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95화 (95/178)

95화

알바라도 교수는 케이틀린 대제 이상으로 희한한 공용어 억양을 지니고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모든 모음을 대충 ‘아’와 ‘오’와 ‘어’의 중간 정도로 발음하는 점을 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알바라도 교수의 입에서 나오는 ‘달튼’은 ‘돌턴’처럼 들렸다. 그건 그녀의 비음이 섞인 데다가 향처럼 서서히 퍼지는 목소리와 매우 잘 어울렸다.

“몰랐나요? 미스 돌턴은 바람의 기운이 강해요. 그대가 비행술에 뛰어난 것은 바람이 그대의 뚱뚱한 엉덩이를 받쳐 주기 때문이죠.”

“하지만 교수님, 저는 고소 공포증이 있는데요. 덕분에 비행술은 낙제였고요.”

그리고 내 엉덩이는 뚱뚱하지도 않았다. 불쾌하다는 듯 대꾸하자 알바라도 교수는 버드나무 가지마냥 나긋하게 웃었다.

“아하! 공포증만 극복한다면 누구보다 높이 날아오를 수 있게 될 거예요. 미스 돌턴에게 부족한 게 무엇인지 알 것 같네요. 바로 두려움을 먹는 인형이에요!”

“아니요, 제게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요. 아무것도 안 살 거라고요.”

나는 단호하게 말하며 수정구와 점술용 룬 카드 사이에 토끼 발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홍보용이 아니라 저주용인 게 틀림없는 펜던트도 함께였다. 그것은 벨벳 천이 깔린 테이블을 뒹굴기 직전까지 내 남편의 탈모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상세히 묘사했다.

덕분에 내 상상 속에서 켈란은 몇 번이나 머리가 벗겨졌고, 나는 대머리에도 여러 유형이 있으며 그것들 중 내가 수용 가능한 범위는 극히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테면 브리아나는 정수리를 애처롭게 덮는 형태가 제일 끔찍하다고 했으나 나는 정수리만 알머리인 게 더 싫었다.

“학생들한테 이런 걸 파시면 어떡해요?”

아무튼 그게 중요하진 않았다. 내 미래의 남편은 완전히 풍성할 거였고. 또 제이든 스펜서는 지저분한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에서 거의 유일하게 때 묻지 않은 5학년이었다. 걔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은 나에게 ‘운명의 물레’를 부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과제였다.

“오, 미스 돌턴. 고작 토끼 발에 예민하게 굴지 말아요. 생명을 잉태하면 인간은 신에 가까워지고, 신에 가까워짐이란 신비학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니까요. 나는 학생들에게 최고의 축복을 선사하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아무래도 그대에게는 두려움을 먹는 인형 말고도 필요한 게 많은 것 같네요. 사랑점을 봐 줄까요?”

“됐거든요!”

내가 발끈하거나 말거나, 알바라도 교수는 솜씨 좋게 룬 카드를 섞었다. 이윽고 뒷면이 보이게 카드 뭉치를 내려놓고 나더러 세 장을 고르라고 했다. 난나 교수처럼 알바라도 교수의 몽롱한 목소리에도 마법이 걸려 있는 모양이어서, 나는 꾸벅꾸벅 조는 대신 홀린 듯이 카드들을 짚었다.

“미스 돌턴의 과거는… ‘재생’, ‘영원’, ‘새로운 시작’이네요. 특정한 상대와 이별했다 재회하기를 반복했군요.”

“죄송하지만 저는 올해 초에 첫 남친하고 헤어졌고 걔랑 재회하느니 당장 혀를 깨물 거예요.”

“현재는 ‘뱀’이 심장을 쥐고 있어요. 물질적이거나 육체적으로 구속된 상태라는 뜻이죠. 독성이 있는 관계는 영혼을 갉아먹을 테니 조심하도록 해요. 어쩌면 마른 솔잎으로 엮은 드림캐처가 미스 돌턴의 침대에서 뱀을 쫓아낼 수도 있겠어요.”

“제가 방금 작게 말했나요? 제 심장은 지극히 자유로운 상태인데요.”

“앞으로는… 맙소사, ‘죽음’이에요! 미스 돌턴의 실프는 갈까마귀였군요! 그대의 마음이 가는 곳에 갈까마귀가 따를 게 분명해요!”

알바라도 교수의 룬 카드 해석은 맞는 군데가 하나도 없는 순 엉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켈란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차마 숨길 수가 없었다.

어차피 짝사랑하는 남자애를 마음속 보물 상자의 가장 깊숙이 집어넣기 마련인 것이 10대 여자애였나 보았다. 알면서도 당하는 사기가 진짜 위험한 거였고. 스테판 커크패트릭 따위는 상대도 안 될 사기꾼 중의 사기꾼은 내가 다리를 떨기 시작한 것을 슬쩍 보고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올렸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두려움을 먹는 인형과 드림캐처를 양손에 쥐고 알바라도 교수의 캐러밴을 나왔다. 사랑을 수호한다는 에질리 문양이 새겨진 금속 참은 내 머리를 동여맨 리본에 달린 채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패배였다. 근처에서 나를 기다리던 브리는 내 꼴을 보고 폭소하느라고 들이켜던 엘릭서를 다 흘렸다.

“‘환불 받아 올게’라며?”

“시끄러워.”

“내가 또 나서 줘야 하는 거야? 우리 방에서 생기는 대부분의 갈등을 해결할 때처럼?”

내 생각에는 우리 방에서 어떤 갈등을 일으키는 쪽이 브리였고 그걸 해결하는 건 나였다. 하지만 나는 브리아나보다 어른이었으므로 그녀의 귀여운 착각을 정정하지 않았다. 대신 내 패배의 증거물, 제이든 스펜서의 토끼 발을 그녀에게 쥐여 주었다.

브리아나는 반쯤 남은 엘릭서를 내게 건네고 의기양양하게 알바라도 교수의 캐러밴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내가 정령술 캐러밴에서 샐러맨더의 무지개 비늘을 사다가 노을에 비춰 보고 있을 때쯤 주술 도구들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놀림을 당할 것을 예상했는지, 브리는 잽싸게 우리 둘 다 패배자인 거라고 선수를 쳤다. 하지만 나보다 그녀가 훨씬 크게 등쳐 먹혔음은 대충 봐도 훤했다. 더구나 내가 산 샐러맨더의 무지개 비늘과 달리 브리아나가 산 엘릭서는 그냥 오렌지주스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중 패배자를 정해야 한다면 그건 브리아나 모슬리였다. 그렇게 말했더니 브리는 열여섯 음절로 이루어진 공용어 단어를 사용하여 반박했다. 치사하기 그지없었다.

***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 용감한 밀루아 소녀가 만인의 눈앞에서 전 남친에게 본때를 보여 주는 날 말이다.

도대체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켈란 일레스티아는 그가 말했던 대로 애덤 월시를 검술 대회에 참가시켰다. 그래서 월시는 지난 보름 동안 페드로 캔트렐을 닦달해 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검술 연마에 쏟아야만 했다.

캔트렐의 검술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다 못해 꽤나 좋은 편이었다. 서임도 받지 못한 나 따위는 한 손으로도 꺾을 정도로 말이다. 하기는 밀루아에서 가장 유서 깊은 기사 가문 출신인데 변방 자작가의 말괄량이 수준이면 말이 안 됐다.

그러나 나에게는 기사를 꿈꾸는 밀루아 여자애들의 희망 켄드라 브래들리가 있었다. 켄드라는 캔트렐이 월시에게 붙었다는 소문을 접하자마자 내게 와서는 웬 종이를 내밀었다. 학생회장 선거 때 그녀를 돕는 대가로 월시를 검술 훈련용 더미 꼴로 만들어 주겠다는 각서였다. 하단에는 켄드라의 마나 서명이 되어 있었다.

“제가 누군지 아시죠, 선배?”

한껏 거들먹거리던 켄드라가 떠올랐다. ‘아유, 그럼요.’ 나는 비굴하게 손끝에 마나를 모았다.

“우는 아이도 그치게 만든다는 오우거잖아요.”

달튼 자작 부부의 이름이 각서에 새겨지자 켄드라는 살짝 짜증을 냈지만 아무튼 내 손을 잡았다.

검술 훈련장은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블로썸의 연극을 구경하러 왔을 때보다 큰 인파가 모인 것 같았다. 피츠시몬스 최고의 마당발 카일 빌라드의 영향도 있을 거고, 대진표의 영향도 있을 거였다. 나 같아도 별 난리를 치면서 헤어진 애들이 갑자기 검술 대회에서 붙는다고 하면 무덤에서라도 뛰쳐나올 자신이 있었다.

알고는 있었다. 알고는 있었는데, 그래도 너무 많은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생각을 하니 조금 울렁거렸다. 가슴을 두드리는 나에게 켄드라가 물을 건넸다.

“선배는 맨날 자기가 일 크게 벌려 놓고 부담스러워하더라.”

“아무도 모르게 주목받고 싶은 마음을 모르겠니?”

나는 다들 날 칭송하고 알아 줬으면 좋겠지만 동시에 말을 걸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말했더니 켄드라는 별 헛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충 웃었다.

“아나이스 선배의 원수는 갚아야죠. 이건 미아가 주는 거.”

이번 검술 대회에 월시만큼의 초짜가 있다면 그건 바로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이었다. 원래 아나이스는 드미트리우스 칸투의 장편 서사시는커녕 대중가요의 가사를 읊어도 트로피는 따 놓은 당상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돌 만큼 시 낭송 대회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 왔으므로, 그녀가 검술 대회에 참가할 것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만큼 아나이스의 시합은 내 시합 이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하필이면 우승 후보-오우거 없는 굴에서 고블린이 왕 노릇을 한다고, 학생회 없는 검술 대회에서 캔트렐은 우승 후보로 꼽혔다-인 캔트렐과 만나서 더 그랬다.

아무리 검술에 소질이 있다 한들 우승 후보와 비견될 수는 없었다. 아나이스는 그녀를 상대도 하지 않으려고 드는 캔트렐에게 조롱을 당하듯이 패배했다.

탈탈 털린 것보다 검을 부딪쳐 보지도 못한 게 서러워서 아나이스는 울었다. 월시를 곤죽으로 만든 다음에 내가 붙게 되는 게 그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나는 호기롭게 아나이스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섰다.

내 실력으로 캔트렐을 이길 수야 없겠지만 일말의 고통을 선사할 수는 있으리라. 고개를 끄덕이며 켄드라가 건네는 장식 끈을 검집에 달았다.

고맙게도, 내 검집에는 이미 두 개의 장식 끈이 매달려 있었다. 하나는 오브라이언의 장미로부터 받은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 남친의 부자연스러운 자연사를 기원하는 피츠시몬스 내 비밀 조직 ‘은밀한 전 여친 연합’에서 날다람쥐 집배원을 통해 보내온 것이었다. 복잡한 매듭으로 오팔 원석을 솜씨 좋게 감싼 힌리치 출신 레이디의 장식 끈은 그것들의 바로 옆에 묶였다.

손목에는 손수건이 동여매인 채였다. 카일은 시합을 앞둔 기사에게 손수건을 선물하는 건 ‘카일리’의 오랜 꿈이었다고 능글맞게 말했다.

또 장식 끈이나 손수건의 개수가 검술 대회 참가자의 ‘버프’를 좌우한다나. 나는 ‘버프’가 뭔지는 몰랐지만 손수건을 매고 안 매고에 따라 상태창에 보이는 수치가 늘었다가 줄었다가 하는 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카일이 직접 놓아 엉성하기 그지없는 자수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훈련장의 한가운데로 갔다.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