지는 바람에, 학생회도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닌 거 같더라. 게다가 이번에는 범인이 ‘학생회의 공주님’이기까지 하니.”

그것은 피츠시몬스의 모든 소문을 꿰고 있는 카일에게도 드물게 새로운 소식인가 보았다. 그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하긴 내가 보기에도 블로썸이 치트로 얻어 낸 것들을 주체하지 못하는 중이라면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케이틀린 대제와 손을 잡은 블로썸과 달리 한낱 아카데미 학생에 불과한 카일에게는 예상치 못한 변수에 대응할 능력이 부족한 까닭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다음에 사지가 뒤틀리는 게 누구일지는 대수롭지도 않았다. 근래에 나는 두어 군데 부러지는 것쯤은 별거 아니라고 여기게 되었다. 카일의 말대로 고통은 무뎌지기 마련이었고 나에게는 그보다 중요한 게 차고 넘쳤다.

뭐가 되었든 간에 오래 곱씹을 여유가 없었다. 브레넌에게 메이나드의 부상은 가십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고 나서 다음 화제를 꺼냈다.

“학생회 하니까, 켈란 일레스티아의 올해 분장 콘셉트가 아무래도 아르네인 것 같다고 하던데.”

“아르네? 스티아의 사도?”

“걔가 엊그제 피니건 거리에서 독수리 깃털이란 깃털은 죄다 쓸어 담는 걸 보웬이 봤대.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 가발하고. 장발, 독수리, 딱 그거 아냐?”

“두피에 발모약을 바른 하피일 수도 있잖아.”

내가 고심 끝에 내놓은 가능성을 브레넌은 코웃음 한 번으로 치워 냈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허구한 날 악마 수도사나 괴물 해적 분장만 하던 회장님께서 달라졌다는 거지. 혹시 블로썸 취향이 그건가? 그렇게 안 봤는데, 꽤 발칙하네.”

“뭐가 됐든 끝내주긴 하겠다. 왜, 아르네는 거의 아무것도 안 걸쳤잖아.”

리즈가 한껏 시시덕거렸다. 브레넌은 남의 알몸에 신이 난 여친 때문에 입맛이 뚝 떨어졌다는 듯이 나이프에 줄줄이 꿰던 관자 버터구이를 시끄럽게 내려놓았다.

“자기야….”

“물론 나는 그 누가 발가벗는다 해도 나의 섹시한 광부 남친을 택할 거지만. 너희, 곡괭이를 든 브레넌의 팔뚝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지?”

“윽. 알고 싶지도 않아.”

“우웩.”

이번에도 맞춘 듯한 타이밍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즈는 브레넌이 내던진 관자 꼬치를 손수 남친에게 먹여 주며 그를 어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 입맛이 뚝 떨어진 쪽은 나와 카일이 되었다.

나는 파스타 면을 포크에 하염없이 감아 대는 카일을 곁눈질했다. 그와 의논할 것이 더러 있었다. 이디스의 가출부터 시작해서 이그나스의 비늘이라든가, 케이틀린 대제라든가, 블로썸이 갑자기 원소 마법의 달인이 된 사건이라든가.

켈란이 하필이면 스티아의 수많은 사도 중 아르네를 택한 이유도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서 켈란에게 아르네 분장을 제안한 것과 그게 관계가 없기는 힘들었다. 자의식 과잉이라는 비난을 듣는대도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고 느꼈다.

내 기준에서 이번에도 나는 사과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카일이 아무렇지 않게 어울리려고 한다면 아무렇지 않게 받아 줄 마음도 있었다. 어제는 자기 전에 몇 가지 상황에서 적절하게 건넬 화해의 농담을 머릿속으로 연습해 보기까지 했다.

내가 떠올린 ‘몇 가지 상황’은 식당에서 마주쳤을 때를 포함했다. 그러나 나의 상상에서 카일은 쭈뼛거리면서도 내게 말을 걸 기회만을 노리는 애였다. 루꼴라 관자 파스타가 담긴 접시만을 죽어라고 노려보는 애가 아니라.

그래서 나는 물을 뜨러 가는 시늉을 하면서 카일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제법 아팠을 텐데도 카일은 성질을 내기는커녕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더욱 화가 났다.

***

저녁 식사를 마치고, 켄드라 브래들리와 지지자들은 광장에 마련된 연단에 올라 그녀가 얼마나 빼어난지를 떠드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덤으로 그녀의 경쟁자인 제럴드 퍼셀이나 딜레이니 우드가 얼마나 무능한지도 떠들고 말이다. 어차피 삼삼오오 모인 군중들의 기억에 남는 것은 그거일 테니까.

오후에 퍼셀의 추종자가 뿌린 혼란 가루를 뒤집어쓴 우드가 비인간 특별 전형의 유용성 대신 저속한 농담을 지껄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켄드라를 노리는 잔악무도한 공격에 대응하고자, 나는 미아와 함께 연단 뒤편의 각 모퉁이를 지키듯이 섰다.

귀 끝이나 이빨이 뾰족한 학생을 예의 주시하는 한편 불온한 무리를 몰아내기란 정어리 마녀에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몇 사람의 입에서 썩어 문드러진 생선 가시가 튀어나온 뒤에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늦은 시간에도 분주하게 편지를 옮기는 날다람쥐들을 부식으로 나온 자몽 조각으로 꾀면서 무료를 달래던 찰나였다.

“아리엘.”

문득 밀밭에 부는 바람처럼 나직이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 손으로 검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마법진을 그리며 돌아봤다가, 곧바로 자세를 풀었다.

“뭐야, 제이든이잖아.”

이번에 내 목구멍에서 나온 말은 나의 다른 발화에 비해 요만큼도 웃기지 않았다. 애초에 우스갯소리인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든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청명한 가을 달빛 아래 수줍게 웃는 거대한 남자의 모습에는 어떤 싱그러움이 가득했다. 이윽고 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좋아해.”

“뭐?”

“내가.”

제이든이 엄지를 꺾어 스스로를 가리켰다. 다음으로는 검지를 펼쳐 나를 가리켰다. 무 자르듯 떨어지는 말투와 무뚝뚝한 표정. 말하는 내용마저 몇 시간 전과 완전히 같았다.

“너를.”

다만 그것이 뜻하는 바는 전혀 달랐다. 나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너무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나머지 등줄기를 따라 땀이 흘렀다. 얘가 왜 이래? 아까는 그렇고 그런 쪽으로는 꿈에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것처럼 굴었으면서.

“사귀고 싶어. 손잡고, 뽀뽀하고 싶어. 이런 감정은 처음이야.”

“야, 잠깐만. 갑자기?”

“갑자기 아냐. 낮에도 말하려고 했어. 안 돼?”

“안 되는 건 아닌데….”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 나누어 마땅한 이야기인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개방된 데다가, 낭만이라고는 먹고 죽으려 해도 느껴지지 않는 장소에서는 말이다. 연단에 설치된 음향 장치의 성능이 지나치게 좋은 탓에, 나는 제이든의 폭탄선언을 되새기면서도 줄곧 귀를 때리는 악마적인 가락에 집중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지금껏 음유시인 켈리 라미레즈의 최고 역작이라고 하면 단언컨대 <오, 노먼>이었으나, 엊그제 그녀가 켄드라에게 선물한 <브래들리는 승리를>은 감히 <오, 노먼>에 견주고도 남았다. 특히 후렴구의 중독성이 어찌나 강하던지, 경쟁자인 퍼셀이나 우드마저 무심코 흥얼거릴 정도였던 것이다.

덕분에 오늘자 피츠시몬스 타임즈에는 아카데미장인 마담 바틀렛이 특정 학생회장 후보의 응원가를 불러 물의를 일으켰다는 기사가 실렸다.

또한 험프리스 교수의 사무실에서 그 무시무시한 노래가 새어 나오는 것을 들은 사람도 있다고 했다. 내 생각에 세이렌도 그만한 명곡은 불러 본 적이 없을 듯했다.

아무튼 고백을 하거나 받는 와중에 울려 퍼지는 음악이 하필이면 <브래들리는 승리를>인 상황은 그다지 적절치 못했다. 그것이 그의 인생과 용생을 통틀어 아마도 첫 고백이라면 더욱 그랬다.

나는 복잡하게 묶인 뒷머리를 더듬어 리본 끄트머리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나중에 따로 보자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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