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99화 (99/178)

우리는 어깨랑 팔뚝을 계속 부딪히면서 걸었다. 농담이 반이고 뒷담이 반의 반이고 신변잡기가 나머지인 수다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당장 몇 시간 전에도 봤는데 도대체 할 말이 왜 이리 많은 건지 의문스러웠다.

살아온 환경과, 친분과, 취미와, 이제는 세계의 비밀까지 공유하고 있는 까닭일까. 그렇다 치기엔 뭐 대단한 화제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맨날천날 똑같은 이야기나 하는데.

“1학년 때 기억나? 글로윈 숲에서 길 잃었었잖아, 너랑 나.”

“야, 그거 네가 체인질링이라고 뻥 쳐서 그런 거잖아!”

“뻥 아냐! 얼마나 진지했는데!”

그래도 맨날천날 재미있는 이유는 또 뭘까. 하도 우려서 국물도 안 나올 거 같은 해묵은 모험담을 꺼내드는 카일의 표정이 밝았다. 아마 나도 똑같을 거였다.

지금은 은퇴한, 마물학 담당 듀간 교수는 마탑 출신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책에서 읽었거나 책으로 펴낸 지식을 자랑하기를 즐겼다.

문제는 듀간 교수의 전공이 마물의 생태가 아니라 마물 관련 신화와 민담, 그리고 전설들이었다는 거다. 덕분에 그의 수업은 방심하면 산으로 가기 일쑤였다. 당시 마물학을 듣던 학생들이 드라이어드의 습성보다 드라이어드가 부린 꿀벌에 눈을 찔린 뒤 초감각을 지각한 영웅에 훨씬 해박할 정도였으니 어지간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장난용 거미쥐 모형과 진짜 거미쥐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어리숙하던 1학년 아리엘 달튼은 지극히 충격적인 진실을 접하게 되었다. 빨간 머리에, 몸이 약한 데다가 잘 우는 아이는 체인질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체인질링은 비쩍 마른 드워프 노인처럼 생긴 마물, 스프리건이 납치한 인간의 아이 대신 두고 가는 요정이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할 쯤엔 이미 건강하다 못해 건장한 상태였으나, 잘 울고 몸이 약한 빨간 머리였던 카일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일도 마찬가지였다. 나보다 키가 커진 뒤로는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던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비장한 척 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리, 나 스프리건에게로 돌아가야 할 거 같아. 네 진짜 소꿉친구를 돌려 줄게.”

글로윈 숲의 아주 깊은 곳에는 환상 열석이 있었다. 환상 열석을 스프리건이 지키고 있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었고. 더구나 이디스와 마베릭이 환상 열석으로 소풍을 다녀온 썰을 하도 상세하게 풀어서, 카일도 나도 거기까지 가는 길을 적당히 알고 있었다.

적당히 아는 건 모르느니만 못했다. 카일은 스프리건을 만나겠다는 일념하에 맨몸으로 밤의 글로윈 숲에 발을 들였다. 나는 스프리건을 만나려는 카일을 뜯어 말리러 정신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우리는 당연하게도 위험에 처했다.

“스프리건을 만나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나를 데려가는 대신 진짜 ‘카일 다미앙 빌라드’를 내놓으라고 했겠지.”

“완전 넝쿨째 굴러들어 온 호박이네. 스프리건이 엄청 좋아했겠다.”

“걔들은 인간을 납치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까.”

스프리건이 아니라 화난 험프리스 교수를 만나서 어찌나 다행이었던지. 내가 키득거리자 카일은 살짝 민망해진 듯이 콧등을 긁었다.

“되게 감동이었는데, 그때.”

그가 대뜸 말했다.

“뭐가?”

“네가 그랬잖아. 체인질링이든 아니든 상관없다고, 내 소꿉친구는 너라고.”

이제 나도 콧등이 간지러워졌다. 와, 아리엘, 너 그만치 창피한 말도 할 수 있었단 말이야? 역시 갖은 로맨스 소설을 섭렵하던 사춘기 여자애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그에 비해 감성이라고는 망친 시험지에 교수를 향한 편지를 구구절절 써 내릴 때나 챙기는 열아홉 여자애는 어떻단 말인가.

적어도 여덟 번 이상 수확의 달 연회를 경험했음에도 나는 성장하기는커녕 퇴보했다. 당장 나를 도우려고 어금니까지 뽑아 낸 카일에게도 감사는 무슨 입만 열면 놀리기나 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아리엘 달튼의 오십 가지 그림자 중 용감한 그림자와 낭만적인 그림자, 뻔뻔스러운 그림자를 있는 힘껏 쥐어짜 가까스로 운을 떼었다.

“언젠가 정말로 스프리건을 만나고, 그게 너한테 ‘아들아!’라고 하면서 다른 빨간 머리 남자애를 들이밀어도, 나한테는 너뿐일 거야.”

그러고 나서는 정적이 길었다.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면서 밀려드는 부끄러움을 견디다 말고, 나는 별안간 내 손날을 아까부터 계속 스치는 중이던 카일의 새끼손가락에 집중했다. 팔을 흔드는 동작이 꽤나 뻣뻣해서, 그가 나 이상으로 그것을 의식하고 있음을 알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엄청나게 묘한 기분이. 나는 카일과 멀리 떨어진 손으로 목덜미를 꾹 누르다가 가슴을 두드렸다. 심장이 너무 간지러워서 웩 뱉어낸 다음에 벅벅 긁고만 싶었다.

그건 일반적으로 친구에게 느끼는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느끼지 못할 기분도 아니었다.

더구나 카일과 나는 그냥 친구가 아니라 둘도 없는 소꿉친구였던 것이다. 부모님 다음으로 소중한 사람 혹은 체인질링이 얘인데 벅차는 게 뭐 대수인가.

들숨을 쉬면서 한 번, 귀뚜라미가 길게 울 때에 한 번, 날숨을 쉬면서 한 번, 수풀에서 개구리가 튀어오를 때에 다시 한번. 총 네 번을 일부러 닿은 끝에, 두 개의 손이 완전히 겹쳐졌다. 우리는 1학년 때처럼 손깍지를 끼고 이미 걸은 산책로를 다시 걸었다.

“좋아해.”

산책로의 중간쯤에서 카일이 문득 내뱉었다. 툭 치면 예쁜 말이 나오는 인형이라도 된 마냥 반사적인 고백이었다. ‘알아.’ 나는 짐짓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마주 댄 손바닥에서 불이 솟는 거 같았다.

“사랑해, 아리엘. 너 아니었으면 나는 진작에 미쳤을 거야. 정말이야.”

“아, 안다고.”

“그러니까 제발 다치지 마. 모슬리 때 내가 얼마나 기겁했는지 알아?”

“모슬리? 브리아나?”

“프라스웰 호수에서 말이야. 모슬리가 떨어뜨린 거 아냐? 월시처럼, 시스템에 씌어서?”

뜻밖의 헛소리에 턱이 벌어졌다. 내가 왜 물에 빠졌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았나?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했다’는 게 그거 아니었어? 내가 어디까지 무모하게 굴 수 있는지를 알아서? 부모님보다 나를 오래 봐 온, 소꿉친구니까?

내가 펄쩍 뛰자 카일도 놀란 듯했다. 내 반응이 그의 예상 범주 내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윽고, 도대체 어떤 사고를 거친 결과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카일의 낯빛이 티 나게 어두워졌다. 목소리는 음산하게 내리깔렸다.

“그럼 진짜로 자살이라도 하려고 했다는 거야? 또?”

“‘또’? 내가 전에도 자살하려고 한 적이 있어?”

뒷골을 띵하게 울리는 단어 사용에 경악한 내가 득달같이 파고들자, 카일은 불리해지면 나오는 못된 버릇을 다시금 선보였다. 조개처럼 입술을 딱 붙이고 침묵하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그러니까 같은 목표를 두고 발을 맞추는 와중에도 나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뭐든 숨기려고 드는 카일의 태도가 만족스러웠던 적은 단언컨대 없었다. 울화통이 터졌다.

그가 나를 오래 본 만큼 나도 카일을 오래 봤다. 만일 나를 정말로 신뢰할 만한 동료로 여기고 있다면, 그랬다면 이렇게 답답하게 굴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 미쳐 돌아가는 세계에 대해서도, 카일과 블로썸과 켈란에 대해서도, 하다못해 나 자신에 대해서도 알려고 들수록 의문만 더욱 커지는 근래의 경험들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길 바랐지만, 눈을 가린 채로는 싫었다. 그걸 전달하고 싶었는데, 소리를 지르며 마구 화를 내는 와중에는 확실히 쉽지가 않았다.

지독한 고집쟁이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고 나는 과하게 흥분한 나머지 지쳐 버렸다. 한참 난리를 친 뒤에도 다정스레 손을 잡고 다니기란 어불성설이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카일과 나는 1피트보다 멀리 떨어져서 걸었다.

***

수확의 달 연회 마지막 날에는 어김없이 시상식이 열렸다. 강당에 모인 색색의 머리통 사이에서 빨간 머리통은 유독 눈에 띄었다. 티가 나게 딴 데로 가려니까 가뭄에 콩 나게 날카로운 브리아나 모슬리가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너네 싸웠어?”

“싸우긴 뭘 싸워. 아나이스 저기 있잖아.”

카일의 곁에 엘리자베스와 브레넌이 있었고, 거리를 두고 켈리 라미레즈가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눈인사를 건넨 뒤에 가장 멀리에 앉은 아나이스에게 갔다. 그러자 포크너가 나와 브리를 보고 쉿쉿 소리를 내며 손짓했는데, 꺼지라는 뜻인 거 같았다.

나는 월시에게 베인 상처가 너무너무 아프다고 끙끙대면서 일부러 아나이스와 포크너 사이로 넘어졌다. 나와 팔짱을 끼고 있던 브리아나도 그렇게 했고, 곧 켈리가 함께했다(우리와 달리 그럴싸한 명분이 없었던 켈리는 건달처럼 ‘아이고, 실례합니다’라면서 끼어들었다.). 가엾은 포크너는 순식간에 그녀의 아가씨와 세 사람만큼 멀어지게 되었다.

“재키를 놀리지 말아 줘.”

요사이 아나이스가 나를 볼 때마다 하는 당부였다. 나는 조금의 신뢰감도 전달되지 않을 만큼 대충 끄덕였다.

“끊어졌네?”

켈리가 팔꿈치로 나를 쿡 찔렀다. 주어 없는 문장이었으나 여간 거들먹거리는 태도가 아니어서 금방 뭔 뜻인지 알아챘다. 허접스레 묶인 팔찌를 켈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잽싸게 치웠다.

“가지고 놀다가 끊어 먹은 거야.”

아침에, 켈리에게 받았던 ‘건강을 기원하는 팔찌’를 이불 속에서 발견했다. 아주 놀랍게도 뚝 끊어진 채였는데, 하필 월시에게 당한 뒤라서 영 찝찝했다. 마치 진짜로 무슨 주술적인 힘이 팔찌에 깃들어서, 자칫 심각할 뻔했던 부상을 막아 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알바라도 교수가 사기꾼이 아닐 가능성을 요만큼도 고려하기 싫었다. 허겁지겁 변명하자 켈리는 다 안다는 듯이 히죽거렸다. 지나치게 얄미운 미소였으므로, 만일 천지가 개벽하여 알바라도 교수가 불세출의 예언자로 거듭나고 내가 그녀를 신봉하게 되더라도 켈리에게만은 죽는 날까지 숨기리라는 결심을 했다.

시답잖은 수다를 떠는 사이 시상식의 막이 올랐다. 거시기가 그려지지 않은 깃발들을 용케 모아 천장을 장식한 학생회의 노고가 대단했다.

나서길 좋아하는 마담 바틀렛은 어쩐 일로 진행을 험프리스 교수에게 맡기고 행사에 불참했다. 듣기로는 월시 건으로 인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 다니는 중이라고 그랬다.

이제 와서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애덤 월시는 죽지 않았다. 잘 구워지기는 했다. 발가락 털까지 타 버렸다니 아마 당분간 걔의 반질반질한 상판대기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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