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나는 다시 사과했고, 켈란은 다시 받아 주었다. ‘괜찮아’라고 말하는 동안 오르내리는 울대뼈를 홀린 듯이 보다가 문득 우리의 거리가 너무 가깝지 않나 싶었다.
두 개의 허벅지는 이미 딱 붙은 지 오래였다. 나의 왼쪽 어깨는 거의 켈란의 품속에 있었다. 등을 받치는 단단한 팔뚝에 가슴이 두방망이질쳤다.
“사랑해요!”
문득 조금의 낭만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우렁차기 그지없는 사랑 고백이 울려 퍼졌다. 블로썸, 아니 조슬린 공주였다.
나는 되게 시무룩해져서 그녀의 남친한테서 떨어져 나왔다. 이윽고 꿈틀거리며 켈란의 반대편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싹 구워진 뿔메뚜기 무리를 이끌고 자리를 뜬 포크너와 그녀의 아가씨 덕분에 그쪽에는 여유가 아주 많았다.
5인치쯤 가고 나서 뭐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보니 커다란 손바닥 아래 애처롭게 깔린 내 망토가 도움을 요청하는 중이었다.
약하게 잡아당겨 보았으나, 켈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슬린 공주의 씩씩한 모습에 넋이라도 빠진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앞이나 봤다. 극이 클라이맥스에 다다르자 연극부의 하나뿐인 음향 효과 담당자는 어마무지하게 바빠 보였다. 그녀는 한 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며 다른 손으로 낟알들이 든 원통형의 나무 악기를 흔드는 동시에 발로는 북을 두드렸다.
친구의 묘기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와중에 불현듯 왼쪽 볼을 찌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고개를 돌렸을 때 그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양심 없는 연극부는 형편없는 공연에도 입장료와 팁을 따로 받았다. 나는 금화 두 개에 ‘음향 효과 담당자를 위하여’라고 나누어 쓴 다음 그것들을 모금함에 넣었다. 그런 뒤에는 브리아나와 팔짱을 끼고 광장을 가로지르면서 켈리를 제외한 연극부의 전원을 헐뜯었다.
“악기 연주를 하고 싶었던 거면 취주악부에 들었으면 됐잖아.”
아니, 켈리도 쪼끔 헐뜯었다. 걔가 만약 취주악부에 들었더라면 끔찍하게 구린 연극을 한 시간 반이나 볼 일도, 대충 구워진 곤충에게 습격당할 일도, 여친 있는 남자애한테 불필요하게 설렐 일도 없었을 거였다.
제일은 아니어도 나름대로 좋아하는 무어 교수의 슬픔을 직관하지도 않았을 거고. 그는 나를 괜찮은 학생이라 평가하는 얼마 없는 교수였다.
심통이 나서 투덜거리자 브리는 그래도 극본은 되게 괜찮았던 거 같다고 했다. 데뷔탕트 전후로 밀루아에 출간되는 로맨스 소설을 전부 읽었던 입장에서는 그마저도 동의할 수가 없었다.
눈을 세모꼴로 뜨고 볼 가득 장전한 비평을 쏟아 내려던 찰나였다. 농담의 달 연회장에서도 보기 어려울 만큼 화려하고 또 맥락 없이 꾸며진 제이든이 온갖 주전부리를 끌어안고 등장했다. 말문이 턱 막혔다.
“아침부터 굶기라도 했어, 스펜서?”
브리의 물음에 고개를 젓는 제이든은 사뭇 덤덤해 보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요사이 그는 성장기라도 다시 왔는지 엄청나게 먹어 대는 중이었으므로, 제이든이 뿔메뚜기 구이를 포함해 모든 노점의 먹거리를 사들인 것은 별로 놀랍지 않았다.
일전에는 그의 식사량과 식사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 식당의 마법 인형들이 단체로 오작동을 일으킨 사건도 있었다. 어쩌면 가을은 아리엘 달튼뿐만 아니라 제이든 스펜서도 살찌우는 계절인가 보았다.
“제이든, 미안하지만 지금은 10월이 아니라 9월인데.”
아무튼 내가 놀란 건 다른 쪽이었다. 안타깝다는 듯이 눈썹을 늘어뜨리자 제이든의 곁에 있던 마르퀴즈 볼턴이 반색하며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극히 간만에 네 의견에 공감하게 되는군.”
마주 치는 시늉을 하다가 마지막 순간 주먹을 쥐어 약을 올렸더니, 볼턴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 원래부터 그러려고 했다는 듯이 안경줄을 매만졌다.
“대체 뭘 쓰고 있는 거야?”
제이든의 머리 위에는 끄트머리가 긴 역삼각형의 무언가를 실로 꿰어 만든 관이 올라가 있었다.
“노움 발톱이잖아.”
첩자도 아니고 채용 비리의 수혜자도 아닌 교수에게 점술 수업을 들었던 브리아나 모슬리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다.
“정령술에서 사용되는 거야. 땅의 기운을 강화하거나, 바람의 기운을 눌러 준대.”
“어디서 났어?”
“알바라도 교수님께서….”
범생이 대회 챔피언은 무언가 설명할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우물거리는 말허리를 단호히 자르고, 브리아나는 거대한 몸을 장식한 주술 도구들을 가리키며 아는 체를 이어 나갔다.
이를테면 제이든의 손목에 걸린 건 말라비틀어진 원숭이 손이었다. 그것을 쥐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었다. 또 넥타이에는 웬 풀 쪼가리가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는데, 겨우내 감기에 걸리지 않게 한다는 가을의 첫 낙엽이었다.
옷깃에는 육망성의 가운데에 알바라도 교수의 얼굴이 음각된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테두리에 원을 그리며 ‘폴라 알바라도, 알바라도 백작대리, 커스롭 점·주술 연합 대학교 차석 졸업, 나돈 남부 점술사 협회 부회장’이라고 새겨진 물건이었다. 주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해서 자세히 봤는데, 아무래도 홍보용 같았다.
확실히 학생회 애들은 피츠시몬스의 어딜 가나 주목을 받았으므로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나 다를 게 없었다. 더구나 제이든은 키도 컸고, 덩치도 컸으며, 우스꽝스러운 펜던트와는 지독히 안 어울렸다. 아마 백 마일 밖에서도 알바라도 교수의 아무래도 좋은 이력들을 읽어 낼 수 있을 거였다.
마지막으로 새끼용 클레이 대신 제이든의 품을 차지한 토끼 발은 행운과 동시에 다산을 상징했다.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당장 할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여친이 있는 것도 아닌 제이든에게 팔기에는 애먼 물건이었다.
“이건 왜 샀어?”
어처구니가 없어서 올려다보자 제이든은 곤란하다는 듯이 시선을 피했다. 나는 그의 움츠러든 어깨에 매듭 끈이나 술 장식을 마구 얹어 대는 알바라도 교수를 금방 상상했다.
“교수가 노점을 내도 돼?”
“아까 보니까 신비학 연구부 노점을 빌려 쓰시더라.”
“그렇게 하면 아슬아슬하게 교칙 위반이 아니거든. 유감스럽지만.”
화가 나서 묻자 브리아나와 볼턴이 차례대로 대답했다.
“그래도 물건을 파는 건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제이든을 보내 정리하려고 했지.”
“좋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잘 알겠네.”
발을 크게 구르며 제이든에게서 홍보용 펜던트와 토끼 발을 뺏어 들었다. 나는 지금껏 교수이고, 또 켈리 라미레즈의 멘토라는 이유로 ‘폴라 이모’를 존중하려고 노력해 왔으나-비록 그녀가 틈만 나면 금화를 벌 궁리를 하는 사기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에서 등쳐 먹혀도 되는 사람의 목록이 존재한다면 제이든 스펜서의 이름은 가장 마지막에 있어야 맞았다.
“환불 받아 올게.”
스스로 듣기에도 엄청나게 멋진 말투였다. 얼마나 멋졌냐면 브리아나뿐 아니라 내가 마음을 먹은 일이라면 일단 못마땅하게 여기고 보는 볼턴마저 박수를 칠 정도였다.
제이든은 잠시 당황하다가 나와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수 종족 문화 학습부의 노점으로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그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에서 뿔메뚜기 구이가 왕창 튀어나온 까닭이었다.
내가 브리아나와 함께 알바라도 교수에게 따지러 가는 동안 펜던트는 끊임없이 악담을 퍼부었다. 그것에 따르면 내 미래에는 너무나 짙은 암운이 깔려 있어서 학업은 순탄치 않을 거고 연애는 어림도 없으며 마흔세 가지의 시련을 거치는 과정에서 건강을 모조리 잃게 될 것이었다.
또한 모든 시련을 극복하여 무사히 생존하고 나아가 결혼을 한다 하더라도, 8할 이상의 확률로 남편은 대머리거나 대머리가 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켈란 일레스티아라면 대머리가 되어도 여전히 미남일 거라고 속으로 빈정거리다가, 무의식적으로 미래의 남편 자리에 켈란을 세웠다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깨닫고 몸서리쳤다.
다정한 브리아나는 룸메이트가 착잡해진 것이 펜던트의 저주 때문이라고 여겼는지, 카일의 이마가 휑해질 쯤엔 그녀의 발모 약도 완성이 될 거라고 위로했다.
“브리, 몇 번이나 말했지만 걔랑 결혼 안 해.”
“아리엘, 몇 번이나 말하지만 걔는 진짜 좋은 남편이 될 거야. 보웬 로드리고만큼은 아니어도 말이야.”
나도 알았다. 어쩌면 나에게만은 로드리고보다 훨씬 좋은 남편이 될 수도 있었고(카일의 가랑이에 크리켓 배트가 달려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같은 욕조에 들어갔을 때 그는 여섯 살이었다.).
내 말은, 너무 잘 알아서 그와는 결혼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대꾸 없이 입술을 비죽이자 브리아나는 코로 웃었다.
신비학 연구부는 집시의 캐러밴을 세 대나 빌려서 노점을 꾸렸다. 각각 연금술과 점·주술, 정령술을 상징하는 문양을 코끼리 상아 장식에다가 새겨 놓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알바라도 교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점·주술 캐러밴의 줄이 제일 길었다.
줄의 끄트머리를 찾는 척하면서 슬그머니 주문을 외웠다. 곧 흑마법에 충분한 면역력을 갖추지 못한 저학년 학생들이 배탈을 호소하며 뛰쳐나왔다.
그래도 여전히 한참 기다려야 할 만큼 사람이 많았다. 서른두 음절로 이루어진 공용어 단어를 암기할 마음은 있어도 삼십이 분 동안 가만히 서 있을 마음은 추호도 없는 브리아나 모슬리는 연금술 캐러밴에서 파는 엘릭서의 정체가 궁금하다며 그쪽으로 빠졌다.
주술 도구를 주렁주렁 걸고 나오는 애들이 과연 얼마를 내다 버렸을지를 추측하는 짓거리에도 질릴 때쯤 내 차례가 왔다. 펜던트와 토끼 발을 꼭 쥐고 캐러밴에 들어서자 알바라도 교수가 특유의 흐리멍덩한 말투로 외쳤다.
“미스 돌턴! 실프의 축복을 받은 아가씨! 가장 부드러운 바람이 그대의 이름을 속삭여 주었어요!”
“실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