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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91화 (91/178)

91화

“여기 앉거라, 스펜서와… 들튼.”

“어, 교수님? 제 성은 ‘들튼’이 아니라 ‘달튼’인데요. 혹시 이를 악무신 건 아니죠?”

나와 제이든의 인사를 대강 받아 넘기는 험프리스 교수는 언제나 그렇듯이 온갖 불행을 짊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도서관의 미스터 브래드쇼와 달튼 저택의 경영 대리인 뎀시 준남작, 그리고 험프리스 교수가 어떤 운명의 공동체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만큼 똑같은 표정일 리가 없었다.

“대체 하루라도 조용히 넘어갈 수는….”

“에드워즈가 저를 모나한 교수님 같은 변태 성욕자로 묘사한 걸 보셨잖아요!”

“달튼, 내가 네 입술을 오리 부리로 만들기를 원치 않는다면 더는 교수를 모욕하거나 교수의 말을 끊지 말려무나.”

대부분의 피츠시몬스 학생들처럼, 나도 스태포드 교수의 돌출된 눈과 가느다란 팔뚝이 하피를 연상시키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모나한 교수와 사귈 일은 없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주둥이에 부리를 달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가만히 있었다. 내가 조용해지자 험프리스 교수는 콧잔등까지 미끄러진 안경 너머로 제이든을 봤다.

“에드워즈가 말하기를, 네가 달튼의 사주를 받아 그녀를 협박하기 위해….”

“이런, 미친! 그게 무슨 개 같은….”

험프리스 교수가 짧은 주문을 외우자마자 내 입에서는 말 대신 ‘꽥’이 나오기 시작했다. 입가를 더듬으니 딱딱한 감촉이 닿았다. 분개하여 테이블을 마구 두드렸다.

팔이 옅은 미색의 날개로 변하고 나서야 전의를 모조리 잃었다. 제이든은 나의 축 늘어진 날개와 꾹 다물린 부리를 곁눈질한 뒤에 침착하게 말했다.

“신문부실에 간 적은 있지만… 협박하지는 않았는데요. 아리엘, 미스 달튼이 사주한 것도 아니고요.”

“나도 네가 에드워즈를 협박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구나, 스펜서….”

‘에드워즈는, 좀, 그러니까…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잖니.’ 험프리스 교수가 에드워즈의 망상 장애를 에둘러 말했다. 나는 거기에 덧붙일 거리가 아주 많았으므로 계속해서 꽥꽥거렸다. 곧 험프리스 교수가 다른 주문을 외웠고 그녀의 테이블 서랍에서 탄력 있는 소재의 리본이 튀어나와 내 부리를 단단히 묶었다.

뒤이어 제이든이 ‘협박’ 사건이 벌어진 정황을 설명했다. 금일자 피츠시몬스 타임즈를 확인한 그는 에드워즈의 기사가 지극히 악의적이라고 느꼈다. 학생회에서 이미 낭설이라 결론 내린 ‘악마’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림으로써 아카데미 내에 불안을 조성함은 물론이요, 그의 소중한 친구인(이 대목에서 나는 제이든을 꼭 안아 주고 싶어졌다.) 아리엘, 미스 달튼의 명예를 지나치게 훼손한 탓이었다.

그래서 제이든은 전술학 수업을 마치고 즉시 신문부실로 향했다. 협박 목적은 절대 아니었고, 유감을 표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만일 에드워즈가 그의 의견을 수용할 의지를 보인다면, 앞으로 비슷한 논조의 기사를 읽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끔 당부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결의를 다지며 신문부실에 도착한 제이든이 정중히 문을 두드렸을 때 크리스타 에드워즈가 나타났다. 나는 신문부실의 문간을 가득 채운 제이든의 몸집을 상상했다. 그를 마주 보고 선 에드워즈도. 걔는 어지간한 남자애와 맞먹을 정도로 키가 큰 편이었으나 제이든의 앞에서는 아마 아기처럼 조그마하게 보일 것이었다.

“그래서 에드워즈에게 뭐라고 말했니?”

험프리스 교수의 질문에 제이든은 잠시 조용히 있다가 대답했다.

“…안 했어요.”

“음?”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니?”

“무서워할까 봐….”

“오, 스펜서….”

오리엘 달튼과 험프리스 교수가 동시에 이마를 짚었다. 나는 평생 서로의 유병장수를 빌기나 할 줄 알았던 에드워즈와 아주 조금 이어진 기분을 느꼈는데, 참으로 기념비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걔를 이해한 순간일 테니 말이다.

제이든 스펜서의 박력 있는 무표정은 꽤나 높은 확률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만일 그가 거기서 뭐라도 말했다면 상황은 상당히 달라졌을 거다.

그 사실을 전하고 싶어서 입을 열기를 시도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잔뜩 억눌린 끽 소리가 나왔다. 답답해서 가슴을 두드리자 부드러운 깃털이 목을 간지럽혔다. 속절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험프리스 교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에드워즈와 잘 말해 보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이나 멀뚱멀뚱 깜빡이던 제이든은 험프리스 교수가 명백히 쫓아내는 듯한 손짓을 보인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을 나서는 커다란 등짝을 은근슬쩍 쫓다가 뒷덜미를 잡혔다.

“아직 글자먹이 스물네 마리에 대한 해명은 듣지 못한 것으로 아는데.”

뒷덜미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최대한 순진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부리로는 연기할 수 있는 범위가 너무 좁았다.

***

신문부가 수확의 달 연회 기간에 내놓을 <피츠시몬스의 사랑과 전쟁> 전시물을 모조리 망쳐 버린 죄로(만세!), 나는 수업과 수업 사이 쉬는 시간마다 아카데미를 배회하며 쓰레기를 줍게 되었다.

결계술 교실을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쇠 집게와 어깨끈 달린 쓰레기통이 날아왔다. 그것들은 내 손바닥과 등에 착 달라붙어 아무리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았다. 똑같은 짓이 벌써 세 번이었으므로, 금방 체념하고 그늘 속으로 숨어 들어간 초콜릿 껍데기를 주워 담기나 했다.

“잘 어울리는데, 아-리-엘.”

쓰레기통을 등에 진 채 비참하게 허리를 숙인 나의 처지가 브라이스 나돈의 마음에 쏙 들었나 보았다. 주머니를 꼼꼼하게 뒤져 찾아낸 먼지며 실밥을 바닥에 뿌리면서 형제를 따라하는 모습이 엄청나게 얄미웠다.

나는 화가 난 나머지 흥분한 수소처럼 그를 들이받느라고 기껏 모은 초콜릿 껍데기를 죄다 흘려 버렸다. 가볍게 발을 옮겨 내 돌진을 피한 나돈이 비웃음과 함께 사라지자 지극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일부러 인적이 뜸한 곳을 골라 다녔다. 원래 북적이는 장소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었다. 쓰레기에 감싸인 와중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었다. 이 꼬락서니로는 죽어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목록이 제법 길었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학생들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바닥만 봤다. 덕분에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의 구두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남자애들의 대부분이 구두코와 구두 몸체가 직선으로 이어진 구두를 신었다. 구두끈은 일자로 촘촘하게 묶여 있었고, 매듭은 안쪽으로 숨겼다. 가죽의 색상이나 질감이 다를 뿐 거의 동일한 생김새였다. 마르퀴즈 볼턴이 어디서 비슷한 걸 신었나 보았다.

여자 구두는 남자 구두만큼 천편일률적이지는 않았다. 크게 두 갈래로 나뉘기는 했으나 사소한 부분에서는 개성이 드러났다. 내가 판단하기로 영향받을 대상이 둘이어서 그런 거 같았다. 아나이스 오브라이언과 로즈마리 블로썸.

머리 모양은 바뀌었을지언정 의복을 고르는 아나이스의 취향은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우아한 디자인을 선호했다. 아나이스의 구두코는 뾰족했으며 추가적인 요소 없이 간결한 실루엣만으로 맵시를 냈다.

블로썸은 둥근 코에 화려하게 장식된 구두를 신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식은 보존 주문이 걸린 생화였다. 앙증맞은 리본 가운데 피어난 잔꽃은 로즈마리 블로썸의 상징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구두처럼 말이다.

“달튼.”

다른 구두들처럼 금방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시야에 머무는 구두에 이상함을 느낄 쯤에 달짝지근한 목소리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깊은 제비꽃색 눈동자가 거기에 있었다.

“잘 지냈어?”

블로썸은 너무 예뻐서 그런가, 가끔 비현실적으로 보일 때가 있었다. 혹은 그녀가 항상 시선을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두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카일은 블로썸이 우리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말했다. 외모나 출신 같은 부분에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르다고. 카일이 시스템이나 게임에 대해 말할 때에 나는 그것을 삼 할 정도만 이해할 수 있었지만, 블로썸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만큼은 어쩐지 알 것도 같았다.

“어? 어… 잘 지냈지, 뭐….”

“그렇게 경계하지 마…. 나는 널 죽이지 못해.”

‘지금은.’ 블로썸이 속삭이듯 덧붙였다. 나는 머리털이 솟는 기분에 마른침을 삼켰다. 내 버그를 잡았다는 카일의 거짓말은 이미 들통이 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로썸이 나를 가만히 둔 까닭은 ‘지금’ 죽일 수가 없어서였고.

“시스템이 너무 불안정하대. 자칫하다간 아예 망가질 수도 있다고 해서, 더는 타격을 줄 만한 짓은 하지 않으려고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올해는 진엔딩을 봐야 하거든.”

다양한 의문이 들었다. 첫째로, 누군가에게 들은 내용을 전달하는 듯한 태도가 신경이 쓰였다. 내가 알기로 피츠시몬스에서 시스템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은 카일뿐이었는데, 그는 시스템을 망가뜨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었으므로 블로썸에게 반대의 조언을 할 리가 없었다.

둘째, 블로썸은 여태껏 무수히 시간을 돌려 왔다. 이번에 실패한다고 해도 다음에 다시 시도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굳이 올해 진엔딩을 봐야 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셋째, 그걸 나한테 말해 주는 이유는 또 뭐고?

“왜?”

도무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여러 가지 의미의 ‘왜’였다. 블로썸은 대꾸하지 않고 한 손으로 스스로의 볼을 감쌌다. 고개를 약간 기울이자 섬찟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봐, 블로썸.’ 나는 최대한 간절하게 말했다. 일말의 진정성이나마 닿기를 기대하면서.

“너라고 해서 영원히 같은 짓을 반복하는 게 즐겁지만은 않을 거 아냐. 내가 네 목적을 알게 되면, 너를 도울 수도….”

“있잖아, 달튼…. 나를 방해하지나 말아 줄래? 네 캐릭터는 그게 아니잖아….”

로즈마리 블로썸이 어떤 협력이나 도움을 바라고 나를 찾아왔을지도 모른다고 느낀 건 어쩌면 멍청한 데다 자기본위적인 착각이었나 보았다. 마침내 그녀가 입에 담은 것은 내가 바라지 않았을뿐더러 질색하는 단어였다.

“‘캐릭터’라고 하지 마. 우리는….”

내가 궁금증만큼 참지 못하는 게 있다면 그건 짜증이었다. 혓바닥에 가시를 박고 받아치려던 찰나였다. 블로썸의 말투가 일변했다.

“너, 희가,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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