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카일의 완벽한 묘사에 감탄하며 구석에 마련된 장갑을 꼈다. 그건 진짜 유혈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막아 주는 안전 장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 굵은 반지만 아니면 통과였는데, 전 여친의 불꽃 펀치에 기절한 선배가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졸업 이후에도 한참이나 후유증에 시달렸으며, 피츠시몬스의 일부 난봉꾼으로 하여금 ‘절대로 전 여친을 엿 먹이지 말 것’이라는 교훈을 뼈에 새기도록 했다.
이번 수확의 달 연회에서 내 목표는 월시가 얽힌 새로운 전설이 구전되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전하는 교훈은 다음과 같을 것이었다. ‘절대로 전 여친을 엿 먹이지 말 것, 그녀가 검을 잡을 줄 안다면 더더욱!’
기특하기 그지없는 나의 소꿉친구는 내가 떠벌리는 계획을 가만히 듣다가, 월시의 전설이 무탈히 퍼질 수 있도록 인맥을 전부 동원해 객석을 채우겠노라고 호언했다. 그래서 나는 금화 세 개짜리 폭력을 휘두를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짧은 털이 빽빽하게 난 장갑은 카일을 후려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싸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장난치듯 그의 양 볼을 콱 잡아 끌어당긴 다음에 엄숙하게 충고했다. 또 다른 전설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으면 이만 장사를 접는 게 좋을 거라고 말이다.
“에드가 라모스가 네게 불만이 있나 보더라고.”
“라모스? 아직 등장할 때 안 됐는데?”
“밖에 있어. 아까 보니까 우드한테 금화 삼백 개 내면 너 백 대 때릴 수 있냐고 묻던데. 대체 뭔 짓거리를 한 거야?”
“아-무것도.”
‘아’와 ‘무’의 사이가 늘어진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기는 한가 보았다. 나는 카일이 까불기로 작정했을 때 어디까지 밉상이 될 수 있는지 알았으므로 더는 그를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카일은 나의 충고를 온전히 수용했다. 내가 혀를 차며 천막을 나선 뒤로 딜레이니 우드는 ‘다음!’을 외치지 않았다. 에드가를 포함한 ‘카일 빌라드를 때리기 위해 금화 세 개쯤은 지불 가능한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은 망연자실해져서 우드에게 천막과 간판을 거두는 이유를 물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대요.”
우드의 간결한 대답에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검은 후드에 반쯤 묻힌 채 음산하게 빛나는 적자색 눈동자를 비롯하여 수십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향했다.
“‘달튼의 돌주먹’이라고 불리던 시절이 있었지.”
하는 수 없이 주먹을 치켜들고 용맹하게 굴었다. 그러자 에드가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를 대신하여 달튼의 돌주먹이 얄미운 카일 빌라드를 응징한 상황이 썩 나쁘지 않다고 여긴 듯했다.
“그래서 너한테 반했잖아, 내가.”
“반만 달라고? 미안하지만 불가능해. 미래의 공용어 철자 말하기 대회 챔피언이 코코넛을 무지 좋아하거든.”
슬슬 가는귀가 먹기 시작한 나의 검술 스승, 매튜 영감을 떠올리며 혼신의 연기를 펼쳤더니 에드가의 심사는 다시 배배 꼬여 버렸다. 그는 광장에 세워진 노점들을 기웃거리며 구경하는 나에게 딱 붙어 성가시게 굴었다. 하지만 내가 지독하게 지루할 것이 틀림없는 공용어 철자 말하기 대회장으로 향하자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
브리아나 모슬리는 자타공인 남자에 환장한 애였다. 그리고 그녀가 남자만큼 사랑하는 게 있었다면 그건 바로 스스로의 명석함을 자랑하는 행위였다. 브리가 서른 두 음절로 이루어진 단어를 훌륭하게 써 냄으로써 공용어 말하기 대회의 최강자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러므로, 이상하지 않다 못해 당연했다.
나는 마법 폭죽 세 개를 터뜨려 브리아나가 챔피언으로 호명되고, 트로피를 받고, 감동적인 수상 소감을 말한 뒤에 대회장을 벗어날 때까지 그녀의 머리 위에 줄곧 ‘가장 멋진 친구’라는 글씨가 떠 있게끔 했다. 브리는 처음에는 되게 민망한 듯 보였지만 끝내 당당히 턱을 치켜들었다.
브리의 어깨가 하늘에 닿았으므로 나와 아나이스와 포크너로 이루어진 응원단은 지극히 합당한 보상을 받았다. 연극부의 공연을 보러 가는 길에, 우리는 브리아나의 지휘 하에 눈에 보이는 주전부리를 전부 샀다.
이를테면 아나이스는 소수 종족 문화 학습부가 야심차게 내놓은 뿔메뚜기 꼬치의 최초 구매자가 되었다. 그녀에 따르면 뿔메뚜기는 새우보다 맛이 좋았다.
요사이 빵에 꽂힌 브리는 제과제빵부의 노점을 거의 털다시피 했다. 마법 식물 재배부의 수상한 열매 튀김은 포크너의 품에 안겼고, 나는 아까 먹은 캐러멜 사과를 또 샀다. 단 음식 암살자 아리엘 달튼에게 사과 한 알은 간에 기별도 안 갔다.
강당을 취주악부가 선점한 바람에 연극부는 검술 훈련장을 반나절 만에 그럴듯한 극장으로 탈바꿈시켜야만 했다. 학생회의 공주님이 연극부의 공주님이기도 했으므로 그것이 가능했다. 무어 교수는 내일부터 검술 대회가 열릴 훈련장이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겼으나, 일레스티아의 황태자는 강경했으며 나돈의 왕자는 금화가 아주 많았다.
훈련장을 둥글게 감싸는 계단식 의자는 너무 딱딱해서 앉아 있노라면 엉덩이가 배기곤 했다. 두툼한 방석을 올리니 졸음이 올 정도로 편안해졌다.
계단과 한참 단차를 둔 바닥에는 원래 돌바닥의 깨진 조각과 쌀알이 담긴 포대를 묶어서 만든 더미들이 지천에 있었다. 그것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자리에 매끈한 나무 바닥이 깔린 간이 무대가 올라갔다.
조명 장치와 음향 증폭기를 어느 세월에 설치했는지 몰랐다. 확실한 건 장비들이 죄다 상단을 끼고도 반나절 만에는 결코 공수하기 어려운 최고급품이라는 거였다.
상단주 꿈나무인 내가 판단하기로는 어디 극장에서 뜯어 온 거 같았다. 극장 관계자한테는 미안하지만 음향 효과 담당자를 친구로 두고 있는 입장에서는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켈리는 이번 공연을 위해 다섯 종의 관악기를 터득했다.
블로썸의 인기 때문인지 관객이 바글바글했다. 탑에 갇힌 공주와 좀도둑의 사랑 이야기보다 적재적소에 악기로 효과음을 넣어 극의 분위기를 살리는 켈리의 모습이 보고 싶었던 우리는 무대의 뒤편을 마주하고 앉았다. 비교적 한가한 대신에 조명이 닿지가 않는 자리여서, 면막을 제외한 커튼이 전부 내려가자 내 손이 희미하게 보일 만큼 어두워졌다.
로즈마리 블로썸의 공주 분장은 환상적으로 잘 어울려서 걔의 끔찍한 연기에도 몰입감을 부여했다. 실제로 제국 휘하의 어떤 소왕국 공주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반면 좀도둑을 맡은 트레버 기븐스는 작년까지는 연기를 곧잘 했던 기억이 나는데 올해는 처참했다. 아무래도 블로썸의 환상적인 공주 분장이 기븐스를 긴장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확실히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미모도 죄가 되었다. 근래 여러 수업에서 켈란 일레스티아와 마주치면서 철저하게 체득한 것이었다.
짝사랑을 자각한 후로, 나는 방심하는 순간마다 자꾸 켈란에게로 향하는 고개를 제어하려고 노력했으나 계속 실패했다. 그리고 그건 다 걔 잘못이었다. 걔가 너무 잘생겨서.
궤변으로 스스로를 옹호하느라고 나는 다섯 개의 관악기를 근사하게 다루는 켈리의 활약을 거의 놓쳐 버렸다. 퍼뜩 정신이 들어 앉은 자세를 고치던 찰나, 한 무리의 학생들이 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근처까지 왔다.
아나이스와 브리아나, 포크너가 무작정 들이밀어지는 엉덩이에 치여 차례차례 옆으로 이동했다. 나도 그렇게 했다.
“아, 미안.”
“괜찮아.”
하염없이 움직이다 보니 의자의 끝에 앉은 사람과 부딪쳐 버렸다. 깜짝 놀라 사과하자 사뭇 우아한 대답이 돌아왔다. 부드럽고 물기 있는 목소리. 내 심장을 미끄러뜨리는.
“좁으면 기대.”
켈란이 오른팔을 살짝 빼서 내 뒤쪽을 짚으며 속삭였다. 나는 머쓱하게 웃는 동시에 정확히 그 말의 반대로 했다.
“달튼, 조심 좀 해! 과자 다 쏟아지잖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포크너가 짜증을 부렸다. 그녀와 나의 사이에는 간식거리가 왕창 쌓여 있어서 포크너는 내가 곤경에 처했음을 알지 못했다.
“맙소사! 당신은 롤랜드 왕자님이 아니셨군요!”
“그, 맞, 습니다, 공주. 저는 사실….”
블로썸은 모든 대사를 힘차게 내뱉었다. 반면 기븐스는 모든 대사를 웅얼거렸다. 켈리는 모든 효과음을 끝내 주게 넣었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는 도무지 못 봐줄 정도인데 괴상하게 실감은 나는 연극이 이어졌다.
나는 엉망진창인 무대에도, 켈리의 고군분투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내 모가지는 정면을 향해 있었으나 신경은 온통 다른 쪽에 쏠려 있었다. 가까스로 닿지 않고 버티는 중인 내 허벅지와 켈란의 허벅지에 말이다.
조명이 번쩍거릴 때마다 희미하게 비치는 옆얼굴은 언제나처럼 조각 같았다. 턱선이 끝나는 곳에서 반 뼘쯤 위를 덮은 구레나룻이 얼마나 멋진지를 궁리하느라고, 나의 감각 기관들은 아나이스와 포크너 쪽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불온한 기운을 잡아낼 수 없었다.
“꺅!”
귀족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최대한 삼킨 포크너의 비명은 무슨 쥐가 우는 소리 같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내게로 날아드는 뿔메뚜기와 눈이 마주쳤다.
사실 ‘눈이 마주쳤다’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었다. 그것에게는 눈이랄 게 없었으니까!
위태로운 비행 끝에 내 콧대에 안착한 뿔메뚜기는 노르스름하게 그슬린 데다가 몸통의 반절이 떨어진 채였다. 단면은 거칠게 짓이겨져 있었는데, 이빨에 씹힌 흔적처럼 보였다. 소수 종족 문화 학습부가 메뚜기를 굽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안나, 안나! 저주받은 곤충이 나를 물었어!”
“우욱!”
그다음엔 아비규환이었다. 마구 튀어 오르는 뿔메뚜기 구이를 망토 자락으로 후려치는 포크너와 대차게 헛구역질하는 아나이스가 희미하게 보였다. 겁에 질린 탓인지, 상급생의 품위는 아주 내팽개친 채 허둥거리는 중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곤충을 다룰 수 있는 건 오로지 철저한 준비를 마친 상태일 때에 한해서였다. 필사적으로 도리질을 치다가 머리를 어디에 콱 박았다. 이내 코를 간질이던 감각이 완전히 가셨다.
아나이스가 먹다 만 뿔메뚜기 구이는 켈란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처참하게 바스라졌다. 그가 손끝을 가볍게 비비자 곤충의 잔해 대신 빛이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그제야 내가 들이받은 것이 신성 일레스티아 제국의 황태자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