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간이 극장이 세워졌던 때의 여파가 남아 있어서, 돌바닥의 가장자리에 의상이나 무대 세트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관중석을 빙 둘러 대륙 내 국가들의 국기가 꽂힌 것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맞은편에서 인기척이 났다. 간단한 급소 보호구만 걸친 나와 달리 월시는 전신을 가죽 갑옷으로 감싸고 있었다.
무어 교수가 마법으로 갑옷을 벗겨 가니 그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쪽팔리는 거보다 아픈 게 싫은가 보았다.
어떡하냐, 이제 엄청나게 아플 건데. 절로 음흉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캔트렐이랑 다른 방향으로 비열해서, 싸움을 할 때면 상대가 누구든 최선을 다하거든. 그게 비록 검이라고는 레터 나이프만 쥐어 본 귀족 도련님이라도 말이야.
“오, 애덤. 내 충고를 엉덩이로 들었나 본데. 여자 기숙사 쪽으로 물 떠 놓고 빌라고 했잖아. 내가 너 안 죽이게 해 달라고.”
“닥쳐, 달튼. 도대체 무슨 수를 써서 켈란 전하를 홀린 거야?”
켈란이 내가 홀린다고 홀려지는 애면 참 좋을 텐데. 삽시간에 입이 써졌다.
“됐고, 검이나 뽑아.”
험악한 기세로 한 발짝 다가가자 월시는 어정쩡하게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2학기에 접어들자마자 월시에게는 새 여친이 생겼다. 익히 알고 있던 바이므로, 나는 이름 모를 백작가 영애에 대한 미안함을 느꼈다. 내가 월시를 제때에 죽였다면 그녀가 쓰레기를 수거할 일도 없는 탓이었다.
근래 명탐정 코넬리우스와 부쩍 친해진 브리아나-똑똑이-모슬리는 어떠한 감상으로 감정을 낭비하지 않았으며 다만 수상한 냄새를 맡았다. 그녀에 따르면 저울이 망가질 때까지 재는 게 일레스티아의 국민성이어서, 두 달 만에 여친을 갈아치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하여 브리는 금화로 평소와는 다른 충성을 사서 월시의 뒷조사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월시가 그녀와 교제한 기간은 브리아나와 교제한 기간과 완전히 겹쳤다. 뿐만 아니라, 나와 교제한 기간과도 겹쳤던 것이다!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월시는 우리를 두고 바람을 피운 적이 없었다. 이름 모를 백작가 영애를 두고 우리와 바람이 난 거지. 나는 이를 갈며 검집을 내던졌다.
무어 교수가 우렁차게 주문을 외자,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그의 검지 끄트머리에서 금색과 푸른색 빛이 엉키며 피어올랐다. 그것들은 모두의 눈에 들어올 만큼 높은 곳까지 쏘아져서는 숫자 모양으로 변했다.
금색 숫자가 월시의 점수, 푸른색 숫자가 나의 점수였다. 날이 무딘 시합용 검으로는 암만 베어도 상처가 나질 않으니, 심판인 무어 교수가 보기에 유효타를 먹였다고 판단되는 만큼 점수에 반영되는 식이었다.
“야, 뭐라고? 사령술? 너 시체가 서른두 음절짜리 단어 외우는 거 봤냐?”
“악! 교수님! 무어 교수님! 반칙! 반칙이에요!”
가슴 보호구가 애처롭게 걸린 월시의 튜닉은 볼턴이 자주 입는 것처럼 품이 컸다. 또 목 부분은 깊게 파인 데다 끈으로 여며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볼턴을 따라 치장한들 호박엔 줄을 그을 수가 없었다. 월시의 어깨는 너무 앙상하고 가팔라서 허수아비에 옷을 걸쳐 놓은 듯했다.
비슷하게 캔트렐이 얼마나 성심성의껏 가르쳤다 한들 찻잔보다 무거운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던 월시가 갑자기 검의 귀재가 되지는 않았다. 검을 잡는 자세는 봐줄 만했으나, 움직임에 잔뜩 들어간 겉멋 때문에 진짜 온 데가 빈틈이었던 것이다. 켄드라에게서 배운 대로 보호구가 가리지 못한 부분만 요리조리 찔러 대려니 월시는 가느다란 비명을 지르며 무어 교수 쪽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뭐? 매춘부? 내가, 씨, 진짜 뭘 해 보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도 않겠다! 이리 안 와?”
“으윽, 씨발! 미친 계집애 같으니라고!”
그가 붙잡고 있던 무어 교수가 부유 마법으로 빠져나가자 월시는 망연자실해져서 검을 마구 휘둘렀다. 나는 여유롭게 공격을 흘리며 그의 배를 집중적으로 베었다. 벤 데를 계속 베자 얇은 튜닉이 갈라진 자리를 뽀얀 살덩이가 메웠다. 평소에 그는 근육 보형물을 내의에 꿰매어 입었는데, 가죽 갑옷이 벗겨질 때에 보형물까지 벗겨진 모양이었다.
끝도 없이 올라가는 푸른색 숫자 너머로 캔트렐이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목이 터져라 내 이름을 부르짖는 아나이스도. 기분이 무지하게 고양되었다. 나는 월시가 시도하다가 실패한 멋진 동작으로 그의 검을 세게 쳤다.
가죽 손잡이에 발린 광택제 탓에 월시의 검은 손에서 금방 미끄러져 멀리까지 날아갔다. 손바닥에 전해져 오는 충격을 견뎌 내기 어려웠는지, 월시는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멋에 죽고 멋에 사는 애덤 월시다운 최후였다.
“그만!”
증폭 마법 없이도 무어 교수의 음성은 천둥 같았다. 나는 월시의 목을 얕게 찌르던 검을 미련 없이 거두고 돌아섰다. 이제는 정말 꿈에서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월시의 성격 상 이만한 창피면 나한테 더 깝죽거릴 것 같지도 않았다.
마침 근처를 뒹굴던 검집을 주워다가 검을 갈무리하고 나니 귀가 먹먹해지는 환호성이 들려왔다. 나는, 성취감과 막연한 해방감을 느꼈다. 비록 정정당당하게 일궈 낸 성과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켈란의 도움을 받아 내가 자신 있는 분야로 승부했으니까-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법이었고 지키다가 목숨 딱 내놓기 십상인 게 기사도였다.
점수를 계산할 것도 없었다. 무어 교수가 나의 승리를 선언하기 위해 다가왔다. 손목에 매었던 카일리의 손수건을 펼쳐 이마와 목에 맺힌 땀을 닦았다.
[치명적인 오류가 VMM+00002F20의 0028:C0003F20에서 발생하였습니다.]
다음 순간 등허리가 불이 놓인 것처럼 뜨거워졌다. 가까스로 뒤돌자 면막을 연극 세트에 고정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쇠꼬챙이를 말아 쥔 월시가 보였다. 아니, 월시의 탈을 쓴, 한때는 패닝턴과 언젠가는 주디스의 탈을 썼던, 시스템이.
나도 모르게 눈이 부릅떠졌다. 벌어진 상처로 피 대신에 용암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이윽고 엄청나게 큰 폭발이 일어났다. 위협적으로 솟구치는 불기둥에 월시의 몸뚱어리가 진짜 허수아비라도 된 마냥 튕겨나갔다. 관중석에서 돌림노래처럼 비명이 일었다.
이번에 소동을 일으킨 것은 명백히 월시가 아니었다. 검은 후드가 뒤집어지며 밀색 머리카락이 휘몰아치는 마나를 타고 사방으로 뻗쳤다. 아지랑이와 그을음 사이로는 그가 소환한 불꽃보다 훨씬 새빨간 안광이 일렁거렸다.
“뭐 하냐?”
어느새 훈련장에 난입한 남자의 말투는 사뭇 가벼웠다. 말하는 내용이 가볍지는 않았다.
“뭐 하냐고, 개새끼야!”
이미 정신을 잃고 늘어진 월시를 걷어차는 발길질이 험했다. 나는 에드가를 멈춰 세우고 싶었지만 고통이 너무 심했다. 무릎이 먼저 바닥에 닿은 다음에 몸이 무너졌다. 입술을 달싹였더니 말보다 숨이 많이 나왔다.
더러의 시도 끝에 마침내 에드가를 부르는 데 성공했다. 픽시의 재채기보다 작은 소리였으나 에드가는 용케도 내 목소리를 들었다. 그가 나를 봤다. 거기까지였다.
***
“하지 마, 에드가!”
“어, 아리엘? 내가 잘못 들었나? 누구라고?”
엘리자베스가 자그마한 방울 장식을 집어 들다 말고 경악했다. 가루분이 잔뜩 묻은 솔 같은 것을 쥐고 있던 브리아나는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쟤 방학 즈음부터 아주 오락가락하더라. 내 생각인데, 슬라임 푸딩에 환장하더니 그거 때문인 거 같아. 너도 알지? 슬라임에 마비 효과 있는 거. 너무 많이 먹는 바람에 뇌가 마비된 게 아닐까?”
“첫째, 슬라임 푸딩이 슬라임으로 만들어졌다는 건 악독한 카일 빌라드가 푸딩의 독점을 위해 퍼뜨린 낭설이야. 둘째, 나 지극히 정상이거든.”
“지극히 정상인 애가 갑자기 외간 남자 이름을 외치니? 남친과의 데이트를 앞두고?”
브리가 별 헛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이 내 코에다 대고 솔질을 했다. 성대하게 기침을 터뜨리자 어느새 리본에 매달린 방울이 청아한 소리를 냈다.
“야! 드러워! 침 튀었잖아!”
“갑자기 그러면 어떡해! 그리고, 뭐? 남친?”
“그래! 네 남친! 켈란 일레스티아! 데이트랍시고 나갈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네 꼬락서니를 수습하는 중인데, 은혜를 원수로 갚기야?”
황당한 기분에 돌아보자 리즈는 엉망이라고까지는 말한 적 없다고 발을 빼기나 했다. 나는 연회 때도 잘 쓰지 않는 화장품이나 장신구들로 한껏 치장된 모습을 거울에 어색하게 비춰 보며 언젠가 읽었던 연애 계약서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아리엘’과 켈란의 금전적 이해가 얽힌 낭만적 관계는 절찬리에 지속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또 여기구나. 그럴 줄 알긴 했어.”
“그럴 줄 알았던 건 네 끔찍한 가을-겨울용 외출복이고. 무슨 프릴 달린 천갑옷 같더라.”
“밀루아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말해 두는 건데, 북부 사람들이나 그렇게 입고 다녀.”
내 외출복은 멋지진 않았지만 멋지기만 한 외출복보다 백배는 따뜻했다. 브리아나의 악담에 발 빼기 전문가 엘리자베스 맥카시는 또다시 발을 뺐다. 나는 방울을 딸랑거리며 장갑을 벗어 등 뒤로 대충 던졌다.
“엘리자베스 맥카시,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그러나 나의 결투장을 받아든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입김 같은 목소리가 목덜미에 가볍게 불었다.
“어쩌지? 결투해야 하나?”
켈란이 장갑을 반듯하게 펴서 내 어깨에 얹었다. 문고리를 잡고 서 있던 엘리자베스가 나를 삿대질하며 비웃는 게 거울로 보였다.
브리아나는, 폭소하느라고 남의 볼에다가 잘 빻인 꽃잎을 향유에 개어 만든 연지를 왕창 발라 버렸다. 덕분에 못난이 아기 인형처럼 볼만 발그레해졌다. 식겁하여 손등으로 막 문대었더니 붉은기는 가시긴커녕 콧등까지 번졌다.
미리 예약을 잡아 놓은 가게가 있다고 해서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기숙사를 나섰다. 양 손바닥을 볼에다 대고 걷는 나에게 켈란은 원숭이 마티의 엉덩이 같으니 가릴 필요 없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었다.
“진짜 결투하고 싶어지기 전에 그쯤 하지.”
손이 자유롭지 않았으므로, 나는 가벼운 몸통 박치기로 불만을 표했다. 만약 귀엽다는 의미에서 든 비유였다면 저학년 문학 수업부터 다시 듣기를 추천한다.
“야, 내 옷이 그렇게 구려?”
이러니저러니 해도 프릴 달린 천갑옷이라는 표현은 충격적이었다. 조금 두껍고, 크고, 투박하긴 하지만 엄연히 갑옷이 아니라 외출복이었던 것이다.
색도 밝은 데다가 자수도 놓였는데. 완전 귀여운 파랑새 무늬가, 옷깃이랑 소매에. 부루퉁해져서 투덜거렸더니 켈란이 소리 내어 웃었다. 웃기만 했다. 어쨌다는 건지 모르겠다. 자기는 못생긴 스웨터나 입는 주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