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부지불식간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전에도 들어 본 적이 있는 말투였다. 소꿉친구의 손에 목이 졸리기 직전에 말이다. 오금이 저리고 오한이 등줄기를 핥아 올린 뒤에는 팔과 다리가 눈에 띄게 떨렸다. 잠깐이라도 집중을 잃었다간 꼴사납게 자빠질 거 같았다.
“나, 나는… 좀… 납득이 안 돼. 너희는, 너는, 그냥 데이터잖아.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
“너도, 카일도, 켈란도, 진짜가 아냐. 이 세계에서 지, 진짜는 나뿐이라고. 왜 내가… 너, 희에게….”
더듬거리는 말투. 번들거리는 안광. 귀를 때리는 굉음.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마구 뒤섞인 마나와 단단히 속박된 내 몸뚱어리. 숨통이 조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나를 죽일 수 없다는 말과 해칠 수 없다는 말은 결코 같지 않았다.
“됐어. 어차피 너 같은 애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을 테니까.”
다음 순간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블로썸은 다시 종달새처럼 말하게 되었다. 마나의 흐름은 잠잠해졌으며 더는 맨드레이크의 비명 같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만이 아까와 달라졌다. 갑작스레 긴장에서 풀려난 탓인지 나는 형편없이 나동그라졌다. 초콜릿 껍데기가 두 번째로 바닥에 흩어졌다.
‘너 같은 애’라는 표현을 최근에도 들었다. 마르퀴즈 볼턴은 내가 ‘그분’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블로썸의 말과 맥락이 비슷하지 않나 싶었다.
볼턴이 암만 블로썸을 숭배한다고 해도 ‘그분’이라 지칭하지는 않을 거였다. 말인즉슨 볼턴이 높여 부를 만한 누군가가 블로썸을 돕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켈란 일레스티아에게 금지된 마법 약을 먹여 블로썸을 사랑하도록 만든….
“만일 네가 진엔딩을 보게 되면, 그러면, 게임은 어떻게 돼?”
미련 없이 자리를 뜨는 블로썸의 등에 대고 물었다. 스스로 듣기에도 사뭇 다급한 어조였다. 그러자 블로썸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알 게 뭐야?”
무력하게 주저앉은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블로썸의 금발이 물결치며 멀어졌다.
***
그리폰 크리켓부의 ‘펀칭 부스’는 연회 첫날부터 문전성시였다. 특히 카일의 턱을 후려 보고자 하는 애들이 너무 많아서, 나는 최대한 줄이 적은 시간을 노리려다 오전을 완전히 날리고 말았다.
더는 지체하기가 어려워서 하릴없이 기다란 줄의 끄트머리에 섰다. 자칫하다가는 이따 열릴 공용어 철자 말하기 대회에 늦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평생 입에 담기나 할까 싶은 괴상한 공용어 단어들에는 흥미가 전무하였으나, 브리아나 모슬리가 범생이 중의 범생이로 거듭나는 광경은 직관해야 마땅했다.
착한 내 친구 제이든이 지나가다 나눠 준 캐러멜 사과를 씹으며 주변을 구경하는 것으로 지루함을 달랬다. 조경수와 조경수 사이에 ‘피츠시몬스’라고 쓰인 색색의 깃발들이 늘어져 있었다.
밤이 되면 거기에 발린 마법 도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빛날 것이 사뭇 기대되었다. 작년에는 어떤 예술적 소양을 지닌 학생이 밤에만 드러나는 투명 도료로 그럴듯한 거시기를 그려 놓은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났었는데, 올해는 과연 어떨지 궁금했다.
“여기는 유명인이라도 왔어? 무슨 난리래?”
“안녕, 메건. 저기서부터 여기 끝까지는 카일 빌라드를 때리기 위해 금화 세 개쯤은 지불 가능한 사람들의 모임이야.”
함께 아나이스를 배웅하며 조금 친해진 메건 클리블랜드가 인파에 묻힌 나를 용케도 발견했다. 팔을 크게 벌려 가리키자 그녀는 어련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잔뜩 쥐고 있던 것들 중 하나를 건네었다. 주먹만 한 종이 봉투였는데, 안에 동그란 빵이 들어 있었다.
“우리 제과제빵부 노점에서 파는 거야. 여기서 별로 안 머니까 이따가 먹으러 와. 싸게 줄게.”
“야, 너네는 질리지도 않고….”
“코코넛 잼밖에 안 들었거든! 반성문을 몇 장을 썼는데 또 그 짓거리를 하겠니?”
한심스러워서 핀잔을 던지니 메건은 발끈해서 쏘아붙였다. 반성문으로 교화가 되는 거였으면 나는 지금쯤 승천했어야 했으므로, 구구절절한 변명에는 설득력이 모자랐다.
나는 메건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빵을 잘게 찢어 쥐고는 앞에 선 사람의 어깨를 두드렸다. 넥타이 색으로 미루어 보아 4학년으로 추정되는 이름 모를 남자애는 초면의 선배가 갑자기 들이대니 꽤나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어, 음, 선배님?”
“달튼이야.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네 인상이 참 선하고 좋은 거 같아서. 먹어 봐.”
“이런 허접한 사기에 당하는 지능이라면 내후년쯤 패가망신할 거다.”
주춤거리며 뒷걸음질하는 후배의 얼굴에다가 대고 막 들이밀던 빵 조각이 웬 남자에 의해 가로채어졌다. 검은 로브에 전신을 꼼꼼히도 감싼 꼴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푹 눌러쓴 후드 아래 우물거리는 입매는 잔뜩 포식한 짐승처럼 만족스러운 각도로 기울었다. 익숙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에드가?”
“쉿. 막스라고 불러. 막심이나.”
“막스?”
“막시밀리아노. 미들네임.”
“미들네임은 또 나돈식이네.”
‘브라이스’도 ‘에드가’도 나돈 사람들이 흔히 가지는 이름은 아니었다. 따지자면 일레스티아식 이름에 가까웠는데, 무심코 지적하자 에드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큰일날 소리를 지껄였다.
“국왕 전하가 지었거든. 내 생각에 그 양반은 나돈을 일레스티아의 속국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케이틀린 대제에게 뭐든 갖다 바치려고 안달이 난 걸로 순위를 매기자면 우리의 필립 8세를 빼놓을 수가 없었다. 그 필립 8세의 숙적이 쟤네 국왕 전하였고.
밀루아 귀족들도 종종 수군거리곤 하던 이야기였으나 발화자가 왕자라면 무게가 달랐다. 나는 빵의 다른 조각으로 에드가의 입을 틀어막았다. 넙죽 받아먹는 동시에, 에드가는 살짝 혀를 내어 내 손끝을 핥았다.
“변태 아냐, 이거!”
“맛있네.”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르니 뻔뻔스러운 대답이나 돌아왔다. 하여간 방심할 수가 없는 자식이었다.
“제일 긴 게 빌라드 줄이지?”
브라이스 나돈이 복학할 만큼 건강해졌다는 소식은 들은 바가 없었으므로, 에드가는 이번에도 몰래 침대를 빠져나온 듯했다. 그의 공간 이동 멀미 체질을 죽도록 저주하며 말이다.
“맙소사, 막스. 너 이거 하려고 왔어?”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기껏 대륙을 가로질러 아카데미까지 행차를 하신 이유가 오로지 카일 빌라드를 쥐어박고 싶어서라고? 진짜로?
“네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걔를 한 대 치는 건 4월쯤부터 계속 내 계획표에 있었다고.”
에드가가 주먹을 말아 쥐며 이를 갈았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팔뚝은 다부졌고 손등에는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불쌍한 카일. 대체 무슨 원한을 샀길래. 이제 결백하다는 게 확실해진 코코넛 잼 빵을 씹으며 중얼거렸더니 에드가는 엉뚱한 소리를 지껄였다.
“생각해 봤어?”
“뭘?”
“전에 한 말. 생각해 보라고 했잖아.”
생각해 봤다. 머리에 쥐가 나도록. 결론도 났다. 에드가 막시밀리아노 라모스는 나를 좋아한다. 어느 정도냐면 너덜거리는 가슴팍을 부여잡고 무리해서 공간 이동 주문을 외울 만큼은 그랬다.
그가 내 침대에 흘리고 간 귀걸이가 쌍둥이 공략 성공의 증표인 ‘로즈마리 왕비의 귀걸이’라는 사실을 카일을 통해 확인했다. 한쪽뿐이었던 거는 다른 한쪽이 에드가의 형제에게 있어서란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전개가 아닐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쌍둥이는 한꺼번에 공략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증표도 한꺼번에 받아야 맞았다. 내가 처한 상황이 일반적이지 않아서 문제였다. 나 같은 경우 에드가와만 친했고 나돈하고는 서로 흠집을 못 내서 안달이었다. 블로썸은 반대였다. 그래서 그녀도 나도 아직 에드가든 나돈이든 공략을 완료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반이나마 목표한 바를 이룬 거는 맞는데 마냥 즐겁지가 않았다. 뭐라도 답해 줄 수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내게는 명백히 마음에 둔 상대가 있었으나 그걸 전했다간 불완전한 에드가의 공략 상태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었다.
아예 맞장구를 쳐 버리는 것은 어떠냐고 묻는다면 그럴 자신은 없었다. 탤론에서 달튼으로 돌아왔을 쯤에 나는 스스로 어느 정도 친구들을 기만할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했는데, 실은 아니었나 보았다.
빵 봉지와 캐러멜 사과를 양손에 쥐고 뚝딱거리는 동안 마법처럼 돌파구가 나타났다. 내후년쯤 패가망신할 뻔했던 4학년 남자애가 개운한 표정으로 ‘펀칭 부스’의 천막을 걷고 나온 것이었다.
금화 대신 킬고어 동전-경제학을 담당하는 킬고어 교수의 얼굴이 양각된 동전으로, 탁월한 경제학 시험 성적이나 킬고어 교수의 편애를 상징하는 기념 주화였다-을 지불하는 개자식을 가려내기 위해 입구를 지키던 딜라이니 우드가 쩌렁쩌렁하게 ‘다음!’ 하고 외쳤다.
“어디 계속 그렇게 모르는 척해 보시지.”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발을 옮기는 나를 배웅하면서, 에드가 라모스가 느긋하게 말했다. 묘하게 스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그만 등줄기가 축축해졌다.
***
항상 생각하는 건데, ‘펀칭 부스’의 내장은 외장에 비해 꽤나 아기자기한 편이었다. 밖에는 막 건틀릿이나 가시 박힌 너클 같은 걸 매달아 다가올 유혈 사태를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막상 알록달록한 천막 안에 빨간 거라곤 카일의 머리카락뿐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천막의 벽면에는 ‘최고의 펀치’ 순위가 매겨져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과거에서, 카일은 ‘최고의 펀치’ 1위에 소꿉친구의 이름을 올림으로써 내게 ‘달튼의 돌주먹’이라는 별명이 붙도록 했다. 쪼끔 잘될락 말락 하던 남자애랑 덕분에 완전히 틀어졌던 기억이 나서 입이 엄청 써졌다.
“어째 여기서 만나는 네 표정은 늘 변함이 없는 거 같다?”
“어떻길래?”
“간식 사이에 끼워 놓은 약을 발견했을 때 릴루가 짓는 표정?”
“정확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