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피니건 거리는 온갖 괴상한 의상과 액세서리로 가득했다. 나는 뾰족한 모자를 쓰고 가짜 코를 붙여 고전적인 마녀 분장을 한 사람을 셋쯤 봤다. 그리고 스켈레톤을 두 사람, 늑대인간을 세 사람, 흡혈귀를 일곱 사람쯤 봤다. 그리하여 어떤 질문을 던질 완벽한 시기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다음 주부터 연회 기간이야?”
‘아리엘 달튼’이 피츠시몬스를 다니는 이유는 오로지 졸업과 농담의 달 연회였다. 내가 얼만큼 농담의 달 연회에 진심이냐면 내 방에 연회 일까지 남은 시간을 세는 시계도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그건 어지간해서 내가 가질 법한 의문이 아니었다. 어지간해서는.
눈치 빠른 켈란 일레스티아는 금방 내 태도에서 위화감을 잡아냈다. 그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그럼.”
잠깐의 침묵 후에 켈란이 입을 열었다.
“얼마나 기다렸는데.”
사뭇 다정하게 굴어서 속이 다 간지러웠다. 최근에 내가 만난 켈란은 블로썸의 남친이었으므로, 나는 그에게서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끼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노력이 결실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잘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내 곁에 나란히 선 켈란은 ‘아리엘 달튼’의 남친이었다. 계약서로 묶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켈란과 어깨를 부딪치며 걷는 내게 폭설처럼 쏟아지는 눈길들이 부담감과 중압감, 그리고 일말의 우월감을 동시에 선사했다.
“내가 검술 대회에서 월시를 쥐어팰 때도 이만큼 주목을 받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월시 후작의 아들? 거기도 다사다난한가 보네.”
“네 덕이야.”
나는 한 손을 마티의 엉덩이 같은 볼따구니에서 떼고 주먹을 쥐어서는 켈란을 향해 뻗었다. 그가 장난스레 주먹을 맞부딪쳐 호응했다. 그러고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내가 기쁜 듯하니 그도 기쁘다고 했다. 나는 켈란이 그렇게 말해 줘서 더욱 기뻐졌다.
이윽고 우리는 무수한 시선을 꽁무니에 달고 반투명한 푸른색으로 보이는 남자의 안내를 받아 음식점으로 들어섰다. 남자의 배에는 큼지막한 도끼가 꽂혀 있었는데, 접시를 거기 얹어서 내오는 게 상당히 재밌었다.
블로썸의 세계로 돌아가기 전에 점원으로 하여금 끝내주는 유령 분장을 가능하도록 만든 마법의 정체를 반드시 알아내겠노라고 결심했다. 일단 이 미친 듯이 좋은 냄새가 나는 양송이 수프부터 해치운 뒤에 말이다.
내가 수프에 띄운 빵조각을 바삭바삭할 때 먹기 위해서 분투하는 동안 켈란은 스푼조차 들지 않았다. 이마에 햇볕이 닿는 듯해서 고개를 들었더니 눈이 바로 마주쳤다.
“왜? 이거 눅눅해지면 맛 없어.”
“너 진짜로 ‘아리’야?”
“속고만 사셨나.”
“믿기질 않아서. 왜냐면… 너무 늦었잖아.”
놀랍게도, 켈란의 말투에는 투정이 다소 묻어 있었다. 나는 그의 미간에 잡힌 주름을 물끄러미 보다가 까끌거리는 빵조각을 음료와 함께 넘겼다. ‘기다렸다’는 말은 어쩌면 진심이었나 보았다.
나는 농담의 달 연회를 1년 내내 기다렸다. 켈란에게 있어 나도 그런 존재인 걸까.
쬐끔 들떴다가, 스스로 참 이기적이다 싶어졌다. 나는 침대에 누워 고개만 들면 연회일이 얼만큼 가까워졌는지 확인할 수 있었지만 켈란은 그러지 못했다. 가망 없는 기다림엔 설렘도 뭣도 없었다. 빈민가의 아이들이 자기 생일을 모르듯이.
“미안.”
“미안할 건 없지. 네가 있던 곳은 여기가 아닌데. 다만 나는….”
켈란이 드디어 스푼을 집어 수프를 대강 저었다. 그의 빵조각들은 이미 엉덩이가 젖어 무거워지는 중이었으므로, 그가 만든 소용돌이에 휩싸이자 즉시 처참히 가라앉았다.
“네 말대로, 내 역할은 플로라의 연인인 모양이야. 나는 네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아리엘’과 계약 연애를 시작했는데, 그 뒤로 여러 기현상이 벌어졌어.”
연애 계약서에 서명한 것이 나였으므로 익히 아는 이야기였다. 끄덕이며 쥐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음료에 섞인 탄산이 약한 소음을 냈다.
“이 세계, 그러니까 ‘시스템’은 어떻게든 나를 바로잡기 위해 애썼지… 주변인의 입을 빌려 경고하거나, 직접적으로 내 손과 발을 묶거나, 가끔은 위해를 가하기도 했어.”
“…….”
“가장 역겨운 건 시도 때도 없이, 비이성적으로, 부자연스럽게 솟구치는, 가짜 감정의 덩어리였고.”
머리를 쓸어 넘기는 켈란의 동작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괴로운 것 같았다. 하기는 나였어도 내가 느끼지 않은 감정이 갑자기 밀고 들어와 머릿속과 가슴속을 강제로 메운다면 견디기 힘들 것이었다. 마치 그것만이 내게 허용된 전부라는 듯이.
“봐, 아리. 나는 신성 일레스티아의 후계자이면서 피츠시몬스의 학생회장이야. 거의 모든 것을 가졌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없지. 다 가짜니까. 제국도, 아카데미도, 내 감정마저.”
“하지만….”
“내게 있어 진짜는 너뿐이야…. 어떻게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어?”
켈란이 테이블에 떨궈 두었던 고개를 들자 얇게 저민 섬광 같은 속눈썹 아래 음울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가 나를 꿰뚫었다.
거기에 가득 찬 혼란과 좌절감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나도 경험한 적이 있었으니까. 다섯 번의 시간 여행 끝에 내가 살아온 삶이 고작 ‘설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때에 나에게는 카일이 있었다. 그는 내가 무너지지 않게끔 나를 지탱해 주었고, 내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었으며, 영영 없을 것처럼 보이던 미래가 나에게도 도래하리라는 희망을 주었다.
켈란에게도 버팀목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아리엘’이라든가. 나도 걔니까, 적어도 걔만은 그의 편이 되어 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걔의 성품은 믿음직스럽지 못할지언정 미남에 지독하게 약한 습성은 믿어도 되었다.
또 케이틀린 대제라는 선택지도 있었다. 그녀는 운명의 물레가 존재함을 알고 있었고, 비록 가짜여도, 마찬가지로 가짜인 세계에서 통용되는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쩌면 운명의 물레를 깨부수기 위해 나와 카일이 짜낸 계획보다 훨씬 그럴듯한 청사진이 있을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설프게 격려하던 중에 메인 요리가 나왔다. 바닷가재의 살을 발라 와인 소스에 야채를 넣고 버무린 다음 껍질에 채운 것이었다. 치즈가 딱 먹음직스럽게 녹아 침이 절로 고였다.
내가 두 마리의 바닷가재 중 보다 큰 것을 접시에 신나게 옮겨 담는 사이 켈란은 음식을 가져온 점원에게 금화를 왕창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 그리고 당신은 실존하지 않아.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창작물 속 등장인물이거든.”
“켈란!”
대륙 일부 국가의 정상들이나 알고 있다는 ‘이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떠드는 켈란에게 놀란 것도 잠시, 나는 갑자기 마구잡이로 몸을 흔들기 시작한 점원에게서 공포를 느끼고 어깨를 움츠렸다.
반투명한 푸른색의 팔과 다리, 허리와 엉덩이, 고개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진동하는 모습이 기묘했다. 설계가 기초부터 잘못된 마법 인형을 보는 듯했다. 혹은 줄이 심각하게 꼬여 버린 마리오네트거나.
아무튼 무서웠다. 갑자기 고장이 나 버린 남자도, 무심한 표정으로 바닷가재 요리를 먹는 켈란도. 프릴 달린 천갑옷으로 가려진 팔뚝에 소름이 일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쉬지 않고 이어지던 점원의 떨림이 어느 순간 멎었다. 그러고는 금화를 손아귀에 감싸 쥐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닌가. 황송하다는 듯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게 더 섬뜩해서 켈란을 쳐다봤다.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라고 해서 가만히 있었던 건 아냐. ‘아리엘’은,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진실에는 한계가 있더라. 일정 수준을 넘었을 때 비슷한 반응을 보였어. 그리고 어머니는….”
뒷말을 잇기 위해 켈란은 꽤나 오래도록 머뭇거렸다.
“네 세계에도 내가 있다고 했지.”
“그… 렇지?”
“그에게 전해 줘. 어머니를 믿지 말라고.”
“응?”
“이건 내 감인데, 어머니는 이대로 세계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 같아…. 플로라를 위해, 영원히, 9개월을 반복하는 것.”
그렇게 느낀 이유를 묻자 켈란은 치사하게 내 바닷가재가 그의 바닷가재보다 크다는 사실을 방금 깨달은 마냥 굴면서 말을 돌렸다. 나는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브로콜리로 바닷가재의 꼬리를 가리다가 그만 따져 물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
배를 채우고 나서 우리에게는 별다른 계획이 없어졌다. 켈란이 피니건 거리 근방에서 열리는 몇 개의 전시회 티켓을 내밀었으나 내가 그것들에 눈길도 주지 않았던 탓이다.
나는 태생적으로 전시회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거기에는 어느 정도 켈란의 책임이 있었다(부모님을 따라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내가 들렀던 전시회는 <아가사 팔머의 믿거나 말거나>가 유일했다. 거기서 인간과 마물의 혼혈아를 볼 수 있다고 해서였다.). 내 주장에 켈란은 생경한 정보를 접했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아리엘’은 전시회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뭐? 걔 미쳤나?”
조금 궁리하다가 말았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내가 빌려 쓰고 있는 몸의 주인은 엄연히 ‘아리엘’이었고, 나는 불청객에 불과했으니 그녀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 맞았다.
그래서 나는 테이블에 흐트러진 전시회 티켓들을 다시 넘겼다. <피츠시몬스 역사 박물관>, <대륙의 기하학적 장식미술>, 이름부터 지루했다. <데본 오라일리의 마법 생물 도감>, 그럭저럭 괜찮을 거 같았다. <윌리엄 그리피스 : 장난감들의 왕>은… 맙소사, 완전히 내 취향이었다!
상단을 보유한 가문의 구성원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전설의 상인이 바로 윌리엄 그리피스였다. 농담의 달 연회를 시계까지 사 두고 기다릴 만큼 장난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는 나의 외할머니 헬렌이 갓 걸음마를 떼던 시절에 주로 활동했는데, 달튼 부부처럼 줏대 없이 아무거나 팔아 제끼는 대다수의 상인과는 달리 장난감 하나만 주구장창 파고드는 상인으로 유명했다.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반 세기가 훌쩍 지났음에도 그가 여전히 ‘장난감들의 왕’이라 불리는 이유였다.
아직까지도 대륙에 유통되는 거의 모든 장난감은 그리피스 상단을 한 번쯤 거쳤다. 또한 그리피스 상단에서 투자하여 개발된 장난감 중에 재미없는 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가 자신하는 전시품들을 빨리 보고 싶어서 아주 몸이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