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눈이 보이지 않게 되자 다른 감각이 예민해졌다. 나는 켈란의 대륙 공용어 억양이 다소 특별하고 꽤나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찾아냈다. 그의 어머니를 포함한 대부분의 일레스티아인들이 비슷한 억양을 사용했지만, 켈란의 것은 뭔가 달랐다.
슬쩍 안경을 벗었다. 켈란이 나를, 아니 내 눈 색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과는 별개로, 내 체온이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데 시각의 차단 여부가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켈란의 매력적인 공용어 억양이 귀에 담기자, 아리엘 달튼의 낭만적인 그림자는 머릿속에서 반나절 내내 상연되던 연극을 다시 무대에 올렸다. 극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누구보다 정숙한 숙녀를 위한 꿈 : 로즈마리 블로썸의 생일 연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온통 깜깜하다가 갑작스레 밝아지니 눈이 많이 부셨다. 켈란은 빛에 적응하기 위해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린 나를 보다가 슬쩍 웃었다. 손등에 턱을 대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별것 아닌 동작이 어쩜 저리 그럴싸할까 싶었다.
“…서, 어떻게 하고 싶어?”
“응?”
나는 빛에 적응한 직후 켈란의 잘생김에 적응하느라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멍청한 표정이나 짓고 있으려니 켈란이 친절하게도 다시 말해 주었다.
“월시를 어떻게 하고 싶냐고.”
켈란 일레스티아는 레이디 에드워즈나 험프리스 교수와 달리 내 주장의 대부분을 납득한 듯했다. 안 그래도 브리와 헤어진 이후로 월시가 만나는 사람마다 나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바람에 골치가 아픈 와중이었단다.
아카데미 교칙에 뒷담화를 금지한다고 쓰여 있지는 않았으나, 누가 누구를 죽인 다음에 사령술을 써서 조종하는 중이라고 떠들고 다니면 그건 금지해야만 했다. 살인도, 사령술도 아카데미의 교칙이 아니라 대륙법에 심각하게 위반되는 사항이었다.
애초에 사령술은 상당한 수준의 마법 이해와 마력, 마나량을 필요로 했다. 아리엘 달튼이 마법에 재능이 하나도 없다는 건 지나가는 위습도 알 텐데,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허풍을 떨어서 사령술사로 둔갑시킨 건지 감도 안 왔다.
게다가 브리아나 모슬리처럼 팔팔한 시체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내 생각에 시체는 성욕이 없어야 맞았다. 만일 걔가 시체라면 누구보다 정숙한 숙녀를 위한 꿈 인형이 내 베갯솜 아래 들어가는 일은 없었을 거였다. 나는 이를 갈며 대꾸했다.
“패 버리고 싶어. 험프리스 교수님이 내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환경에서, 딱 죽기 직전까지만.”
“수확의 달 연회 기간에 검술 대회가 열리지.”
수확의 달 연회는 테마가 ‘성장’이었다. 거의 2주에 달하는 연회 기간 동안 많은 학생들이 스스로의 성장을 증명하여 추가 학점을 따냈다.
방과 후 활동 부서에게 있어서는 활동비를 벌기 위한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연극부는 무대를 꾸리고, 수예부는 전시를 열었다. 그리폰 크리켓 부의 ‘펀칭 부스’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반면 나처럼 변두리에서 혼자 노는 애들은 아카데미 주최 검술 대회나 공용어 철자 말하기 대회, 혹은 시 낭송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검술 대회나 공용어 철자 말하기 대회는 항상 한가한 편이었다. 전자는 부상의 위험 때문이었고, 후자는 지독하게 지루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브리아나를 좋아했지만 암만 노력해도 걔처럼 쓸데없이 길고 어려운 단어들에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시 낭송 대회의 수상 여부는 오로지 얼마나 아름답고 우아하게 구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건 귀족들이 제일 자신 있어 하는 분야였다. 더구나 검술 대회처럼 몸을 쓸 필요도, 공용어 철자 말하기 대회처럼 머리를 쓸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검날보다 머릿결이 반질거리고 교재보다 잡지를 넘기길 선호하는 월시한테는 그야말로 제격이었다.
달튼의 말괄량이에게는 아름답고 우아하게 굴 자신이 없었으므로, 나는 이미 검술 대회에 참가 신청서를 넣은 참이었다.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월시를 패 버리는 상상을 해 봤다. 완전 짜릿했다.
문제는 월시를 거기까지 끌어낼 수 있냐였다. 그는 정부의 아들답게 어릴 적부터 내면보다 외면을 갈고닦아 왔다. 굳은살이 박인 페드로 캔트렐의 손이 얼마나 흉한지를 흉보았던 걸 떠올리면 아마 검을 휘두르기는커녕 쥐어 보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월시가 검술 대회에 참가할 리는 없었다.
“애덤 월시는 쪼그라든 거시기만큼 조그마한 심성의 소유자야. 검술 대회에 나올 리가 없잖아.”
내 말에 켈란이 눈꼬리를 곱게 접었다. 사뭇 여유로운 미소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특히 미소를 짓는 주체가 무소불위의 학생회장이라면 말이다. 나는 감동에 벅차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 걔를 내보내겠다고?”
“그리고 너랑 붙여 줄게. 그 정도면 충분하겠어?”
“충분하지! 맙소사, 켈란, 넌 최고야!”
“만족스럽다니 잘됐네.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해 볼까?”
이윽고 레이디 에드워즈의 바구니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내 이름과 ‘매춘부’가 같이 쓰인 플래카드를 켈란에게 보이자니 무지하게 민망했다. 남자애들하고 노닥거리는 듯이 보이는 그림들도 말이다. 내가 귓바퀴를 긁적이거나 말거나 켈란은 바구니 속 내용물을 넓게 늘어놓았다.
“이건 언제야?”
그는 우선 카일이 포함된 그림을 깃펜의 뒤꽁무니로 짚었다. 흰색과 갈색이 부드럽게 섞인 깃털이 카일의 빨간 머리통 위에서 문질러졌다.
“1학기 때야. 휴스턴 교수님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마과학을 끔찍하게 싫어해서 항상 졸았어. 카일은, 걔는 내 친구니까, 나를 숨겨 준 거고.”
“그럼 이건?”
“지난주. 네가 아는진 모르겠지만 네 부관은 놀렸을 때 정말로 반응이 좋아. 그런 애들이 있다니까. 장난꾸러기의 심장을 자극하는 애들.”
“이해했어. 이건? 네가 친한 쪽은 에드가인 걸로 아는데.”
두 가지가 놀라웠다. 첫째, 당연하지만 얘도 휴학 중인 쪽이 쌍둥이 중 동생이고 아카데미에 복귀한 쪽이 형이라는 걸 알고 있었구나. 둘째, 말투가 왜 이래? 무슨 바람피운 여친한테 따지는 마냥….
“근데 나 지금 취조받는 거야? 진짜로 매춘부인지 아닌지?”
내가 진짜 켈란의 여친이기라도 했으면 화라도 안 났다. 매우 불쾌해져서 미간에 힘을 팍 줬다. 그러자 켈란은 찰나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곤란스럽다는 듯이 눈썹뼈 근처를 문질렀다.
“미안해. 난 그냥….”
운을 떼고 나서는 한참 동안 침묵이었다. 이어붙일 단어들을 찾아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서도 느꼈지만 아무래도 일레스티아의 제왕학 교육 과정에 올바르게 사과하는 방법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하긴 케이틀린 대제는 남한테 사과할 필요 따위는 전무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었다. 레이디 에드워즈와 크리스타 에드워즈의 인성이 다르지 않듯 케이틀린 대제와 켈란의 삶도 비슷할 거였다.
“미안해.”
약간 지겹다고 느껴질 법한 시간이 흐른 뒤 켈란은 군더더기를 붙이지 않는 방향으로 사과를 마쳤다. 나는 한숨을 과장스럽게 내쉬고 ‘익명의 자작가 영애’와 제이든 스펜서의 다정한 장면을 담아낸 신문 기사를 가리켰다. 그리고 뻥을 쳤다. 떳떳하게.
“사과는 받아 줄게. 참고로 이건 나 아냐.”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과 적절한 거짓말로 곤경을 모면하고자 하는 나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사안인가 보았다. 켈란이 순식간에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공교롭게도 그 말은 믿을 수가 없네. 달튼의 하녀장으로부터 네가 수도를 여행 중이라는 이야기를 똑똑히 들었는데, 같은 기간에 제이든의 ‘여친’이 나타났다면 누군들 의심하지 않겠어?”
켈란의 말에는 끼어들 구석이 없었다. 나는 무덤 파는 꼴밖에 되지 않을 반론을 포기하고 화제를 바꿨다. 마침 궁금한 게 있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까 너, 달튼에는 왜 왔어?”
“잊어버렸어.”
켈란이 시원스레 대꾸했다. 얼마나 아무렇지 않은 태도였냐면, 우리가 진하게 입을 맞추고 나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무슨 저녁 메뉴 얘기를 하는 줄 알았다.
어안이 벙벙하여 잠깐 멍을 때리고 나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이어 물었다. 방학 첫날에 여자 기숙사와 광장, 그리고 공간 이동 마법진 앞에서 나를 찾았던 까닭은 또 무어냐고 말이다.
“그것도 잊어버렸어.”
“그럼, 그러면 전에 그건….”
“아리엘, 너도 알잖아… 내가 누구와 만나는지.”
얼버무리며 대답하는 켈란은 갑자기 엄청 피곤해 보였다. 구부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는 그의 시선이 어디라고 하기 애매한 곳을 향했다.
나는 버려진 골렘 빵 봉지처럼 얼굴을 확 구겼다가, 뭍에 내어 놓은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그다음에는 에드워즈의 인간성처럼 바싹 말라 버린 눈을 계속 깜빡였다. 스무 번 하고 열 번을 더 깜빡이고 나니까 물기가 생겼다. 아주 많이. 콧등은 고추냉이의 뿌리를 씹은 마냥 찡했고 목구멍과 볼에 홧홧한 기운이 올라왔다.
도대체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키스 한 번 했다고 일레스티아의 황태자비라도 된 줄 알았던 걸까? 정작 머핀을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말이다. 되게 창피했다. 연초에는 바보 취급이나 했던, 가면 쓴 황태자, 얼어붙은 학생회장의 구원자를 자처하는 무리와 내가 다를 게 없다고 느껴졌다.
아무튼 그를 녹일 수 있는 건 바라만 봐도 따스해지는 금발이었던 것이다. 칙칙한 갈색 머리가 아니라. 카일은 호두나무 줄기와 다람쥐 꼬리로 비유했지만 내가 봤을 때 내 머리색은 볼품없이 바스라진 낙엽에 가까웠다.
지금까지는, 솔직히, 나름의 근거 하에 정신 승리가 가능했다. 켈란은 ‘제4의 벽’ 때문에 고생했던 나처럼 시스템의 지배를 받는 중이었다. <패치 노트>나 ‘아리’에 대해 깡그리 잊긴 했으나 진심이라 할 수 없었으며, 지지부진한 호감도 상승 폭으로 그것이 증명되었던 것이다.
사랑의 묘약은, 비겁하고 불법적인 수단이기는 했으나 썼다는 확신이 없었다. 켈란이 블로썸에게 느끼는 감정은 보탤 것 없는 진심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나는 여태껏 거짓된 감정으로부터 켈란을 구해내는 역할에 심취해 있었던 게 아닐까.
차마 부정하기 어려운 진실의 쐐기가 나를 찔렀다. 면전에서 접한 거절은 북해에 이는 얼음 파도가 되어 나를 덮쳤다. 점차 달아오르는 눈시울과 반대로 머릿속은 차갑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비로소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져야 하는 유일한 의문은 시스템이 아니라 켈란이 스스로 심장에 매단 저울에 아리엘 달튼과 로즈마리 블로썸을 달았을 때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였다.
그리고 나는 방금 답을 들었다. 눈을 몇 번 더 깜빡였더니 금방 견딜 수 없게 되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켈란은 내게 어디 가냐거나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간단히 주문을 외워 학생회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잔인하고도 근사한 축객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