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90화 (90/178)

90화

간만에 여학생 살롱의 정기 모임이 있었다. 나는 문간에 기대 다리를 길게 뻗은 채 그걸 넘어오는 켈리와 리즈에게 구운 칠면조 맛 팝콘 한 봉지씩을 수거했다. 9월 피츠시몬스 매점의 최고 인기 품목인 구운 칠면조 맛 팝콘은 이번 모임의 참여자들이 필수적으로 지참해야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팝콘 봉지를 건네는 아나이스의 꽁무니에 불청객이 달라붙어 있었다.

“쟤는 뭐야?”

마법 약을 만들 때 쓰는 휴대용 무쇠솥에 팝콘을 붓던 브리아나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무례하구나!”

아나이스의 룸메이트이자 소꿉친구이자 시녀이기도 한 재클린 포크너가 고개를 치켜들고 땍땍거렸다.

“안나가 너희 때문에 또 이상한 사상에 물들지도 모르니까 감시하러 온 거라고!”

“재키는 내 머리카락을 손질할 수 없게 되어서 많이 상심했어. 미안한데 오늘만 끼워 주면 안 될까?”

“회비만 제출한다면야, 뭐.”

아나이스가 내게 쥐여 준 팝콘은 두 봉지였다. 나는 고개를 까딱여 아나이스와 포크너를 안내했다. 브리아나가 눈을 부라리며 험악하게 말했다.

“우리 대장이 넘어간다니까 봐주는 줄 알아.”

“산적이야, 뭐야.”

켈리가 웃겨서 뒤집어지다 말고 포크너의 품에 안긴 베개 두 덩이를 봤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브리아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결혼식 날까지 식단을 조절하겠다더니 팝콘을 조지는 데 여념이 없는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세게 두드렸다. 팝콘이 건강 간식으로서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구운 칠면조 양념과 뒤섞이지 않았을 때일 터인데, 아마도 모르거나 모르는 척을 하는 거 같았다.

포크너를 제외한 모두의 시선을 동시에 받은 아나이스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아가씨가 꾸민 무시무시한 계획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포크너는 신기하다는 듯이 주변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브리아나의 침대맡에 경건히 모셔진 <니베이아 모험기 : 밀루아의 역사적 미남들>을 발견했을 때에, 포크너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비명을 질렀다. 일레스티아에서는 <니베이아 모험기 : 일레스티아의 역사적 미남들>만 구할 수가 있어서, 나돈의 <미남들>은 어떻게든 손에 넣었지만 밀루아의 <미남들>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야, 나돈의 <미남들>은 어디서 구했어? 그거 절판이라고 들었는데!”

그러면 이제 브리아나도 어깨를 들썩여야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서로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이 의기투합한 틈을 타서, 켈리와 엘리자베스는 베개를 가지러 방으로 갔다. 아나이스는 내 옆으로 와서는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나는 남자애가 아니었지만 걔의 짧은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가 꽤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검술 수업은 할 만해?”

“음, 재미있긴 한데, 힘들기도 해…. 이럴 줄 알았으면 저학년 수업을 들을 걸 그랬어.”

‘켄드라가 있어서 다행이지 뭐야.’ 아나이스가 속삭였다. 나는 깜짝 놀라서 팝콘 서너 알을 떨어뜨렸다가, 청결에 예민한 룸메이트의 눈총을 받기 전에 주워 먹었다.

“바닥에 떨어진 음식은 3초 안에 먹으면 깨끗하대. 그나저나, 켄드라? 내가 아는 켄드라 브래들리? 걔 검술 또 들어?”

1학기에 이미 고학년 검술을 수강했으므로, 켄드라 브래들리의 2학기 시간표에 검술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나보다 훨씬 강했던 것이다. 목검으로 무어 교수의 엉덩이라도 찌르지 않고서야 NP를 받았을 리는 없는데. 의문스러워서 고개를 기울이자 아나이스는 검지와 중지를 입술에 대고 우아하게 키득거렸다.

“아니이. 주말마다 걔한테 과외 받고 있거든….”

“켄드라가? 걔 사전에 득 없는 노동은 없을 텐데.”

“11월에 있을 학생회장 선거를 돕기로 했어.”

학생회장 자리에 많은 것을 걸고 있는 켄드라 브래들리의 입장에서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은 놓치기엔 아까운 패였다. 물론 어마어마한 규모의 추종자 무리도 무시할 수 없겠으나, 그보다는 그녀만이 가진 독특한 카리스마 때문일 것이었다.

피츠시몬스의 여왕이라 불리던 여자애답게, 아나이스에게는 범인이 차마 흉내내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다. 선거 도우미에서, 나아가 학생회의 일원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아나이스는 켄드라가 5학년일 때에도 피츠시몬스의 5학년으로 있을 예정이었으므로-주말을 투자할 가치는 충분히 존재할 거였다. 알 만하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도 조만간 부탁하겠다고 하던데.”

“나? 왜?”

나는 추종자가 있는 것도,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유급해서 내년에 5학년인 것도 아니었다. 지금 나에게 있는 건 불명예뿐이었기 때문에, 나를 그녀의 천막에 세운다고 해서 켄드라의 전투가 쉬워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했더니 아나이스는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가지런한 눈썹이 확 일그러졌다.

“하지만 나는 네 추종자인걸.”

“뭐? 안나! 무슨 소리야!”

아나이스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러자 한참 대륙의 역사에서 미남이 가지는 가치에 대해 떠들던 포크너가 용케도 듣고 끼어들었다. 안색이 여간 새파란 게 아니었다.

하기는 만일 아나이스가 나를 따른다면 포크너는 아나이스가 따르는 나를 따라야 했으므로, 영 달갑지가 않을 거였다. 나는 일부러 시끄럽게 웃었다.

“그렇대, 포크너. 내일부터 내가 신문부실에 뿔메뚜기를 푸는 걸 돕도록 해.”

“제발, 안나! 나는 그 저주받은 곤충 근처에도 못 간다고!”

“재키를 놀리지 말아 줘….”

웃음을 참으며 말리는 시늉이나 하는 아나이스의 팔뚝에 포크너가 득달같이 매달렸다.

“그리고 쟤 머리카락은 완전히 빗자루란 말이야!”

그녀의 절박한 검지는 나를 똑바로 가리키고 있었다. ‘야!’ 나는 내 머릿결이 비단결이라고 느낀 적은 없지만 빗자루라고 느낀 적도 없었다. 참을 수 없는 인신공격에 들고 있던 베개를 내던졌다.

베고니아 꽃이 수놓인 내 베개는 포크너의 안면에 정확히 명중했다. 찰나의 정적 끝에, 포크너는 씩씩거리며 양손에 베개를 하나씩 쥐었다. 그녀가 팔을 마구 휘두르자 베갯속의 일부가 빠져나와 공기 중을 부유했다. 웃느라고 커다랗게 벌어진 내 입에 자꾸만 동물의 털 같은 것들이 들어왔다.

베개가 된 기분을 실감하며 베갯속을 뱉어 내는 동안 켈리와 리즈가 베개를 안고 도착했다. 걔들은 우리가 먼저 베개 싸움을 시작한 줄 알았나 보았다. 아나이스는 깔깔거리다 말고 베개를 맞았다. 브리는 밀루아의 역사적 미남들을 지키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동그랗게 말린 등을 리즈가 베개로 무자비하게 난도질했다.

***

난나 교수는 오염 덩어리-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엘프로서 다양한 문제를 떠안고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을 병든 닭마냥 졸게 만든다는 거였다.

비단 그녀가 가르치는 과목이 지독하게 지루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슷하게 지루한 마과학을 생각해 보면, 마과학 교실에서 숙면을 취하는 건 나뿐이었다. 즉 거기엔 첫사랑 썰 하나 없이 죽어라고 진도만 나간 휴스턴 교수의 잘못도 있었지만 내 잘못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고대 마법과 신화 같은 경우 내 잘못이 없지는 않았지만 크지도 않았다. 낡은 보호복의 음성 전달 장치 탓인지, 난나 교수가 교단에 서서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면 견딜 수 있는 인간이나 드워프는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험프리스 교수가 보낸 마법 인형이 교실 뒷문을 밀고 들어와 내 망토를 쥐었을 때, 나는 부러움의 눈길을 한 몸에 받으며 일말의 승리감에 전율했다.

“교수님께서 왜 너를 부르시는 거야?”

제이든이 미간을 찌푸리고 나와 마법 인형을 번갈아 봤다. 그는 험프리스 교수와 내가 빚는 갈등 상황에서 나를 염려하는 유일한 친구였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띠고 제이든의 너른 어깨를 두드렸다.

“병적인 거짓말쟁이가 병증이 도졌나 보지. 걱정하지 마.”

라고 말하긴 했지만 크리스타 에드워즈에게는 사실 나를 고발할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진짜로 신문부실에 벌레를 풀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재클린 포크너가 질겁하던 ‘저주받은 곤충’은 아니었다. 나는 몇 번이나 공동욕실에 컵을 들고 들어갔지만 뿔메뚜기를 포획하는 데 실패했다. 대신 턱끝에 달린 대롱으로 종이 위의 잉크를 빨아먹는 습성을 지닌 글자먹이 열두 쌍을 은밀하게 손에 넣었다.

글자먹이는 말 그대로 글자를 먹는 벌레로, 지나간 자리에 글자가 남지 않는다고 하여 ‘지우개벌레’라고도 불리었다. 얼마나 깔끔하게 지워 내는지 수정액 대신에 글자먹이를 사용하는 학생들도 있을 정도였다(단 특별히 훈련된 글자먹이가 아니고서야 대롱에 닿는 잉크를 죄다 빨아들일 것이었으므로, 순식간에 비어 버린 필기 공책에 땅을 치고 후회할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글자먹이를 신문부실에 들여보낸 이유는 하나였다. 크리스타 에드워즈의 빌어먹을 신문들을 전부 백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바람과는 달리, 피츠시몬스의 악마와 피츠시몬스의 매춘부 간 미스터리한 관계를 다룬 소설은 에드워즈의 손에서 차베즈의 손으로, 차베즈의 손에서 모두의 손으로 무사히 전해졌다.

마침 나의 벌레 친구들이 구실을 하기는 했는지가 궁금한 와중이었다. 근데 아무래도 징계 담당 교수에게 득달같이 달려갈 만큼은 에드워즈를 열받게 했나 보았다. 되게 만족스러웠다.

콧노래를 부르며 가방을 챙겼다. 에드워즈가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어서 보고 싶어서 참기가 힘들었다. 오래된 마법진의 구성이 미적으로 얼마나 완벽한지 열변을 토하는 난나 교수와 꾸벅거리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교실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또 다른 마법 인형이 등장했다. 나를 데리러 온 인형처럼 마탑을 상징하는 문양을 머리통에 새긴 그것은 이번에 제이든의 망토를 잡아당겼다.

“제이든? 너 뭐 사고 쳤어?”

내가 봤을 때 징계 담당인 험프리스 교수가 제이든 스펜서같이 착한 애를 부를 일은 전무했다. 그래서 물었더니, 제이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짚이는 구석이 없는 모양이었다.

“가 보면 알겠지.”

어쨌든 우리는 둘 다 난나 교수의 음성 전달 장치가 목소리 말고 수면 가루를 뱉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던 와중이었으므로, 기꺼이 마법 인형을 따라 험프리스 교수의 사무실로 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