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게 있으면 말을 했어야지.”
“하하,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최대한 새침을 떼며 말하려고 했으나, 스스로 듣기에도 내 말투엔 숨길 수 없는 설렘이 있었다. 또한 리본에 달린 방울 장식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는 순간마다 요란한 소리가 났던 것이다.
나는 딸랑 한 번에 웃음을 한 번 참는 켈란을 곁눈질하고 엘리자베스 맥카시를 저주하며 음식점을 나섰다. 살을 반투명한 파란색으로 만드는 연고를 약간 얻는 것 또한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도 악마를 숭배하는 수도사나 괴물 해적 분장을 할 거야?”
나는 농담의 달 연회에 참여하는 켈란 일레스티아를 적어도 여덟 번 봤는데, 그의 분장은 창의성도 성의도 없어서 항상 거기서 거기였다. 반투명해진 손으로 한쪽 눈을 가리며 묻자 켈란은 허를 찔렸다는 듯이 기숙사로 돌아가면 커틀러스랑 안대부터 버려야겠다고 했다.
한참 깔깔거린 뒤에 그에게 스티아의 사도 중 ‘아르네’의 분장을 제안했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독수리인 아르네는, 오늘날 마물로 전락한 하피의 시조이자 아름다운 음성으로 야만인을 꾀어 스티아 신전을 짓도록 한 설화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진 존재였다. 듣는 이로 하여금 음심을 불러일으키는 켈란의 목소리가 분장에 개연성을 부여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우리는 날개 모형의 어느 부분에 비행 마법을 걸어야 자연스럽게 퍼덕이며 날 수 있을지를 논의하면서 윌리엄 그리피스 박물관까지 갔다. 아기 그렘린 마니 탈을 쓰고 전시품의 역사를 설명하는 직원을 보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너도 장난감을 좋아했어?”
“끈적이 투석기 판매가 중지되고 나서 가장 크게 항의했던 게 나일걸.”
“말도 안 돼! 일레스티아의 황태자가 항의하는데도 안 먹혔단 말이야?”
“애초에 판매를 중지시킨 사람이 일레스티아의 황제였으니까. 어머니가 아끼던 정부의 머리카락을 내가 끈적이투성이로 만들어 버렸거든.”
켈란이 머쓱해진 듯이 발끝으로 다른 발의 뒤를 톡톡 쳤다. 덩달아 어색해져서 대충 대꾸했다.
“그건, 음, 나빴네.”
“나빴지, 깁스 백작에게는. 어머니가 장발이 아닌 그에게 전혀 흥미가 없었거든. 월시 후작에게는 기회였겠지만.”
그럼 이제 그건 나에게도 나쁜 짓이 되었다. 월시는 가끔 케이틀린 대제가 그의 아버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자랑하기 위해 묻지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두 사람의 침대 사정을 떠벌리곤 했다.
순진했던 당시의 내가 듣기로 그건 테러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앙심을 품고 전시된 호두까기 인형의 태엽을 슬쩍 감았다. 기다란 모자를 쓴 병정이 켈란의 팔뚝을 콱 물었다.
“적어도 이게 왜 안 팔렸는지는 알겠다.”
잠깐의 소란이 있은 후에 그가 팔뚝의 부어오른 부분에 신성력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나는 뻔뻔스레 ‘그러게’ 하고 대꾸했다.
놀랍게도, 나는 상당수의 전시품과 구면이었다(한편으로는 놀랍지 않기도 했다. 장난감에 대한 나의 열정은 관 뚜껑을 덮는 역할마저 그의 자식이 아니라 ‘미스터 그리피스의 만능 마법 집게팔’에게 맡긴 윌리엄 그리피스에 감히 비견할 만했기 때문이다.). 내가 전시품에 얽힌 꼬마 아리의 추억을 재잘거리는 동안 켈란은 웃거나 감탄하면서 경청했다.
목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날 쯤에 우리가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소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매우 민망해져서 입가심용 후식을 사다 바침으로서 켈란에게 사과의 뜻을 전달했다.
“너무 혼자 떠들었지.”
“응. 근데 재밌었어. 내가 모르는 네 모습을 아는 거 말이야. 친해지는 과정이잖아.”
곧 죽어도 바른 말만 하는 켈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고 가져온 아이스크림을 건네었다. ‘미스터 그리피스의 신비한 아이스크림 제조기’로 뽑아 낸 켈란의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내 초코 아이스크림은 손잡이 역할을 하는 와플 콘 위에서 민달팽이마냥 꿈틀거리는 중이었다. 그것을 크게 베어 문 켈란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목으로 넘어간 다음에도 움직이는 건 너무하지 않아?”
“덕분에 많이들 죽을 뻔했대. 왜, 애들은 목구멍이 좁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았다. 진한 초코 맛이… 나지 않았다. 내 손에 들린 건 바닐라 아이스크림이었다. 완전히 동일하게 생긴 탓에 착각한 모양이었다.
“켈란, 왜 말 안 했어?”
“뭘?”
“바뀌었잖아, 아이스크림.”
혹시나 해서 그의 아이스크림을 조금 먹어 보았다. 틀림없는 초코 맛이었다. 당연한 의문을 표했더니 켈란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오묘해졌다. 아예 몰랐던 눈치였다.
‘아리.’ 그가 한숨처럼 나를 불렀다. 찰나의 정적 끝에 말이 이어졌다.
“맛을 잘 못 느껴, 나.”
짐짓 별거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내가 듣기엔 별거였다. 살면서 접하는 즐거움을 나열한 목록에서 식도락은 내 기준에 꽤나 꼭대기에 있었다. 어쩌면 그가 삶을 지루하게 느끼는 이유 중 하나가 그거일 지도 몰랐다.
“왜?”
사뭇 심각하게 물었다. 그러자 켈란은 간결하게 대답하고 나서 남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에 해치웠다.
“독. 너무 어렸을 때여서.”
내 혀에는 아직도 초코 아이스크림의 단맛이 남아 있었다. 반면 켈란의 혀에는 흐물거리는 식감만 남았으리라. 그걸 생각하니까 나도 모르게 슬픈 기분이 들었다.
아니, 슬픈 건 그가 단맛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아직도 어린 축에 속하는 켈란이 ‘너무 어렸다’고 표현할 만큼 조그마할 때 독을 먹었어야 하는 까닭을 찾아낼 수 없어서였다. 있는 대로 인상을 썼더니 켈란은 언제나와 같이 그린 듯한 미소를 띠었다.
곧 완벽하게 다듬어진 손가락이 내 볼에 닿았다. ‘이상하지.’ 광대뼈쯤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던 잔머리가 섬세한 손길을 따라 귀 뒤로 넘어갔다.
“나는 누가 나를 동정하는 게 끔찍하게 싫거든. 근데 방금은 좋았어. 이것도 친해지는 과정일까?”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켈란이 물었다. 나는 귓바퀴를 기어오르는 이상한 감각에 멍하니 있기나 했다.
그러자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기회라는 듯 꾸물꾸물 움직여 와플 콘을 탈출했다. 이내 반투명한 손바닥과 손목에 달짝지근한 궤적을 남기고 구두 앞코로 떨어져서는 장렬하게 전사했다.
***
웬일로 타이밍이 딱 맞아서, 다른 사람 앞에서 꼴사납게 자빠질 필요 없이 자고 일어나니 로즈마리 블로썸의 세계로 돌아가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면, 이불에 덮인 내 복부가 붕대로 둘둘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 허리에 힘을 주자 찌릿하게 아팠다.
멀리 창밖으로 달이 뜬 게 보였다. 활발하게 오르내리는 마나와 거기 실린 먼지들도 말이다. 시선을 조금만 옮기면 농담의 달 연회 일을 가리키는 시계가 있었다. 그게 고장 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월시와의 시합 이후 대충 반나절 가량이 흘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건너편 침대에서 브리아나 모슬리가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병실이 아니라 기숙사로 옮겨진 걸 보니 상처가 제법 얕은 모양이었다. 혹은 얕아졌거나.
검술 대회에서 유혈 사태가 생기는 경우가 빈번하지는 않았으나 드물지도 않았으므로, 내 부상 자체는 별거 아닌 사건으로 분류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문제는 월시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월시는 엄청나게 거대한 폭발에 휘말려 날아가고 있었다.
걔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걔를 살리거나 죽인 에드가 라모스가 어떻게 됐는지는 궁금했다. 에드가는 계승권은 없어도 왕자였고, 월시는 황제의 정부라도 한낱 후작의 아들이었으나, 근래 나돈이 유브리아프스 지방의 독립권을 두고 일레스티아의 눈치를 보는 중인 까닭이었다.
부디 케이틀린 대제가 애들끼리 벌이는 푸닥거리에까지 신경 쓰지 못할 만큼 바쁘기만을 빌며 창가로 갔다.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었다. 브리는 1학기에 바람 때문에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으므로 창문은 살짝만 열었다.
조경수 꼭대기에 꼬리 긴 새 두 마리가 둥지를 틀고 부리를 비비는 것을 구경하다가 낯익은 인물과 눈이 마주쳤다. 숄처럼 두른 담요 사이로 팔을 뻗어 흔들었다. 실은 소리 높여 이름을 부르고 싶었는데, 그랬다가는 브리가 깰 거 같아 말았다.
둔한 몸뚱이를 이끄느라고 평소보다 오래 계단을 밟았다. 상처가 터질까 봐 평소처럼 마지막 서너 칸을 뛰어내리지도 못했다. 그래서 내가 기숙사 건물을 빠져나왔을 때 카일은 바로 앞에 있었다. 그가 번화가에서 풍선으로 장미를 만들어 파는 광대처럼 과장스럽게 인사했다.
“에이, 이번엔 안 우네.”
“내가 뭐 매번 우냐.”
매번 우는 소꿉친구가 말했다. 나는 코로 웃으며 앞서서 갔다. 조경수에 걸린 ‘피츠시몬스’ 깃발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거시기가 그려져 있었다.
그건 시간이 돌아가든 말든, 내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든 말든 변하지 않는 몇몇 중 하나였다. 평화로울 정도의 안정성이 느껴졌다. 거시기를 보면서 평화를 찾는다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하여튼 그랬다.
“검술 대회는 어떻게 됐어?”
“끝났지 뭐. 브래들리가 우승했더라. 압도적이던데.”
“우와!”
검집에 장식 끈을 많이 달수록 강해진다는 미신 아닌 미신을 켄드라 브래들리에게 전파시킨 보람이 있었다. 켄드라는 로즈마리 블로썸이나 아나이스 오브라이언과는 다른 방향으로 여자애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으므로, 내 시합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검집은 온통 장식 끈으로 빽빽했다.
“걔한테 한턱내라고 해야겠다.”
“네가 왜?”
카일이 기가 차다는 듯 말하기에 대답 대신 되게 으쓱대기나 했다. 들썩이는 담요 아래로 붕대가 두껍게 덮인 것을 보았는지, 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나는 뭐라 말하려고 달싹거리는 카일의 주둥이를 양손을 겹쳐 틀어막았다. 카일은 근래 키가 많이 자랐으므로 그러기 위해서는 발끝을 세워야 했다.
“또 미안하다거나 후회한다거나 그따위 소리 지껄일 거면 가만히 있어.”
“하지만….”
그가 내 손바닥 밑에서 우물거렸다. 나는 소꿉친구의 얄미운 입술을 콱 잡았다가 놓으며 권위적으로 말했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야. 토 달지 마.”
나돈의 쌍둥이와 달리 나는 보라색 피도 아니었고, 살면서 권력을 가진 순간이 전무했기 때문에 멋있는 말투와 지독히도 안 어울렸다. 카일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건조하게 웃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걱정해 줘도 난리야.”
그가 말했다. 부쩍 가까워지는 중이라지만 아직은 낯선 서브 캐릭터가 아닌, 평생토록 서로 알았던 악우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