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뛰어서 기숙사까지 갔다. 고대 마법과 신화 수업은 결석하기로 했다. 피츠시몬스 내 유일한 엘프인 난나 교수는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인지 학생들의 소소한 비행에 관대했다. 그녀가 엄격해지는 순간은 학생들이 자신의 보호복에 손을 대려고 할 때뿐이었다(난나 교수에 따르면 엘프를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마기로 가득한 오염 덩어리였고 그녀가 피츠시몬스의 교수직을 수락한 이유는 오로지 하등 생물을 계몽하기 위해서였다.).
낡은 나무 문짝을 열어젖히자, 아마도 하품 나오게 기다란 공용어 단어들을 수첩에 옮겨 적는 중이던 브리아나 모슬리가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세상에, 아리엘!’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내 볼을 콱 붙잡았다.
“왜 울어, 예쁜아!”
그제야 나는 내가 미련스레 질질 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탕나무에서 떨어졌을 때도, 카일과 다투었을 때도, 인생 첫 번째 실연에도, 하다못해 내가 배경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도 이만큼 슬프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아마도 나는 스스로가 짐작한 만큼보다 훨씬 켈란을 좋아했나 보았다.
내가 대답 없이 엉엉 울기나 하자 상냥하고 마음 약한 브리아나는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가 말했다.
“혹시 우리 황태자 전하가 너에게 심하게 굴기라도 했니?”
훌쩍거리는 와중에도 화가 단단히 난 말투였다.
브라이스 나돈도 그렇고, 마르퀴즈 볼턴도 그렇고, 내가 켈란을 신경 쓰는 걸 대체 어떻게 아는지 궁금했다. 이마에 ‘사랑해요 켈란 일레스티아’라고 쓰여 있기라도 하나 싶어서 물어봤더니, 상냥하고 마음 약하지만 동시에 가차 없기도 한 브리아나는 ‘사랑’까지는 써 놓은 거 같다고 그랬다.
“너 걔랑 ‘독서 모임’ 갖는 날에만 입술에 뭐 바르잖아.”
브리아나가 손가락을 구부려 ‘독서 모임’을 강조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너무 놀라고 부끄러운 나머지 눈물이 쏙 들어갔다.
“식당에서 걔 보이면 갑자기 머리 묶는 척하고. 완전 티 났어.”
“머리 묶은 건, 그냥, 뭐 먹을 때 불편하니까….”
“거짓말 마. <이 달의 피니건>에서 그거 보고 나서 그렇게 된 거면서. 뭐더라, ‘여자가 예뻐 보이는 순간들’이었나.”
“‘여자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이거든.”
피츠시몬스 남학생 2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 따르면 여자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순간 1위는 목덜미가 보이게끔 머리를 묶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였다. 암만 천방지축 거지꼴을 하고 있어도, 높게 쥔 머리채 사이로 목덜미가 보일 듯 말 듯 스치는 찰나만은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느껴진다나 뭐라나.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써 먹어야지 싶기도 했다. 샐러맨더의 무지개 비늘에 맹세코 이미 써 먹고 있었는 줄은 몰랐다. 브리까지 눈치를 챌 정도로 난리를 피웠단 걸 알았더라면 진작에 그만뒀을 거였다. 쪽팔려서.
“내가, 내가 진짜 그랬어?”
“몰랐어? 빌라드가 너 그럴 때마다 입맛 떨어져가지고 음식 다 남기는데.”
아, 카일. 가엾은 내 소꿉친구. 나는 타오르고 있는 게 분명한 얼굴을 이불 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그가 나더러 켈란을 사랑하지 말아 달라고 한 것은 내 마음을 꿰고 있어서였나 보았다. 미안해서 속이 막 아팠다. 나 때문에 이빨도 뽑아낸 애가 당부한 딱 하나도 못 지켜서. 앞으로도 못 지킬 거 같아서.
“야아, 울지 마아. 솔직히 우리 전하가 미친 듯이 잘생겼고, 신사적이고, 암튼 대단하긴 해도 대륙에 남자는 많다구.”
내 등을 두들기는 브리의 말은 구구절절 맞았다. 켈란만큼 잘생긴 남자는 없어도 잘생긴 남자는 세상에 차고 넘쳤다. <니베이아 모험기 : 밀루아의 역사적 미남들>만 해도 얼마나 두껍던가!
또 걔들 중에서 몇몇은 머리를 묶지 않는 나에게도 매력을 느꼈고, 나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고 싶어 했다. 적어도 카일과, 아마도 에드가는 그랬다.
“걔들은 켈란이 아니잖아….”
하지만 카일도, 에드가도 켈란 일레스티아가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도 우아하고, 지겨워서 죽고 싶은 사람처럼 웃어도 무슨 신 같고, 포크에 파스타 면을 돌돌 감는 동작마저 멋들어진 남자애가 아니었던 것이다.
복잡한 머릿속에 온통 켈란이 소용돌이쳤다. 아기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연단에 섰던 입학생 대표 켈란. 마담 바틀렛을 능숙하게 에스코트하던 켈란. 산수유나무와 자작나무, 동백나무에 둘러싸여 누군가를 기다리던 켈란. 그는 눈물을 흘리며 내게 용서를 구하던 켈란과 아주 닮아 있었다.
그리고 안경이 엄청 잘 어울리고 키스를 엄청 잘하는 켈란. 나는 베개를 꼭 껴안아 베고니아 꽃 위로 입술을 눌렀다. 첫 키스였는데. 감자 맛도 안 났는데. 실은 엄청 좋았는데.
내가 침대에 엎드린 채로 마구 발버둥을 치자 브리아나는 어쩔 줄을 모르겠는지 가만히 있었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내 손아귀에 쿠키를 쥐여 주면서, 제과제빵부 애들이 일랑 풀 사건으로 징계를 받기 전에 챙겨 두었다고 속닥댔다. 교칙 위반인 건 알지만 먹으면 무지하게 행복해진다나.
나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고 싶어 한 에드가 라모스가 먹지 말라고 했던 ‘마약 쿠키’를 앞니로 조금 갉았다. 되게 짜고 축축해서 행복은커녕 우울감만 커졌다.
***
갑자기 열이 끓었다. ‘마약 쿠키’ 때문은 결코 아니었고 인생 두 번째의 상사병인 거 같았다. 어떻게 알았냐면, 침대에 매달린 환자 상태 기록용 화상기에 그렇게 쓰여 있어서 알았다. 저 네모난 마도구는 내 생각에 채프먼 교수보다 훨씬 진단을 잘했다.
몸이 좋지 않아서 양호실에 가 봐야 되겠다고 하자 알바라도 교수, 그러니까 켈리의 ‘폴라 이모’는 점술용 룬 카드 더미에서 용케도 ‘죽음’을 뽑아냈다.
그러고는 내 증상이 심각해질 거라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만일 그녀가 암암리에 판매하는 ‘건강을 기원하는 끈 팔찌’를 사지 않는다면 말이다! 대거리할 기운이 없어서 대충 손을 휘젓고 교실을 나섰다.
켈리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사기꾼인 게 틀림없는 알바라도 교수는 요번 악마 소동으로 꼼꼼히 그녀의 몫을 챙겼다. 부모에게 살려 달라는 편지를 쓰던 저학년 애들은 물론이요, 메이나드의 실감 나는 묘사에도 콧방귀나 끼던 고학년 애들까지 그녀의 구마 용품을 구매했다.
심지어는 스태포드 교수마저 잔뜩 멋 부린 로브 위로 평소에는 가까이도 않을 디자인의 악마 퇴치용 허리 장식 끈을 달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놀라운 사업 수완이었다. 스테판 커크패트릭은, 떠도는 소문대로 마력선 조종사가 꿈이고 개인 마력선의 장만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확실히 분발해야 되었다.
같은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듯이 하나의 피츠시몬스는 두 명의 사기꾼을 포용할 수 없었다. 조만간 피바람이 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상사병은 암만 심각해져 봐야 상사병이었다. ‘건강을 기원하는 끈 팔찌’를 안 사서 다행이었다. 무릎을 구부리고 몸을 동그랗게 만 채로 나의 병명과 눈싸움을 하다가 눈을 감은 찰나였다. 불현듯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아리, 어디 있어?”
그건 내 기분이 엿 같을 때마다 잘도 나타나 주는 헌신적인 소꿉친구의 목소리였다. 나는 재빨리 주먹을 쥐고 배나 다리를 막 때려 ‘상사병’이라는 글씨가 ‘타박상’과 ‘원인 불명의 정신 질환’에 밀려 사라지도록 했다. 그러고 나서 카일을 불렀다. 잠시 우당탕탕 소리가 난 다음에 내 침대를 가린 커튼이 젖혀졌다.
“어떻게 알고 왔어?”
“화장실 앞에서 라미레즈 만났어. 걔가 자기는 수업 들어야 된다고 나더러 가 보라던데? 언제부터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대?”
“점술 교수님을 무지하게 존경하거든.”
“아, 그 사기꾼? 어쩐지. 라미레즈가 이거 전해 달라더라.”
카일이 움켜쥐고 있던 것을 손바닥 위로 올려 내밀었다. 가느다란 끈 팔찌였다. 중간중간 기묘한 형태로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건강을 기원하는 팔찌네.”
실실 웃으며 팔찌를 집어 들었다. 팔찌의 이음새는 다른 부분보다 더욱 기묘하게 얽혀 있어서, 나는 그걸 붙잡고 한참 동안 끙끙거려야만 했다.
보다 못한 카일이 내게서 팔찌를 채 갔다. 밀루아 출신 5학년 중 유일한 탤론 시청 합격생답게, 카일은 이음새를 잠깐 보고 나서 복잡하게 얽힌 모양을 쉽게 풀어냈다. ‘와.’ 나는 솔직한 감탄사를 흘리며 손목을 들이댔다.
“어쩌라고?”
“채워 줘. 그거 하면서 은근슬쩍 손도 잡아 보고 그러면 너도 좋잖아.”
“이게 진짜.”
뻔뻔스레 요구하자 카일은 방금 전의 나처럼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얌전히 내 손목에다가 팔찌를 둘렀다. 푸는 방법과 묶는 방법이 많이 다른지, 아까와는 달리 오래도록 꼼지락거렸다. 어쩌면 은근슬쩍 손을 잡을 기회를 노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내가 켈란에게 팔찌를 채워 주는 입장이라면 그랬을 거 같았다.
나는 켈란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걸 알아도 걔의 손을 잡고 싶었다. 카일도 그럴까?
문득 궁금해져서 내가 먼저 그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머리와 꼬리가 완벽하게 이어진 알바라도 교수의 끈 팔찌가 달랑거리며 손목에 걸렸다. 그것을 푸는 방법과 묶는 방법은 사실 별반 다르지 않았나 보았다.
“다 해 놓고 왜 시간 때웠어?”
“너 진짜 싫어.”
카일이 내 손을 놓지 않은 채로 거짓말을 했다. 나를 엄청 좋아하는 주제에. 그래서 나는 아빠가 거래처 사람들과 종종 그러듯이 그와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하는 마냥 말이다. 입 밖으로 나온 것은 다른 말이었다.
“미안해.”
퍽 갑작스럽게 주워 삼킨 사과의 말에도 카일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그의 시선이 환자 상태 기록용 화상기에 닿았다. 19.8퍼센트의 타박상과 27.2퍼센트의 정신 질환을 제치고 51.5퍼센트의 상사병이 다시금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너 진짜 싫어.”
카일이 다시 말했다. 짜증이 강하게 실린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처럼 들리는 게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