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100화 (100/178)

대외적으로 ‘에드가 라모스’로 여겨지는 브라이스 나돈은 형제의 죄를 대신 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내려진 징계는 의외로 가벼웠다.

보름의 외출 금지 기간이 지나면 나돈은 언젠가의 나처럼 쓰레기통을 등에 진 꼴이 될 예정이었다. 그건 내가 여태껏 빌어먹을 신문부의 배설물을 통해 접한 것 중 최고로 유쾌한 정보였다.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에 내 왼쪽에 앉은 사람이 브리아나에서 포크너로 바뀌었다. ‘브리는?’ 작게 귀엣말하자 포크너는 턱으로 연단을 가리켰다. 공용어 철자 말하기 대회의 챔피언이 수상 소감을 발표하는 중이었다.

밀려드는 아쉬움에 땅을 쳤다. 거기에 선 브리의 머리 꼭대기에도 ‘가장 멋진 친구’가 떠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탓에, 나는 며칠 전부터 신중히 마법 폭죽을 골랐다.

시 낭송 대회에서 우승한 로즈마리 블로썸이 켈란에게 의지하여 그리 높지도 않은 연단을 내려간 다음에는 켄드라 브래들리의 차례였다. 전년도의 우승자는 출전하지 못하는 규칙에 따라, 내년 검술 대회에 켄드라는 관중석에서 연회를 즐길 것이었다.

어쩌면 시 낭송 대회에 나타날 지도 모르지. 왈가닥이라 평가 받는 켄드라 브래들리에게도 엄연히 공작가 후계자에 걸맞은 기품이 있었다. 나는 새끼손가락을 치켜들고 시집을 넘기는 켄드라를 상상하고 웃음을 참았다.

시상식의 마지막 순서는 재학 중인 모든 수상자의 단체 인사였다. 당연하게도 시 낭송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는 아나이스를 필두로 하여 역대 수상자들이 등장하는 동안 켄드라는 그녀에게 장식 끈을 건네어 준 여자애들, 가끔 남자애의 이름을 하나하나 읊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중에 조던 니콜스의 이름도 있어서 깜짝 놀랐다. 분명히 니콜스는 켄드라에 의해 꿈이 좌절된 페드로 캔트렐과 썸을 타고 있었던 거 같은데. 팬심과 사랑은 엄연히 다르다는 걸까.

“캔트렐이랑 깨졌잖아, 니콜스.”

내가 표한 의문을 켈리가 즉각 받아쳤다.

“월시랑 바람났대.”

그러자 점잖은 척 등을 돌리고 있던 포크너 쪽에서 자그마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수준 떨어지는 애들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다더니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새로이 밝혀진 월시의 부정은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 월시가 어떤 쓰레기 자식인지 떠벌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던 예전 같았으면 흥분하고도 남았을 소식인데 말이다.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은 전 남친을 두고 돌아설 때에 느꼈던 산들바람 같은 해방감이 모든 증오를 앗아가기라도 했나 보았다.

쇠꼬챙이로 내 옆구리를 가른 것처럼, 그의 한심스러운 행동들도 결국엔 전부 시스템의 농간이지 않나 싶어서이기도 했다. 저번에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 갔다 온 이래로 나는 틈만 나면 ‘진짜’와 ‘진짜가 아닌 것’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튼 기꺼운 일이었다. 케케묵은 것들에 발이 묶여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수확의 달 연회에 걸맞은 성장이 나에게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꽤나 들떴다. 나는 월시의 불가사의한 매력을 놓고 토론하는 켈리와 포크너에게 합류하지 않고 맡은 바를 충실히 이행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손바닥이 터지도록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수를 암만 쳐도 연단에 길게 늘어선 수상자 무리는 우왕좌왕할 뿐 무릎을 굽히지를 않았다.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상황을 살핀 끝에 당연히 거기에 있어야 할 무언가의 부재를 깨달았다. 바로 제이든 스펜서의 거대한 몸뚱이였다.

“제이든 어디 갔어?”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묻자 포크너와 켈리도 월시의 매력을 착즙하다 말고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열다섯에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검술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밀루아의 영웅은 단연코 모든 시상식에 참석해 왔다.

애초에 제이든의 성품을 안다면 시간을 얼마나 되돌리든 걔가 아카데미 행사를 빼먹을 만큼 불량해질 수 없음에 손모가지라도 걸 수 있을 터였다.

사건이 발생한 게 틀림없었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사건이. 밀려드는 불안감에 뒷골이 당겨 왔다.

***

수확의 달 연회 이후로 제이든을 만나지 못한 채 며칠이 흘렀다. 학생회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그는 지독한 몸살감기를 앓고 있는 중이었다. 의심스럽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스펜서 부인이 말하길 그녀의 아들은 너무 강건해서 살면서 기침 한 번을 뱉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나의 착한 친구가 많이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제이든의 뭣도 아닌 내가 나서기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금전이나 권력이나 하다못해 인맥이라도 있었으면 캐내어 봤을 텐데. 익숙한 무력감이 느껴졌다.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나에게는 과업이 있었다. 눈을 가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짓 말이다.

발을 옮길 때마다 배낭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다양한 마물이 서식하는 글로윈 숲 탐색에 철저히 대비한 결과였다. 밴시 퇴치용 귀마개나 픽시의 환각에 빠져 길을 헤매지 않도록 돕는 마법 나침반은 어깨를 짓누르는 한편 마음을 가볍게 했다.

호박등 토피도 왕창 담았다. 맛도 있고 배도 차고 횃불도 대신해 주는 최고의 간식이었다. 나는 쉼 없이 우물거리며 쉼 없이 걸었다. 이번에 나의 목표는 숲의 상당히 깊은 곳에 위치한 환상 열석이었으므로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성실한 모습으로 좋은 인상을 남기고자 했던 시절이 있었다. 수수하지만 깔끔한 차림새, 은촉에 새하얀 깃털이 달린 펜, 정갈한 글씨체로 빼곡하게 채운 공책이 남자애를 꾀는 비결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남친 사귀려고 눈이 돌아서 저질렀던 개짓거리 중에서 가장 효과가 처참했던 개짓거리였다.

수확이 아예 없었냐고 하면 아니었다.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안 그만큼 수업에 집중했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다른 과목보다 흑마법과 주술, 전술학, 특히 마물학에 비교적 식견이 있는 이유가 되었다.

아쉽게도 나는 마물학자가 아니라 상단주를 꿈꾸는 학생이었다. 그것도 놀고먹는 상단주를.

대개 놀고먹을 심산으로 적당히 사는 삶에는 마물과 관련된 잡다한 지식 따위를 써먹을 기회는 찾아오지 않기 마련이었다. 자칭 마물학 척척박사로서 나의 권위는 농담의 달 연회에서 마물 분장을 할 때나 잠시 빛나곤 했다.

물론 지금까지 그래 왔다는 거다.

카일과 싸우기, 아니 안 싸우기 전에, 스프리건에 얽힌 추억을 나누면서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었다.

나는 검은 바다 같은 한밤의 글로윈 숲에서 검은 용을 찾아내야 하는 처지였다. 무턱대고 뒤지고 다니는 건 무식할뿐더러 재미도 없었다. 눈꺼풀에 바르면 잠시간 독수리처럼 멀리 보게 되는 스프리건의 고약은 기발하고 재미있으며 동시에 전지전능한 블로썸을 능가할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특례 입학생인 블로썸의 마물학 교수는 언제나 이상 성욕을 지닌 모나한 교수였다. 그래서 그녀는 나처럼 다양하게 배우지 못했다. 스프리건의 고약이 지닌 효과 같은 거는 알 수 없으리라는 자신이 있었다.

마법 나침반 덕분인지 제법 수월하게 환상 열석에 도착했다. 나는 둥글게 배치된 거석 가운데에 돌멩이를 던졌다. 이윽고 그보다 몇 배는 커다란 수정 원석들이 내 머리통을 노리고 날아왔다. 잽싸게 피하고 나니 세 마리의 쭈글쭈글한 스프리건이 나타났다.

“인간 계집애잖아!”

“못생긴 계집애!”

“저리 꺼져!”

세 마리가 동시에 떠드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귀를 틀어막고 인상을 찌푸렸더니 그것들 중 코가 빨간 스프리건이 엄숙하게 말했다.

“감히 위대한 스프리건의 지붕에 돌팔매질을 한 계집애야. 정중히 사과하면 무례는 없던 것으로 해 주마.”

“아니.”

나는 코웃음을 치며 잠옷 위로 덮인 망토의 매듭을 풀었다.

“나야말로 고약을 나누어 주면 너희의 무례를 없던 것으로 해 줄게.”

망토의 천을 뒤집어 목에 걸자 스프리건들은 비명을 질러 댔다. 마물학 척척박사의 얕고 넓은 지식에 따르면 뒤집힌 웃옷은 스프리건에게 금기였다. 망토 겉감에 새겨진 피츠시몬스 문양이 내 등과 맞닿아 있는 한 어떤 스프리건도 나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었다.

내가 돌멩이를 십수 개쯤 환상 열석에 던지는 동안 스프리건들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 통한의 눈물이 주름과 주름 사이에 고였다. 그들의 지붕에 흠집이 나는 것을 참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구 빌라드처럼 고집이 어찌나 센지, 나는 흙바닥을 파내어 적당한 돌멩이를 찾는 짓거리에 질릴 쯤이 되어서야 스프리건에게서 백기를 받아 낼 수 있었다.

“끔찍한 인간 계집애!”

노란 모자를 쓴 스프리건이 울부짖었다.

“너를 영영 저주하마!”

그것의 꼬부라진 손가락은 납작한 유리병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유리병을 가로챈 뒤에 배낭을 뒤져 월시의 속옷에 집어넣으려고 했던 불개미 봉투를 꺼냈다.

“선량한 소녀야! 부디 위대한 스프리건에게 다오!”

불개미는 스프리건이 환장하는 먹거리였다. 초록 피부의 스프리건이 아우성쳤다. 나는 모든 스프리건들이 나를 저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불개미를 넘겨주겠노라고 호언했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던 스프리건 세 마리의 기분은 고작 손톱만한 곤충 삼십 마리에 하늘로 치솟았다. 그것들이 얼마나 행복해졌냐면, 목적한 바를 이루고 떠나는 착한 데다가 현명하기까지 한 인간 소녀를 춤을 추며 배웅 나갈 정도였다.

‘저기.’ 죽은 나뭇가지보다 앙상한 사지를 잘도 흔드는 스프리건 무용단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래서 갈림길 어귀에 곤란한 선택을 대신 해 주는 마도구를 세우다 말고 이렇게 말했다.

“혹시 카일 빌라드라는 애 납치한 적 있어?”

“누구? 칼?”

“키라?”

“케인?”

“아니, 카일. 폴카의 ‘카’, 일랑 풀의 ‘일’. 카-일.”

빨간 코의 스프리건과 노란 모자를 쓴 스프리건, 초록 피부의 스프리건이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이야 당연히 알았다만 눈으로 확인하니 사뭇 뿌듯한 감정이 차올랐다. 내일은 좀 그렇고, 조만간 화해하면 꼭 말해 줘야지. 안 싸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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