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용과 ‘감응’하게 되었다는 건….”
[용이니까. 반 정도는.]
용의 걷는 속도는 나는 속도보다 훨씬 느렸다. 난나 교수의 오두막으로 향하는 동안 우리에게는 꽤나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 내가 목격한 신비를 충분히 이해할 시간 말이다. 제이든은 학생회답지 않게 인내심이 강한 편이었으나, 그의 등짝에 달라붙은 불한당이 달고 맛난 간식으로 협박하자 끝내 굴복했다.
기나긴, 무슨 동화 같은 이야기가 끝나자 나는 턱을 떨어뜨린 채 멍하니 있었다. 제이든은 의외로 덤덤한 태도였는데, 내게 보이는 게 검은 비늘로 뒤덮인 그의 뒤통수가 아니었다면 다르게 느낄 수도 있었다.
[난…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뭐?”
[인간들은 나를 ‘스펜서 공자’라고 부르고, 용들은 나를 ‘이그나스’라고 불러. 내겐 스펜서 영지에서 부모님과 함께했던 기억이 있으면서 동시에 산드쉘 계곡에서 권태에 시달렸던 기억이 있지. 또 평소에는 인간처럼 보이지만 맘만 먹으면 이마에 뿔이 돋거나 등에 날개가 달리게끔 할 수 있어. 시도해 보지는 않았지만 브레스를 쏠 수도 있겠지. 그러면 도대체 누구인 거야, 나는?]
방금 내렸던 평가를 즉시 철회했다. 제이든은 덤덤하지 않았다. 비뚤게 가는 검은 용은 내가 지금껏 봤던 제이든 스펜서 중에 가장 혼란스러워 보였다. 아마도 제이든은 열셋에 용의 심장을 삼킨 이래로 줄곧 스스로에 대해 고민해 온 거 같았다.
혼자서 말이다. 그 사실은 내게 약간의 서글픈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아무튼 비뚠 방향으로나마 꾸준히, 우리는 난나 교수의 오두막과 가까워졌다. 곧 돌과 모래로 꾸며진 정원이 멀찍이 나타났다. 용의 등을 미끄러져 내려와 바닥에 끌리는 투명 옷감을 하염없이 걷어 올리다가, 나는 아까까지 줄곧 되뇌고 있던 위로의 말을 까먹어 버렸다.
용과 관련된 농담이라도 떠들어야 되나 싶어서 머뭇거리는 사이 입구를 장식하는 아치형 나무 구조물까지 갔다. 나무를 통째로 깎아 만든 것처럼 투박한 아치의 옆면에는 작은 종이 달렸는데, 종의 당김줄에 ‘용건이 있으면 당기시오’라고 쓰인 종이가 매여 있었다.
밀루아의 용기사가 실은 반 정도 용이고 현재 극심한 허기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보다 급한 용건은 세상에 없었다. 나는 거침없이 당김줄을 잡아당겼다. 맑은 땡그랑 소리가 숲의 고요한 공기를 뒤흔들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어디선가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났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자 아치에 조각된 도마뱀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나무 눈알을 한참 굴린 끝에 나를 찾아냈다. 이윽고 활짝 열린 나무 주둥이 사이로 나무 혓바닥이 날름거렸다.
[뻣뻣한 갈색 머리. 둥근 눈. 미스 오브라이언? 아냐. 살짝 들린 코끝과 두꺼운 입술. 지저분한 차림새. 미스 달튼이로군. 고대 마법과 신화 교실에 문의함이 있지 않던가?]
“어… 난나 교수님이신가요?”
[묻는 대상이 미스 달튼의 눈에 보이는 존재인가? 그렇다면 아니, 그는 우리의 네바야. 그의 입을 빌린 나에게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이거 용이에요? 도마뱀이 아니고요?”
‘네바’는 엘프 말로 ‘신’이라는 뜻이었다. 다소의 장난기를 담아 대꾸하며 나무 도마뱀-누가 봐도-과 진짜 용, 그러니까 제이든을 번갈아 봤다. 얼핏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거대한 무언가의 실루엣이 움직였다. 뜻밖에 이름을 불린 개처럼 고개를 갸웃대는 모양새였다. 묘하게 귀여워서 웃음을 참았다.
[도마뱀? 무례하군. 열두 시 이십칠 분에 갑자기 방문한 것만큼이나 무례해. 기숙사 사감과 5학년 징계 담당 그리고 학생회에 즉시 날다람쥐를 보내겠어.]
“와, 교수님, 잠시만요!”
[5… 학… 년… 의… 미… 스… 달… 튼… 이… 한… 밤… 중….]
나무 도마뱀의 나무 목구멍은 흥분한 난나 교수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편지지에 펜촉이 스치는 소리 또한 완벽하게 전달했다. 당황한 나머지 제이든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랬더니, 그게 무슨 신호인 줄 알았는지, 제이든은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돌풍으로 투명 옷감이 날아가자 검은 용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나는 난나 교수에게 제이든의 상태를 상담하려고 했지만 섣불리 그의 정체를 밝힐 생각은 없었으므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입을 떡 벌린 나를 보고 제이든이 다시 갸웃거렸다. 아까와 똑같은 동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만큼 귀엽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맙소사, 네바?”
퍼뜩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나무 목구멍에서 사각사각 대신 우당탕쿵쾅 소리가 나기 시작한 지 삼십 초도 지나지 않아, 보호복 위로 파자마를 걸친 난나 교수가 말 그대로 굴러서 등장했다. 그녀가 이동한 궤적을 따라 모래 정원에 기다란 자국이 생겼다.
***
난나 교수는 용과 엘프를 제외한 모든 종족을 혐오했다. 그것의 나쁜 점은 그녀의 말과 행동에서 느껴지는 불쾌감을 감내해야 한다는 거였고, 좋은 점은 피츠시몬스의 교수진 사이에서 다소 낮은 나의 평판이 내 발화의 신뢰성을 감소시키지 않는다는 거였다. 난나 교수에게 있어 인간은 전부 평등하게 불결하고 저속했다.
하긴 엘프는 가장 신실한 일레스티아의 신관보다 광적인 믿음을 지닌 종족으로 유명했다. 내가 ‘네바’와 함께 나타난 이상 내 주장을 수용하지 않기란 그녀의 믿음을 배신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제이든의 판단도 영 틀려먹은 건 아니었다. 모습을 드러내는 거 말이다. 나는 검은 용의 두툼한 발등에 다정스레 손을 얹었다. 그의 머리통은 내가 있는 힘껏 뛰어도 닿지 않는 높이에 있었다.
다행히, 피츠시몬스보다도 오래 살았던 난나 교수에게는 제이든의 이상 반응이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그녀의 친한 친구의 배우자의 증조모가 네바를 바로 곁에서 모신 까닭이었다.
난나 교수에 따르면, 제이든은 허기가 심해진 것이 아니라 충동 억제가 어려워진 것이라고 했다. 충동 억제가 어려워진 이유는 정서 불안정이었고, 정서 불안정의 이유는, 놀랍게도, 그가 성장 발달 단계상 성년기에 접어든 탓이었다.
“사춘기?”
“비슷해. 하지만 조금 달라. 너희 종족의 언어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군. 발전이 부족해. 언어학적으로 말이야. 하긴 인간은 눈 깜빡할 새 죽어 버리니까.”
“네에, 뭐, 알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죠?”
귀를 후비며 묻자 난나 교수의 보호복 전면에 달린 정체 모를 기계가 높은 스트레스 수치에 대한 경고음을 발산했다.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오래도록 사느니 눈 깜빡할 새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둥지를 꾸려야 해.”
말을 이어 가기 전에 난나 교수는 괴상한 장치를 작동시켜 연기 같은 것을 보호복 내부에 퍼뜨렸다. 경고음이 잦아드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심신을 안정시키는 향이나 뭐 그런 거 같았다.
“그건 네바의 완전한 성장을 증명하는 의식이야.”
“둥지라면 이미 있는데요.”
“망가졌을 거야. 아마도. 찾아가 봐. 둥지는 네바에게 아주 중요해. 성년을 앞둔 네바라면 더더욱.”
난나 교수가 빠르게 말하며 제이든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팔을 교차하여 스스로의 어깨를 짚은 뒤 기도문을 웅얼거리자 제이든은 인상을 약간 찌푸렸다. 그가 툴툴거렸다.
[이그나스의 둥지는 멀쩡했어… 적어도 내가 거길 나오기 전까지는.]
“그새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지. 아무튼 시도해 본다고 해서 손해는 아니잖아.”
구석부터 밝아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제이든을 달래었다. 기왕 산드쉘 계곡으로 떠날 거라면 아침이 오기 전에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짙게 깔린 밤의 장막이 검은 용으로 하여금 은밀하고 안락한 비행을 도와줄 것이었다.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난나 교수와 달리 제이든은 난나 교수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거 같았다. 하지만 나와 호박등 토피의 끈질긴 공세에는 적이 없었다. 끝내 검은 용의 고개는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러자 난나 교수는 우선 마음속 소용돌이에 저항하느라고 축 늘어진 날개에서 노움 발톱이 꿰어진 관을 걷어 내었다. 인간이야 바람의 기운이 지나치면 감기에 자주 걸리거나 문란해질 수 있겠으나, 용에게 바람이 충만한 것은 당연하므로 땅의 기운을 두르기란 족쇄를 차는 거나 다름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카데미에 숨어든 사기꾼이 언젠가 사고를 치리라는 걸 예견하기란 점술사가 아니어도 가능했다. 그래서 알바라도 교수가 이 사달에 미약하게나마 일조했다는 점은 놀랍지 않았다.
그녀가 제이든의 본질을 꿰뚫어 봤다는 건 놀라웠다. 아무래도 알바라도 교수의 정령술 실력은 점술보다 뛰어난가 보았다.
다음으로 난나 교수가 꺼내 든 것은 주먹만 한 도자기 함에 담긴 가루였다. 그녀는 그것을 물에 걸쭉하게 개어 제이든에게 갖다 바쳤다.
수상한 수프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감과 동시에 흐리멍덩하던 눈이 또렷해졌다. 감탄하며 비법을 물었더니, 평생을 정화된 숲에서 살아 온 엘프의 유해이니 맛도 좋고 원기 회복 효과도 뛰어난 게 당연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난나 교수의 부친도 네바의 일부로 거듭남을 영예롭게 여길 거라나.
제이든이 마시던 것을 힘차게 뿜어내자 내 얼굴에 엘프의 유해가 흩뿌려졌다. 이로써 나는 난나 교수의 부친이 1할쯤 함유된 몸이 되었다.
“있잖아, 제이든.”
얼마나 경악스러운 과정을 거쳤든 간에 제이든의 날개에는 힘이 돌아왔다. 나는 바닥에 이마를 대고 조아린 난나 교수를 보고,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듯 기지개를 켜는 제이든을 본 다음에 픽시의 재채기만큼 작게 속삭였다.
“넌 꼭 ‘누구’여야 하는 거야?”
내가 만났던 어떤 인간도 둥지를 짓는 식으로 사춘기를 극복하지 않았다. 신화 시대부터 살았던 고룡 이그나스가 사춘기이던 시절은 아득할 것이었다. 난나 교수가 내린 뜻밖의 결론은 나로 하여금 제이든의 혼란과 불안을 가중시키거나 혹은 가라앉힐 어떠한 가능성을 떠올리게끔 했다.
“왕궁보다 커다란 저택의 도련님이든, 황금을 벽에 바른 둥지의 주인이든, 네가 엄청 크고, 엄청 착하고, 미소가 엄청 예쁜 내 친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
내 생각에 제이든은 스펜서 공자도 산드쉘 계곡의 패자도 아니었다. 근데 뭐 어쨌단 말인가? 제이든이 누구이든 그의 삶은 환상적일 거였고 그를 동그랗거나 네모난 상자에 욱여넣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너무나 특별한 별 모양의 보물인 탓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제이든이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어느 쪽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하지 않아도 될뿐더러, 그게 우리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결단코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잘 울고 몸이 약한 빨간 머리 어린애가 대개 체인질링이라는 사실이 하나도 안 중요하듯이.
눈을 깜빡이는 이외의 반응이 돌아오지 않아서 제이든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별과 별 사이를 가로지르는 검은 용의 날갯짓은 내가 본 것 중에 최고로 힘찼다. 그의 날개를 붙잡은 노움 발톱들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