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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01화 (101/178)

잘린 나무 밑동이 드문드문 있는 세 갈래 길로 접어들자마자 스프리건의 고약을 발랐다. 심호흡을 두어 번 하니 웬 바람이 눈꺼풀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끝도 없이 확대되는 돋보기를 숲의 모든 곳에 갖다댄 것처럼 시야가 넓어졌다. 빠르게 돌아가는 풍차 날개에 매달린 듯한 기분이 계속 들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들이 보여서 그런가 보았다.

속이 좋지 않았다. 멀미에 익숙한 나로서는 생경한 경험이었다. 치미는 토기를 참아 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로소 글로윈 숲의 무엇이든 내 눈을 피하지 못하리라. 제 아무리 강력한 불멸의 존재여도 말이다(위습은 빼고. 에드가 라모스에게 단언한 바와는 달리 나는 그것들을 반딧불이나 가끔은 픽시와도 구별하지 못했다.).

남쪽에서는 켄타우로스가 산책로를 걷는 어린 연인을 놀래키는 중이었다. 서쪽으로는 온실이 나왔다. 머리를 차곡차곡 포갠 채 졸고 있는 삼두견이 귀여웠다.

북쪽에는 방금 결성된 스프리건 무용단이 아직도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실은 걔들은 나를 기리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냥 춤을 추고 싶었던 거 아닐까?

검은 용은 동쪽에 있었다. 그다지 멀지 않은 위치였다. 다만, 꼬리로 몸을 감고 괴로운 듯 웅크린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싶어서 가슴이 철렁했는데, 찬찬히 살피니 외상은 없는 듯했다. 더구나 겁쟁이 픽시들이 기웃대는 꼴을 보아하니 굳이 심각한 상황을 가정할 필요까지는 없을 거 같았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몇 번 봤다고 정이 들었나 보았다. 조디나 다른 애들이 어떻게 부르든 나에겐 생명의 은인이니 일말의 좋은 감정도 없으면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거긴 했다.

배낭과 허리춤을 더듬어 응급처치를 위한 붕대나 상처약, 진통제 같은 것들과 호신용 마도구의 위치를 확인한 뒤에 미친 듯이 달렸다.

안 그래도 복잡한 시야에 속도감이 더해지니 장난 아니게 어지러웠지만 어떻게든 견뎠다. 지금 걸치고 있는 겉옷은 내 가을-겨울용 외출복 중 극히 드물게도 천갑옷을 연상시키지 않았다. 켈란의 군청색 공단 셔츠 다음으로 더럽혀선 안 되는 옷이라는 뜻이었다.

메슥거려서든 숨이 턱에 차서든 진짜 이대로는 죽겠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 속도를 줄였다. 무릎에 손을 얹고 헛구역질을 하는데, 별안간 흙 사이로 새까만 뭐가 눈에 들어왔다.

집어 들어 보니 약간의 광택이 흐르는 부채꼴의 돌멩이였다. 달에 비추자 예리하게 반사되는 빛이 예뻤다.

주머니에 갈무리하고 십여 걸음쯤 걸었다. 똑같은 돌멩이가 신발코에 걸렸다. 나아갈 길을 빵조각으로 표시했던 동화 속 남매라도 된 기분이었다. 쥐덫에 고개를 들이밀기 직전의 생쥐거나. 묘한 기분에 볼을 긁적이며 조금 더 가자 아니나 다를까 아까 봤던 돌멩이가 또 있었다.

그제야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것들이 예사 돌멩이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건 용의 비늘이었다. 전에 봤던 비늘들과는 규모에 차이가 제법 있어서 바로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사육장의 용들은 죄다 꼬마였으므로 비늘도 기껏해야 손톱보다 살짝 컸다. 나는 마물학 척척박사였기 때문에 그것이 별로 긍정적인 신호가 아님을 알았다. 꼬마 용들이 비늘을 떨어뜨리는 건 마음이 병든 탓이었다.

내가 봤을 때 마음의 병은 몸의 병보다 심각한 사안이었다. 나의 배낭에는 붕대와 상처약과 진통제, 소화제에 알레르기 약, 제산제까지 있었지만 마음의 병을 완화하는 약은 없었다.

비늘이 점점이 이어진 곳으로 발을 재촉했다. 이윽고 하늘을 다 가릴 정도로 높이 자란 나무들이 둥그렇게 심긴 장소가 나타났다.

나무 가운데에는 그보다 아주 약간만 작은 용이 미동도 않고 있었다. 웅크린 등이 불규칙하게 오르내렸다. 마른 나뭇잎이 내 신발에 짓이겨지는 소리에 용의 콧잔등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놀던 픽시들이 확 흩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네 개의 눈꺼풀이 느리게 열렸다. 나를 발견하자 용은 저번처럼 날아서 도망갈 요량이었는지 날개를 퍼덕거렸다.

그러나 힘 빠진 날갯짓으로는 1피트도 떠오를 수 없었다. 거대한 몸뚱어리는 약간 떠올랐다가 곤두박질치기를 반복했다. 쿵 소리가 지축을 열 번도 넘게 뒤흔드는 동안 잠자코 기다렸다.

“어디 아파?”

몸부림이 잠잠해진 틈을 타서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용은 질리지도 않고 나를 향해 울부짖었다. 눈을 꼭 감고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 침 범벅이 된 것들 목록에는 나의 얼굴과 머리카락에 더하여 소중한 외출복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 봤자 안 도망갈 거….”

[저리 가!]

불현듯 귀 안쪽으로 말이 파고들어 왔다. 마치 그게 내 생각의 일부라도 되는 마냥. 잠시 멍했다가 이내 환희했다. 가슴이 벅차서 숨이 막 가빴다. 가까스로 뱉어 낸 목소리는 꼴사납게 쪼그라들어 있었다.

“역시, 역시 너였구나! 스펜서 저택에서 나 도와줬던 거!”

[가라고 했잖아!]

“아니, 안 가. 이제 진짜 안 갈 거라고.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꼭 알아야겠으니까. 너는 모르겠지만 내가 엄청나게 집요하거든.”

빌라드의 고집보다 덜할 뿐이지 달튼의 고집도 약하지는 않았다. 나는 용의 얼굴에서 두 발짝쯤 떨어진 곳에 털퍼덕 앉았다. 그러고 나서는 의문들이 담긴 머릿속 상자를 헤집었다. 이를테면, 성년에 다다른 용이 스펜서 저택이나 피츠시몬스에 있는 이유.

내가 알기로 용은 극히 일부의 개체만이 몇 세기에 걸쳐 자랐고 대부분은 성장 과정에서 모조리 죽었다. 만일 행운의 바늘구멍을 통과하여 무사히 성장하더라도, 정화된 숲이나 계곡에서 둥지를 틀고 살면서 영생을 누리는 동안 필멸종의 역사에는 결코 관여하지 않는 것이 용의 습성이자 그들이 지키는 단 하나의 율법이었다.

즉 인간 사회에서 그만큼 크게 자란 용과 만날 확률은 0에 가깝다는 뜻이었다. 용기사를 보유한 밀루아만 해도 해도 제이든이 처치했다고 알려진 사악한 용 이그나스와, 제이든이 타고 돌아와 왕실에 헌납한 킨드레이 외에는 알려진 성체가 전무했다.

제이든에게 숨겨 두었던 용 친구라도 있었던 걸까? 스펜서 저택과 피츠시몬스의 공통점이라 함은 제이든 스펜서뿐이었다. 나름의 추리를 떠벌렸더니 검은 용은 천천히 도리질을 쳤다.

[안 가면 안 말해 줘.]

“가면 어떻게 말할 건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묻자 용은 허를 찔린 듯 조용해졌다. 너도 참 지능이 높지는 않구나. 무려 스프리건의 고약을 발라 눈앞이 뒤섞이는 와중에도 꿈쩍 않고 떠 있던 상태 창을 아련히 보며 말을 돌렸다. 어차피 진짜로 알아야 하는 건 다른 거였다.

“그럼, 딱 두 가지만 알려 줘. 하나, 네 이름이 뭔지. 둘, 지금 뭐가 문제여서 이 꼬락서니가 났는지.”

나를 왜 도왔는지도 알고 싶었지만 거기까진 너무 간 거 같았다. 실은 이름부터도 알려 주기 싫다고 뻗댈 가능성이 더욱 컸는데, 밑져야 본전이니 질러나 봤다. 알 때까지 농성할 예정이었으니까 별로 밑진 것도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 용은 내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는 듯 굴었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본격적으로 농성 준비를 했다. 배낭에서 담요와 물통, 취사에도 쓰이고 간이 난로로도 유용한 샐러맨더의 무지개 비늘, 그리고 호박등 토피를 주섬주섬 꺼내었더니 용이 화가 난 듯이 그르렁거렸다.

[배가 고프단 말이야!]

“뭐?”

잠시 궁리하다가, 그것이 두 가지 질문 중 하나에 대한 답변임을 이해했다. 나는 호박 등 토피를 까다 말고 딱딱하게 굳어 용을 쳐다봤다. 그의 송곳니는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날카로워서 나의 정수리부터 발꿈치까지 단번에 꿰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배가 고파. 아무리 먹어도. 미칠 거 같아. 지금껏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유를 모르겠어. 그러니까 빨리 어디로든 가 버려. 이대로라면 너를 집어삼킬지도 몰라.]

“그, 그치만, 용은 인간을 먹지 못한다고 배웠는데.”

[안 먹는 거지 못 먹는 게 아냐. 맛이 없으니까.]

위협하듯 부릅뜬 녹색, 혹은 노란색 눈이 번들거렸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은 흥분으로 인해 확장된 채였다.

나는 용에게서 약간 물러난 뒤에 도로 앉았다. 그러고는 완전히 포장을 벗긴 호박 등 토피를 그의 아가리로 던져 넣었다.

내 간에도 기별이 안 오는 조그마한 간식은 용에게는 아마 먼지처럼 느껴질 거였다. 엄청나게 달달한 먼지 말이다.

사육장의 꼬마 용들은 단 음식 암살자인 나만큼이나 단맛을 좋아했다. 꼬마가 아니게 되어도 용은 용이었으니까, 뇌물은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용의 입매가 풀어졌다. 이윽고 아가리와 눈꺼풀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꽤나 우스우면서 흥미로운 현상이었다. 아마도 호박등 토피가 용의 덩치에 비해 너무 조그마해서 마법 효과도 미미한가 보았다.

검은 용의 이목구비는 꼬마 용들보다 훨씬 커다랬다. 그래서 나는 그의 표정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내가 지나치게 인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면 그는 웃고 있었는데, 입이 확 벌어지고 콧잔등이 확 찡그러지는 동시에 확 내려간 눈꼬리가 퍽 인상적이었다.

인상적이다 못해 익숙했다.

벼락처럼 뒷목을 두드리는 깨달음을 쥐어다가 머리통에 집어넣었다. 분명히, 나는 저런 미소를 짓는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그는 용처럼 스펜서 저택과 피츠시몬스에 머물렀고, 용처럼 로즈마리 블로썸의 공략 대상이었으며, 근래에 원인불명의 허기에 시달린 데다가, 결정적으로 현재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도저히,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두 가지 질문 중 나머지 하나에 대한 답도 알 거 같았다. 입술이 간질거렸고 혀가 따끔따끔했다.

“제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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