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06화 (106/178)

“비마탑 파벌의 휴스턴 교수님이 너를 꽤 좋아하지 않아? 퍼셀이 험프리스 교수님을 끌어들인다면, 그쪽을 노려 보는 건?”

“시도를 해 보긴 했는데, 아시다시피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어서요.”

리즈의 물음에 켄드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하기는 휴스턴 교수의 융통성은 마르퀴즈 볼턴의 싸가지만큼 없어서, 험프리스 교수의 개입으로 지저분해진 학생회장 선거에 그를 끼워 넣기란 하늘의 별 따기일 것이었다. 이윽고 생각에 잠겨 있던 브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드와이어 교수님은? 내가 봤을 때 그분은 휴스턴 교수님만큼 청렴한 타입이 아닌데.”

“거기는 이미 밀어주는 후보가 있더라고요. 딜레이니 우드가 드워프 혼혈인 거 알고 계셨어요?”

“우와, 어쩐지. 걔 힘 엄청 세더라.”

포크너가 혀를 내두르며 소매를 걷어붙여 울긋불긋한 팔뚝을 내보였다. 검술 수업에서 딜레이니 우드에게 농락을 당한 결과라는 것이었다.

“우드가 힘이 센 건 맞지만, 네 팔에 든 멍은 엄연히 훈련을 게을리한 결과야.”

아나이스가 다정한 태도로 일침을 놓았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퍼셀과 우드가 교수님들을 끼고 나오는 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어떻게든 비마탑 파벌을 끌어들여야만 해. 그래서 말인데, 아리엘.”

“어, 나?”

잘 닦인 유리창처럼 깨끗한 눈이 나를 향했다. 이윽고 지독하게 게으른 전투 마법사 공격대 모형에게 통사정을 하느라고 정신이 팔린 켈리를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어안이 벙벙하여 엄지를 들어 가슴께를 찌르자 아나이스가 단호하게 끄덕였다.

“제이든 스펜서가 휴스턴 교수님과 사촌이라고 들었어. 스펜서에게 부탁해 볼 수는 없을까?”

“제이든에게? 휴스턴 교수님을?”

“통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무의미한 시도는 아니라고 생각해.”

확실히, 은근히 가정적인 휴스턴 교수의 성품을 고려했을 때, 켄드라나 아나이스의 백 마디 읍소보다 제이든의 한마디 언질이 훨씬 효과적일 것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제이든은 대외적으로는 몸살감기로, 대내적으로는 스스로의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 통 여력이 없는 와중이었다. 그렇게 말했더니 켄드라는 갑자기 불쌍한 척을 했다.

“더 이상은 잡을 지푸라기가 없어요. 더구나 선배는 언제나 저와 미아의 영웅이었는걸요. 이번에도 멋지게 고난을 해결하실 거라고 믿어요.”

브리아나에게 그랬듯이, 켄드라는 내게도 그녀의 주특기를 선보였다. 약한 부분을 찔러 들어오는 것 말이다. 순식간에 달아오른 목덜미를 주무르던 내 귀에 불현듯 켈리의 환호성이 꽂혔다.

“이겼다!”

퍼뜩 놀라 쳐다보니, 켈리는 대단한 보물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의기양양하게 그녀의 모의 전쟁터를 집어 들었다. 가엾은 오우거 모형들이 널브러진 위로 그리폰 기병 모형 하나가 날고 있었다. 그것은 손에 들린 기다란 창을 치켜들며 위풍당당하게 세리머니를 선보이다가 어느 순간 켈리의 콧구멍을 푹 찔렀다.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광경에 배를 잡고 나니까 어느새 나는 켄드라와 새끼손가락을 얽고 있었다. 몽마에라도 홀린 기분에 눈을 깜빡이는 내게 그녀가 뻔뻔스레 웃어 보였다.

켄드라 브래들리에 대한 평가를 재고해야 하겠다고 느꼈다. 얘는 브래들리의 가주로서도 손색이 없었지만 차기 학생회장으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하면서 동시에 어딘가 꺼림칙한 구석이 있는 미소는 내 생각에 학생회장이 지녀 마땅한 소양이었다.

“저어, 아리엘 선배.“

여학생 살롱의 탈을 쓴 임시 켄드라 브래들리 선거 대책 위원회가 마무리될 때쯤에 미아 페터슨이 은밀하게 내 옷소매를 잡아 왔다. 그녀가 평소보다 더욱 작은 목소리로 귀엣말했다.

“이디스 님 소식 들었어요. 아무래도 저희 반푼이가 죄를 지은 거 같던데요. 걔는 기사가 아닌 여자를 접해 본 적이 없어서, 조금 징그러운 환상을 품고 있거든요….”

아무래도 미아가 말하는 ‘반푼이’는 페터슨 후작인 거 같았다. 나는 미아의 말투에서 그녀가 이디스의 가출에 얽힌 사연을 알고 있음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이디스와 가족처럼 지내는 나조차도 끈질긴 추궁 끝에 겨우 캐낸 건데 말이다.

전형적인 기사 가문에서 기사가 아닌 삶일랑 상상조차 않으며 살아 온 페터슨 후작은 동생의 말마따나 기사가 아닌 여자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때문에 그는 대개의 귀족 영애가 수틀보다 무거운 물건을 들어 본 적이 없을 거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알량한 기사도에 입각하여 아내를 그릇된 방식으로 대하기 일쑤였다.

여자들이 매춘부처럼 다루어지는 것만큼 저주스레 여기는 게 화초처럼 다루어지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냥 대회를 꾸리거나 기사단의 훈련에 참여하는 등 페터슨의 일원으로서 익혀야 마땅한 업무들에서 위험을 명목으로 배제되었을 때, 이디스는 우선 참았다. 그리고 그의 결정에 그녀가 얼마나 실망하였는지 말했다.

그랬더니 업무가 주어지기는 하였다. 말안장의 색을 정하는 업무 말이다.

그건 페터슨 후작이 최선을 다해 골라낸 비교적 안전한 선택지이자 그의 아내를 미쳐 버리게 만든 최악의 선택지였다.

이디스는 그녀의 앞에 놓인 네 개의 말안장 중 가장 딱딱한 것을 들고 남편을 후려친 다음에 곧장 짐을 쌌다. 처음에는 샌크릭으로 향할까 했는데, 백작 부부의 우려를 사기도 싫고, 마베릭의 놀림을 견딜 자신이 없어서 정처 없이 떠돌다가 피츠시몬스까지 왔다고 했다.

“빌어먹게도 그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걸 알아.”

브리아나의 지루한 공용어 단어장에서 기출 문제를 골라 표시하며 중얼거리던 이디스의 결연한 표정이 기억났다.

“언젠가 돌아가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냐.”

어쨌든, 이디스는 퍽 자존심이 강한 편이었으므로, 하필이면 남편의 동생에게 부부 간 갈등을 털어놓았을 리는 추호도 없었다. 페터슨 후작이 갑자기 벼락같은 깨우침을 얻어 스스로의 잘못을 고백했을 리도 없어 보였고. 당연한 의구심을 표하자 미아가 차분히 답했다.

“카일 선배께서 알려 주셨어요.”

“‘카일’?”

나는 미아에게 페터슨 후작 부부의 문제를 전해 준 사람이 카일이라는 점보다 미아가 그를 ‘카일’이라고 불렀다는 점에 집중했다. 날카롭게 되묻자 미아는 당황한 듯이 얼굴을 붉혔다.

“걱정 마세요. 저는 그 선배에게 관심이 없으니까요. 게다가, 밀루아는 혈족의 배우자의 혈족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잖아요….”

구구절절한 변명을 듣고 나서야 필요 이상으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엄청나게 머쓱한 기분에 사로잡혀 귀 뒤를 거칠게 긁적였다.

블로썸 때는 괜한 소문에 휘둘리던 중이라서 그랬다 치자. 근데 지금은, 그것도 블로썸과는 달리 카일과 나름대로 긴밀한 관계에 놓인 미아가 입에 담는 호칭 따위에 신경을 쓸 이유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걔가 내게 일방적으로 목을 맨다 뿐이지 우리가 소꿉친구 이상의 뭐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럴 마음도 없고.

절대로!

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동안 미아는 무슨 착각에 빠졌는지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더니 끝내 쩌렁쩌렁하게 용서를 구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사흘 굶은 들개처럼 나와 카일을 엮을 기회만을 노리던 몇몇은 무지하게 신이 났다.

나는 좋으면서 아닌 척하는 새침데기 여자애와 걔의 소꿉친구가 밤낮으로 쪽쪽대는 노래를 지어 부르는 켈리 라미레즈의 엉덩이를 호되게 까서 문 밖으로 쫓아냈다. 그러고는 재빨리 나머지 인원도 내보냈다. 임시 선대위고 나발이고 간에 이제 진짜로 끝이었다.

다만 제일 탐욕스러운 개를 내보낼 수 없는 점이 통탄스러웠다. 고약한 브리아나 모슬리는 잠에 들기 직전까지 히죽거리더니 나의 진심 아닌 진심을 무덤까지 가져가겠노라고 장엄히 선언했다. 아마 내일이면 피츠시몬스의 가장 어두운 복도에마저 추저분한 노랫말이 퍼지리라.

***

켄드라 브래들리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맺은 약속을 지킬 기회는 의외로 빠르게 찾아왔다. 언제나와 같이 꾸벅거리다가 책상에 콱 박기를 반복하던 내 머리통에 어느 순간 웬 바윗덩이가 닿았다.

익숙한 단단함에 고개를 바짝 들었다. 두툼한 팔뚝과 너른 어깨 끝에 가라앉은 이끼색 눈이 보였다.

“제이든!”

대경하여 외치니 나처럼 숙면을 취하던 몇 사람이 퍼뜩 놀라서는 괴상한 신음과 함께 깨어났다. 난나 교수는 난리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을 슬쩍 보고는 스트레스 조절 장치의 태엽을 서너 번 감은 다음 수업을 이어 나갔다. 침을 닦던 애들이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잠들지 못했다. 평소에 베개로 쓰기 딱 알맞던 고대 마법과 신화 교재는 깃펜을 놀렸을 때 마찰음이 적어서 필담을 나누기에도 알맞았다.

어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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