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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05화 (105/178)

“아끼지. 그 아이는 짐이 낳은 것 중 제일 어여쁘거든. 그러니 여태껏 살아 있는 것이고.”

그건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켈란을 해치울 수 있다는 소리 같았다. 나 같은 표정을 짓는 사람을 죽이거나, 메건 클리블랜드에게 극심한 후유증이 남을 금주를 새기듯이 말이다. 얼마나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는지 나는 잠시 그녀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지나가는 비렁뱅이를 말하는 줄 알았다.

켈란은 그를 이룬 모든 것이 결국엔 가짜라고 했다. 제국도, 아카데미도, 그의 감정마저. 이제 나는 그의 어머니가 보인 사랑마저 실은 가짜였음을 알게 되었다. 케이틀린 대제의 배에서 나온 황자와 황녀들 중 오로지 켈란 일레스티아만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유도.

목구멍까지 화가 치밀었으나 내뱉을 자신은 없었다. 이를 악물었더니 입 안의 살이 뜯어지기라도 했는지 혓바닥 위로 피 맛이 감돌았다. 구역질을 가까스로 삼키는 나를 보며, 케이틀린 대제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또 보자꾸나.”

그녀가 내 볼을 아프지 않게 두드리며 속삭였다. 고개를 미세하게 모로 젓기란 한낱 밀루아 자작가 영애로서 신성 일레스티아의 철권 황제에게 지나치다고 느껴지지 않을 범위에서 선보일 법한 최대의 반항이었다.

실은 ‘싫어요’라고 받아치고 싶었는데, 그러기에 내 간은 아직 내 배 속에 있었다.

***

난나 교수와 면담을 마친 뒤에, 내 기분은 전보다 훨씬 나빠졌다. 애초에 인간을 먼지 쓰레기만도 못하게 여기는 엘프에게 위안을 얻으리라는 기대를 해서는 안 되었나 보았다. 아버지 뼛가루도 공유한 사이니만큼 조금이나마 나은 취급을 받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돌이켜 보면 난나 교수가 아버지와 정말로 각별했으면 아무리 그들의 신이라고 해도 안 먹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케이틀린 대제에게 완전히 눌려 버린 스스로가 한심스러워서 그러기도 했다. 멍청하게 도리질이나 치는 게 아니라, 주말마다 볼턴의 잔소리를 오른 귀로 듣고 왼 귀로 흘리며 못생긴 스웨터를 입는 켈란에게 미안하지도 않냐는 말쯤은 꺼낼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가 되어서.

물론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대제가 생각을 바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치만,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 했던 게 아닐까.

짜증이 주체가 안 되어서 기숙사로 향하는 내내 발끝에 걸리는 걸 죄다 걷어찼다. 그중에는 누군가의 정강이도 있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5학년을 되풀이하기 시작한 이래 나는 그림자처럼 나를 따르는 무력감에서 일순간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진짜 지긋지긋했다.

찬바람이 부는 내 마음과는 달리 방의 분위기는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차향과 버터 냄새에 어리둥절하며 겉옷을 어깨까지 잡아 내렸다.

룸메이트와 나의 침대 사이에 작은 다과회가 열려 있었다. 크루아상에 초콜릿 시럽을 바르던 브리아나가 나를 보고 호들갑스럽게 인사했다.

그러자 브리의 건너편에 앉아 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챙이 높은 보닛 아래로 단정하게 땋아 묶인 빨간 머리가 퍽 익숙했다.

“이디스?”

“아, 미스 달튼. 여전히 칠칠치 못한 옷차림이구나. 넥타이는 어디 팔아먹었니?”

카일의 큰 누나, 빌라드 백작 부부의 장녀, 페터슨 후작 부인 이디스가 넓게 벌어진 내 옷깃을 티스푼으로 가리켰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브리아나가 고소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가슴이 껴서 답답하대요. 뻐길 만큼 크지도 않으면서!”

“생리할 때는 진짜 답답하거든!”

나는 평소에 얼굴은 엄청 빼어나지 않을지언정 몸매는 어디 내보내도 손색이 없다고 자부하는 편이었으므로 일단 발끈하고 봤다.

“그보다, 이디스가 왜 피츠시몬스에 있어? 카일도 알아? 페터슨 후작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리고, 당분간 그 진절머리 나는 남자를 혓바닥에 올리지 않도록 조심해 주겠니?”

“누구? 페터슨 후작? 맙소사, 이디스, 부부 싸움이라도 했어? 그래서 짐 싸 들고 가출한 거야?”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는 이디스의 발치에 기다란 여행 가방이 놓여 있었다. 기가 막혀서 묻자 이디스는 도리어 나를 향해 책망의 눈초리와 비난의 말을 던짐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들었다.

“너야말로, 아리엘. 카일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평소엔 네 얘기를 먼저 못 꺼내서 안달이던 애가 아주 조용하던걸.”

“말 돌리지 마, 이디스. 그거 되게 못된 버릇이야.”

이디스는 내가 세 번째로 좋아하는 빌라드이자 가장 좋아하는 페터슨이었기 때문에 나는 보통 그녀의 말에 껌뻑 죽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껌뻑 죽어 주기에 내 기분이 너무 엉망이었다.

지지 않고 받아치자 차향과 버터 냄새에 팽팽한 긴장이 섞였다. 브리아나는 서로 흘기는 우리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내 주둥이에 머핀을 쑤셔 넣었다.

“페터슨 후작 부인께서는 공용어 철자 말하기 대회 대륙 남부 지역 예선을 앞두고 내 코치가 되어 주기로 하셨어, 아리엘. 그녀가 어떤 이유로 피츠시몬스에 왔건 간에 지금은 엄연히 교직원이라구.”

“험프리스 교수님이 그래도 된대?”

브리가 대답 대신 이디스의 손에 들린 서류를 턱짓했다. 거기에는 이디스 페터슨을 공용어 철자 말하기 대회 피츠시몬스 대표인 브리아나 모슬리의 코치로 임명한다는 내용이 험프리스 교수의 딱딱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험프리스 교수를 찜 쪄 먹어 원하는 결과를 쟁취하기란 아마도 빌라드 저택에 유구히 전해져 내려오는 비술인가 보았다. 나는 머핀을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듯이 짓씹으며 백기 대신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이디스는 다시 온화해졌고 우리 사이에는 암묵적으로 페터슨 후작과 카일 빌라드에 대한 언급을 엄금하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

“두 명이나 더? 엄연히 너를 대장으로 모시는 입장이긴 해도, 반대하겠어, 아리엘! 이렇게 하나둘씩 받아들이다간 온 피츠시몬스 여자애들이 이 좁아터진 방으로 모이게 될 거라고!”

“걱정 마, 브리. 우리의 회칙에는 분명히 ‘피츠시몬스 재학 중인 5학년 여학생만 가입을 허용한다’고 쓰여 있으니까. 얘네는, 음, 준회원 같은 거라고 치자.”

“서운하네요.”

하나도 안 서운한 표정으로 켄드라 브래들리가 지껄였다. 나는 켄드라의 말을 한껏 과장해서 따라 한 뒤에 그녀보다 식당의 마법 인형이 더욱 감정적일 거라고 주장했다.

적어도 한 명의 학생이 고기 두 덩이를 가져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할 때에 그것은 화가 나 있었다. 하필 내 크림수프에만 후추가 왕창 들어가 있었던 건 아무리 생각해도 오작동으로 둘러대기 어려웠다.

“오늘은, 그러니까, 함께 논의할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모인 거야.”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들.”

켄드라가 빙글빙글 웃으며 나와 브리아나 사이로 끼어들어 앉았다. 문간에서 긴장한 듯이 두리번거리던 미아 페터슨은 아나이스와 리즈의 손짓에 그쪽으로 갔다. 켈리는 제출일이 빠듯한 전술학 과제 때문에 모의 전쟁을 재현하는 마도구에 열중하고 있었으므로 브리아나와 켄드라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에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너랑 아나이스가 얘를 학생회장으로 만들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치를 끌어들이기 시작하면 살롱은 엉망이 된다구!”

“저는 살롱을 망칠 생각이 없어요.”

켄드라가 엄숙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녀의 목소리는 진지했으나 말투는 부드러웠으며 혀끝은 꿀처럼 달콤했다.

“다만 선배님들의 고견을 구하고 싶을 뿐이죠. 현명하기로 이름난 모슬리 선배가 아니면 제가 누구를 의지하겠어요?”

이름난 정치가 집안의 가주로서, 켄드라는 정말로 손색이 없었다. 상대의 환심을 사기에 가장 적절한 방식을 택해 회유하는 솜씨가 어찌나 뛰어난지 입이 떡 벌어지고도 남았다.

켄드라의 몇 마디에 브리의 기세는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그녀는 엉덩이를 꾸물꾸물 움직여 켄드라가 앉을 자리를 넓혀 주기까지 했다.

교착 상태가 해소되자 아나이스가 가벼운 손뼉으로 분위기를 바꾸었다. 근래 나와 켄드라, 미아, 아나이스에 더해서 몇몇 후배 여자애들로 이루어진 ‘켄드라 브래들리 선거 대책 위원회’에서 주로 대두되곤 하던 안건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제럴드 퍼셀과 그를 지지하는 마탑 출신 교수 파벌을 어떻게 무찌를 것인가.

제럴드 퍼셀은 일레스티아 제국 산하 퍼셀 공국의 후계자로, 이번 학생회장 선거에 켄드라만큼 유력 후보로 손꼽히는 4학년 남학생이었다.

있는 거라곤 애매한 권위뿐인 퍼셀에게는 성적 우수, 품행 방정한 켄드라를 이겨 먹을 장점이 딱히 없었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그는 전략을 바꾸어 파격적인 공약으로 이목을 끌기에 총력을 다하고 있었다.

브리아나만 해도 일레스티아 궁정 극단의 프리모 우오모이자 케이틀린 대제의 애첩 중 가장 미남으로 꼽히는 제레미야 마이어를 졸업 연회에 초청한다는 소리에 꽤나 솔깃하지 않았던가. 은근슬쩍 핀잔을 놓았더니 브리는 귀밑머리를 손가락에 감아 돌리면서 엄청 민망스러워했다.

“야, 당장 옆 건물에 훨씬 잘생긴 켈란 일레스티아가 있는데 그게 그렇게 구미가 당기든?”

“전하는, 그러니까, 못 오를 나무잖아! 완전히 다르지!”

“웃긴다, 너. 제레미야 마이어는 오를 나무야?”

“혹시 모르는 거잖아. 그의 취향이 보기 좋게 통통하고 아주 많이 똑똑한 여자애일지….”

나와 브리아나의 아웅다웅이 길어지자 켄드라가 우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끼어들어 왔다.

“퍼셀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파격적인 공약이란 것도 대개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뿐이고… 배후에 있는 교수들이 문제죠. 이러니저러니 해도 피츠시몬스에서 그들이 가지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애초에 험프리스 교수님은 어쩌다가 퍼셀을 돕게 된 거야? 지금껏 교수가 학생회장 선거에 관여한 역사가 없잖아.”

“애국자시잖아요. 듣기로는 내후년쯤 은퇴해서 정계로 가신다는 소문도 있고.”

험프리스 교수의 사무실 벽면에 아주 떡칠이 되어 있던 퍼셀 공국의 국기를 떠올렸다. 테이블 위에 자랑스럽게 놓여 있던 퍼셀 공작 에밋 4세의 초상화도. 지독하게 반항적인 그리폰 기병 모형의 위치를 절벽 위로 옮기느라고 정신이 팔린 켈리를 제외한 모두의 고개가 한꺼번에 위아래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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