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04화 (104/178)

브라이스 나돈이 피츠시몬스로 돌아왔다. 대외적으로도 말이다. 그렇다는 건 에드가 라모스의 부상이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을 만큼은 회복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남의 신상을 훔친 죄로 남의 벌까지 대신 받는 중이던 진짜 브라이스 나돈은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그리하여 다음 주부터 쓰레기통을 메고 다니게 생긴 건 이제 에드가였다. 나는 나돈을 위해 모으던 쓰레기를 미련 없이 전부 버렸다. 월시가 칠면조 구이 꼴이 된 건 어디까지나 걔 덕인데 양아치 짓거릴랑 삼가는 게 도리에 맞았다.

반면 성인식, 아니 성룡식을 위해 떠난 사춘기 용은 사흘이 지났음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오전에는 너무 불안해져서 난나 교수에게 면담을 신청했는데, 드넓은 피츠시몬스에서 의지할 곳이 그녀밖에 없는 탓이었다.

평소에 서로 지탱해 주던 여학생 살롱 멤버들은 밀루아의 영웅에게 벌어진 일 같은 건 전혀 몰랐고 알아서는 안 됐다.

험프리스 교수는 알고 있는 듯했지만, 크리스타 에드워즈의 기억을 지운 마법 약이 누구 손에서 나왔을지를 생각하면 적어도 이번 문제에 있어서는 그녀를 버팀목으로 삼을 수 없었다.

학생회는, 글쎄. 에드가는 징계 때문에 남자 기숙사에 처박힌 신세였고 내게는 그와 달리 창문을 넘나드는 재주가 없었다. 볼턴이나 켈란은 자칫하다 블로썸에게 정보를 흘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제이든의 사정에 훤하면서 로즈마리 블로썸을 싫어하는 데다가 갇히지도 않은 카일 빌라드인데, 하필이면 걔랑은 한참 냉전 중이었다.

손가락을 꼽고 나니 인맥이 텅 비었다. 부족한 사회성. 항상 나의 적이었다.

냉혹한 자기반성에 시달리다 보니 고대 마법과 신화 교실이 위치한 별관 3층을 한참 지나 꼭대기층에 다다르고 있었다. 나는 끈질긴 데다 시간관념도 없는 오염 덩어리에게 특유의 딱딱한 말투로 비난을 퍼붓는 난나 교수를 상상하며 돌아서다가, 하마터면 뒤따르던 사람과 부딪힐 뻔했다.

“아, 미안.”

반사적으로 사과한 뒤에 왼편으로 몸을 물렸다. 공교롭게도 상대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어서, 내 진로에는 다시 옅은 분홍색의 양말과 앞코가 둥근 구두가 놓이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오른쪽으로 이동했더니 이번에도 발이 따라붙었다. 한 박자 느린 반응이었다. 부자연스러웠다.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자 재클린 포크너와 친하고 나와도 적당히 안면이 있는 5학년 여학생 메건 클리블랜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눈은 크게 뜨인 채였고, 입꼬리는 광대뼈까지 치솟아 있었다. 뒤집어진 입술 아래로 앙증맞은 덧니가 보였다.

내 기억에 메건은 저 덧니를 저주스러워했다. 들쭉날쭉한 울타리의 높이를 맞추는 주문을 이빨에다가 쓰는 바람에 여자 기숙사 공동욕실을 피바다로 만들었을 정도로 말이다.

주문은 실패했고 빠진 거라고는 메건의 조각난 잇몸을 기우기 위해 노력하던 채프먼 교수의 뱃살뿐이었으므로, 그녀는 여전히 웃을 때면 필사적으로 입을 가리곤 했다. 확실히 이상했다.

옆으로 가는 대신 뒤로 갔다. 내가 계단을 오르자 메건도 그렇게 했다. 몇 번을 반복하니 계단참에 발이 닿았다.

거기서 조금 더 움직이고 나서 멈춰 섰다. 눈앞의 메건이 내가 아는 메건이 아닌 건 분명했고, 문제는 누구냐인데, 여러 경우를 따졌을 때 그녀와 계단에 함께 서 있기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탓이었다.

“메건? 나한테 할 말 있어?”

속삭이듯 물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패닝턴이나 조디나 월시처럼 메건에게 씐 것 역시 시스템이라고 판단하는 게 자연스럽겠으나, 어쩐지 아닌 거 같아서 그랬다.

유기체보다 무기체에 가까운 시스템에게는 감정도 망설임도 없었다. 메건이 진짜로 시스템이면 나는 지금쯤 얘의 덧니가 아니라 천장을 보고 있어야 맞았다.

소름 끼치는 미소가 짙어졌다. 어깨랑 허리를 꼿꼿이 펴고 턱을 치켜올린 메건의 전신에 활력이 넘쳐흘렀다.

또 고작 열아홉 여자애로서는 갖추기 어려운 위엄과 기품.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에게서나 뿜어져 나올 법한. 가볍게 구부러진 손끝이 뺨에 닿은 순간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시스템이 아냐.

“이 아이에겐 없지.”

독특한 억양의 공용어로 말하는 메건의 다른 손은 스스로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그것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우아한 궤적을 나도 모르게 눈으로 쫓았다.

“짐에게는 있다.”

가느다란 검지와 중지가 옷깃을 살짝 벌렸다. 이윽고 빛나는 무언가가 언뜻 나타났다. 마법진 같았다. 작은, 하지만 정교한. 근래에 비슷한 것을 봤기 때문에, 그것이 주술이라는 사실을 쉬이 깨달았다.

에드가에게 새겨진 것이 그러했듯이 메건에게 새겨진 것 또한 그다지 안전해 보이지 않았다. 깡마른 가슴팍 위로 불쑥 튀어나온 쇄골 사이에서 거칠게 날뛰는 신성력이 스치는 시선에도 금방 들어왔다.

하기는 타인의 몸을 강탈하는 주술은 고대 밀루아의 오스왈드 2세 시절에도 금주에 속했다. 내 흑마법과 주술 성적이 나머지에 비해 꽤나 괜찮았으므로, 그것이 강대한 권력을 지녔거나 그에 맞먹는 주술 솜씨를 지닌 지극히 일부에게만 허용되리라는 판단이 가능했다.

이를테면 대륙의 역사 교재를 위인전으로 둔갑시킨 신성 일레스티아의 철권 황제라든가.

“밀루아의 아리엘 달튼이….”

“됐다. 인사 따위를 받으려고 온 것이 아냐.”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었더니 케이틀린 대제가 귀찮다는 듯 손사래 쳤다. 나는 미적거리며 일어섰다. 양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머리를 조아린 채였다.

“궁금해서 왔지. 대체 네가 뭐기에….”

메건 클리블랜드의 키는 나와 거의 비슷하였으나 그녀의 성대를 빌린 케이틀린 대제의 목소리는 무슨 십 피트 높이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는 듯이 무거웠다.

스티아의 냉담자인 브리아나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다더니, 케이틀린 대제가 딱 그 짝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굳이 스티아의 교리까지 가지 않아도 그녀가 세계에 의해 황제로 선택받았음을 알고 있는 바였다.

“월시 후작은 탐욕스러운 데다 아둔하지만 눈치가 빠르고 혀를 잘 놀려. 꽤나 아꼈지. 그의 콧대가 흉측하게 비뚤어지기 전까지는 말이야. 짐은 어여쁜 것만 아끼거든.”

“…….”

“말에서 떨어졌다 하더군. 이상하지 않나. 그의 승마 솜씨는 정평이 나 있거늘.”

가벼운 혀 차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바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월시 후작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고가 나에게 전해진 까닭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낙마는 고전적이지만 꼬리가 잘 잡히지 않았고, 높은 확률로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수단이었다.

일레스티아에서 케이틀린 대제의 눈을 피해 꾸며질 수 있는 음모는 단언컨대 거의 없었다. 아마도 그녀의 등잔 밑만이 유일하게 어두울 것이었다.

켈란 일레스티아.

시기가 참으로 공교로웠다. 월시 후작과 켈란의 사이가 원래 어땠을는지 모르겠으나 최근에 그와 반목한 사람은 나였다.

애덤 월시가 민달팽이처럼 민둥민둥해진 이후로 후작은 나돈의 왕자에게 물을 수 없는 죄를 밀루아 자작가 영애에게 물으려고 했다. 당장 그의 아들이 내 등허리를 찢어 놨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피츠시몬스 최고의 마당발이 끌어모은 목격자가 수두룩하지 않았더라면 엄청난 곤경에 처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재판에 회부될 수도 있었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월시 후작가는 일레스티아에서는 제법 유력가로 꼽혔다.

켈란이 무슨 꿍꿍이였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켈란을 두 명이나 알았고 둘 다와 어느 정도 친하다고 느꼈지만 그의 생각을 이해한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충분히 오해가 있을 만한 상황이라는 거다. 나를 위해 애덤 월시를 구워 버린 에드가처럼, 나를 위해 리암 월시의 코를 뭉개 놓았다고 착각될 만한. 아리엘 달튼이 켈란 일레스티아에게 어떠한 가치를 지니기라도 한다는 듯이.

어쩌면 아끼는 정부의 코가 뭉개진 것보다 그게 케이틀린 대제를 자극했을 수 있었다. 이미 ‘켈란과 친구로 지내 달라’며 나를 겁박한 바가 있는 대제로서는 열 안 받고 배기지 못할 소식일 테니까.

하지만 직접 찾아올 정도라고? 고작 아들의 교우 관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지된 주술을, 아무리 사생아라도 클리블랜드 백작가의 영애에게 새겨 가면서?

불현듯 웬 생각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마탑의 허가 없이 금지된 마법 약을 손에 넣고, 일레스티아의 황태자로 하여금 그걸 마시게 만들 법한 위인. 마르퀴즈 볼턴의 ‘그분’. 블로썸에게 치트를 쓰지 말 것을 경고한 조력자….

우아한 손놀림으로 바닷가재의 배를 가르던 켈란 일레스티아가 떠올랐다. 그의 모양 좋은 입술에서 나왔던 이야기가.

주인공이 아닌 내가 켈란과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하던 케이틀린 대제의 바람이 정말로 영원히 반복되는 9개월이라면. 여태껏 머릿속을 떠돌기나 하던 퍼즐 조각들이 마침내 모조리 맞물렸다.

“켈란에게 사랑의 묘약을 먹였나요?”

암만 동급생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순간의 변덕으로 내 목을 날려 버리고도 남을 대륙 패자를 마주 보기란 상당한 결심을 필요로 했다.

고민 끝에 고개를 들었더니 메건 클리블랜드의 푸른색 눈에 금색 이채가 돌았다. 광대뼈를 찌르던 입꼬리는 순식간에 턱끝까지 추락했다.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답변처럼 보였다. 내가 바라던 답변은 아니었다.

“‘운명의 물레’가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 알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너 같은 표정을 짓는 사람을 수도 없이 죽였다.”

한 눈썹을 위협적으로 치켜든 케이틀린 대제가 조용히 말했다. ‘짐이 스티아께 또 다른 죄를 짓게 하지 말아 다오.’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중 제일 가느다랐으나 내 외침을 토막 낼 만큼은 뾰족했다.

“켈란을, 아끼시잖아요.”

구멍이 난 말의 파편들을 그러모아 호소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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