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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87화 (87/178)

87화

갑자기 일그러진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악마’는 흠칫 놀라더니 가락뼈 하나하나가 내 키만 한 날개를 활짝 펼쳤다.

잠시 뒤에 나는 흙에 반쯤 파묻혔고 ‘악마’는 달 근처에 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것이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검은 용은 놀라우리만큼 빠르게 날아 사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콧속을 파고드는 개미들을 떨쳐 낼 생각도 않고 멍하니 있었다.

꿈 많고 사랑도 많던 데뷔탕트 전후의 아리엘 달튼은 샌크릭에서 유통되는 로맨스 소설을 전부 탐독했다. 그래서 인외종과의 낭만에 대한 수요가 무의미한 수준이 아님을 이해하고 있었다. 흡혈귀라든가 늑대인간 같은, 비교적 인간에 가까운 종류에 한해서 말이다.

용은 달랐다. 용과의 낭만은 로맨스 소설에서는 금기였다. 낭만의 대상이 될 만큼 성장한 개체임을 가정했을 때 용이 인간에 비해 지나치게 크고 강한 탓이었다.

확실히, 자칫 포옹이라도 잘못했다가는 낭만이 아니라 서스펜스가 되고도 남는 상대가 용이었다. 암만 예쁜 단어들과 쥐어짜 낸 개연성으로 포장해도 안 팔릴 거였고. 남주와 여주의 포옹 장면 다음에 여주의 척추가 으스러지는 장면을 기대하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 세상에 딱 하나였다. 범죄와 폭력에 심취한 카일의 누이, 코넬리아 빌라드.

아무튼 그랬다. 전지전능한 로즈마리 블로썸이라도 용을 사랑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악마’, 즉 검은 용을 공략 대상으로 인식했다. 근래 카일이나 학생회 애들한테서 지겹게 봤던 효과들이 용에게도 적용이 되어서 알았다.

당최 어떻게 된 영문인지 감도 안 잡혔다. 나는 척추가 으스러지고 싶지 않았다. 만일 블로썸의 새로운 공략 대상이 진짜로 용이라면, 졸업이고 자시고가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

어쩌면 나를 대신해 ‘카일리’를 블로썸의 대항마로 내세우는 방법도 있었다. 걔의 인기가 너무 좋아서 카일은 방학 중에도 카일리를 흠모하는 익명의 학생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걔라면 용이 퍼붓는 사랑이 얼마나 강력하든 간에 견딜 수 있을지도 몰랐다.

***

꿈에서 나는 언젠가의 소파에 널브러진 채였다. 등받이에 눕듯이 기대니 엉덩이가 약간 떴다. 뱀처럼 감아 들어오는 팔이 내 몸을 받치는 감각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현실에서보다 꿈속에서 정신이 또렷한 것도 웃기긴 한데, 어쨌든, 그랬다.

코를 거의 마비시킬 듯이 진동하던 술 냄새 대신 켈란 일레스티아의 향이 가득했다. 그는 내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약하게 깨물리니 찌릿한 느낌이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내 심장 위쪽하고 머리 꼭대기에서 거미가 춤이라도 추고 있는 거 같았다.

깨문 자리서부터 훑어 올라가는 입술의 궤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켈란은 내 쇄골과 목과 턱에 계속해서 입 맞췄다. 커다란 손은 드레스의 넓게 파인 네크라인을 조금 잡아 내렸다. 갑자기 노출되는 바람에 움츠러든 어깨를 그가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무슨 신호를 보내는 마냥 말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등을 껴안았다. 그러자 켈란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더니 귓불에 키스했다. 내 선택이 옳았던 모양이었다. ‘입 벌려 줄래?’ 매끄럽기 그지없는 요청에 착하게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러자 나의 우아한 침입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였다. 내 손바닥에 닿는 켈란의 등은 단단한 데다가 뜨거웠다. 나는 한 손으로 그의 어깨뼈를, 다른 손으로 귀밑과 뒷목을 지분거렸다.

손날을 스치는 금실 같은 머리카락의 감촉이 너무 좋았다. 입 안이 더듬어지는 느낌하고, 장난스레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는 행위도 말이다. 몸의 굴곡을 따라 조금씩 아래로 미끄러지는 손길은 나를 자꾸만 킥킥거리게 만들었다.

“왜 웃어?”

켈란이 내 입술에 그의 입술을 딱 붙이고 물었다. 숨결과 목소리가 목구멍을 뱅글뱅글 돌았다.

“아… 좋아서.”

솔직하게 답하니 켈란은 고개를 비스듬히 들고 내려다봤다. 부드럽게 휘어진 금색 눈동자가 나를 고스란히 비추었다. 기절할 만큼 부끄러운 꼴로 기절할 만큼 부끄러운 말을 내뱉는 여자애를 말이다.

이윽고 시야가 천천히 기울었다. 어깨를 미는 힘이 그다지 크지 않았음에도 나는 완전히 무너졌다.

켈란이 내 허벅지를 누르던 엄지에 약간의 힘을 더하자 드레스의 옆트임이 넓어졌다. 노골적인 의도를 지녔으나 거북스럽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흥분이 고조되는 과정을 거쳐, 두 쌍의 다리가 소파 위에 교차하여 놓였다.

다음 순간 지독한 자극이 몰아쳤다. 나는 참고 있던 숨을 오래도록 뱉어 냈다. 고개가 절로 꺾이고, 또 허리가 비틀리고, 그러고 나서는….

내 방 침대에서 눈을 떴다.

“뭐야, 아리엘? 엄청 야한 꿈이라도 꿨나 보다?”

새침을 떼며 말하는 나의 룸메이트는 폭소를 가까스로 참는 표정이었다. 나는 잽싸게 침구를 뒤졌다. 베개 커버의 안쪽으로 울퉁불퉁한 감촉이 느껴졌다. 꺼내 보니 작은 짚 인형이었다. 얼기설기 엮인 몸통에 돌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오, 깜찍한 브리아나. 네 혓바닥이 보라색이던 시절이 무지하게 그리웠구나.”

“나는, 핫, 네가 너무, 아하하, 축 처져 있길래!”

“고오맙다.”

이를 갈며 짚 인형을 내던지자, 브리아나는 아예 그녀의 침대 위를 뒹굴면서 깔깔거렸다. 한참 난리를 피우다가 별안간 엄숙하게 한다는 말이, 아나이스가 내 걱정을 많이 했단다.

아나이스는 이 저주스러운 피츠시몬스에서 내게 호감을 가진 극히 일부에 속했다. 또한 나처럼 소문에 시달려 본 경험이 있었으므로, 내 마음을 깊이 헤아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걔는 주술사에게 도넬리 준남작 저주 패키지를 받으면서 ‘누구보다 정숙한 숙녀를 위한 꿈 인형’을 샀다.

지푸라기 사이에 박힌 두 개의 돌은 자세히 보니 각각 쇠뿔과 염소 뿔이었다. 숫소의 머리와 염소의 머리, 인간의 머리를 하나의 몸뚱어리에 달고 있는 색욕을 표현한 것 같았다.

“네 베개에 넣기 전에 몸소 시험해 봤는데, 와, 장난 아니게 화끈하던데! 너도 그랬니?”

“시끄러워.”

나는 이불을 이마까지 끌어 올려 못되고 사려 깊은 내 친구가 나를 보지 못하도록 했다. 달구어진 머릿속에 잡념이 휘몰아쳤다. 내가 켈란에게 끌리는 건 맞았지만, 그러니까, 걔한테 바라는 게 이런 거던가? 영혼의 교류나 애틋한 감정 없이 그저 원초적인….

다리를 꼬고 왼편으로 누우니까 거세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얼마나 세게 뛰었냐면 침대가 진동하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브리, 혹시 무슨 소리 들려?”

지레 찔려서 물었다. 그러자 브리아나는 ‘아니, 네 신음 소리 같은 건 이제 안 들려.’라고 받아쳤다. 수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글로윈 숲에서 몸 바쳐 구해 낸 크리스타 에드워즈는 예상과 달리 월요일에 발간되는 피츠시몬스 타임즈에 나의 기사를 싣지 않았다. 거기에 실린 것은 침입자의 비밀공작으로 인하여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비운의 열애설이었다.

브리는 스태포드 교수가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이상 성욕자를 만나는 건지 모르겠다고 시종일관 투덜거렸다. 두 사람에게는 성실한 범생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으므로 브리아나는 스태포드 교수를 꽤나 좋아했다.

처음에 나는 에드워즈에게 별안간 양심 비스름한 것이 생겨나서 가여운 아리엘 달튼을 기삿거리 삼지 않기로 다짐한 줄만 알았다. 걔에 대한 평가를 재고할 뻔했다는 거다. 방문 틈에서 부러진 마법 깃펜과 깨진 픽시 구슬의 보상 청구서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크리스타 에드워즈의 왼쪽 가슴은 아마도 텅 비어 있는 게 분명했고, 거기에 뭐가 있다면 그건 드와이어 교수보다 빽빽하게 털이 난 데다가 10년 절인 청어보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무언가일 것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았다. 레이디 에드워즈는 그녀의 기절한 딸을 들쳐 업고 나타난 것이 나라는 이유만으로-어쩌면 내가 재작년에 심심풀이로 들인 뿔메뚜기가 아직도 공동욕실에서 발견되는 중이고, 작년에 허접한 간이 공간 이동 마법진을 설치하여 로비를 불바다로 만든 전적이 있으며, 올해 그녀로 하여금 상당한 수의 사유서를 작성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수도 있었다-내게 흰 눈을 떴다.

그래서 레이디 에드워즈는 그녀가 가진 증거물들을 고스란히 학생회에 넘겼다. 나와 함께 소문의 주인공이 된 학생회 말이다.

그건 괘씸한 5학년 여자애에게 최악의 벌을 내리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켈란에게만은 그걸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학생회를 거칠 바엔 험프리스 교수에게 곧바로 전달해 달라고 거듭 부탁했더랬다. 고약한 레이디 에드워즈는 콧방귀조차 뀌질 않았지만.

짙은 패배감에 짓눌린 채 학생회실의 문을 열었다. 멀리서 손짓하는 켈란의 모습을 눈에 담자마자, 나는 카일이 남자애들하고 위험한 장난을 칠 때 쓰곤 하는 실명 안경을 꺼내 썼다. 이윽고 마법 문자가 꼼꼼히 새겨진 안경테에서 새까만 손이 튀어나와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벽을 더듬거리며 가는 동안 무릎을 두 번, 이마를 두 번 부딪쳤다. 우여곡절 끝에 학생회실의 끄트머리까지 도달하였을 때 켈란은 내 손목을 붙잡음으로써 그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나는 주춤주춤 의자를 찾아 앉은 다음에 기운찬 닭이 홰치듯 켈란의 손을 떨궈 냈다.

“그 재미있는 안경은 뭐야?”

“네 얼굴에 홀리지 않기 위한 장치야.”

혹은 내 얼굴이 터져 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한 장치였다. 간밤의 그렇고 그런 꿈으로 인해 켈란을 떠올리기만 해도 볼이 뜨거워졌던 탓이었다.

“아쉽네. 나는 네 눈 색을 꽤 좋아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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