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86화 (86/178)

86화

광장과 정문 사이에는 긴 산책로가 있었고, 산책로의 중간쯤에는 샛길이 나 있었는데, 거기를 구불구불 들어가면 저학년 마물학 수업을 듣다가 종종 들르게 되는 글로윈 숲이었다.

카일은 이번 ‘이벤트’의 무대가 글로윈 숲의 어느 공터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어금니를 뽑아냈다. 채프먼 교수의 치료술 실력을 고려하면 미끈거리거나, 이상한 소리가 나거나, 빛을 내뿜지 않는 어금니가 자라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불쌍한 내 친구가 음식을 씹지 못하고 삼키는 광경을 상상만 해도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반드시 성과를 내리라고 다짐하며 글로윈 숲으로 접어든 찰나였다.

눈앞이 번쩍인다 싶더니만 자그마한 구에 든 픽시들이 턱 아래로 돌진해 왔다. 이윽고 마법 잉크를 먹인 깃펜 서너 개가 나를 둘러싸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펜촉과 맞닿은 종이에 다양한 각도로 내 모습이 새겨지는 것이 보였다. 팔을 휘둘러 그것들을 전부 떨궈 내고 나니 반갑지 않은 얼굴이 나타났다.

“아리엘 미첼 달튼?”

“그 젠장맞을 미들네임 좀 빼 줄래?”

“오, 미안. 최근에 너무 인상 깊게 본 이름이라.”

가짜 언론인 크리스타 에드워즈의 ‘미안’은 내가 살면서 들었던 모든 ‘미안’을 통틀어 가장 건조했다. 나는 그녀가 쥐새끼처럼 어머니의 침대맡을 뒤져 바구니 속 플래카드를 확인하는 모습을 쉽게 떠올렸다.

“이거 꽤 청순하게 그려진 것 같은데 기념으로 간직할 생각 있니?”

에드워즈가 마법 깃펜들이 그려낸 내 초상화를 살피다가 한 장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들어 쭉 찢었다.

반으로 갈라진 갈색 머리 여자애가 소리가 나지 않는 비명을 내지르자 다른 갈색 머리 여자애들이 덜덜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미간과 입매에 힘을 주고 확실히 말했다.

“네가 주는 건 금이라도 안 받아.”

“저런, 다음 주에 네게 건넬 트로피를 금으로 제작했는데! 피츠시몬스 타임즈의 부흥을 위해 몸 사리지 않고 나서 준 미스 달튼의 공로를 치하하며!”

“하, 하. 진짜 웃기다.”

내 웃음소리 또한 에드워즈의 사과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하루의 마무리를 에드워즈와 하다니, 재수 한번 더럽게 없었다.

외투 주머니 속 손가락을 구부려 은밀하게 욕설을 날린 뒤 지나치려다, 문득 지극히 합당한 의문이 들어 멈춰 섰다.

아리엘 달튼은 험프리스 교수와 휴스턴 교수가 보증하는 말썽쟁이였다. 통금이 지난 시간에 내가 기숙사가 아닌 어딘가에서 발견된다고 해서 의아하게 여길 사람은 단연컨대 아무도 없었다.

크리스타 에드워즈는 달랐다. 더구나 얘는 여자 기숙사 사감을 어머니로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말하자 에드워즈가 허공에 둥둥 띄운 깃펜들을 턱짓하며 대꾸했다. 웬 사명이라도 띤 듯이 결연한 말투였다.

“가십거리나 팔아서 연명하는 짓거리엔 질렸거든. 나는 대어를 잡아 진정한 특종 전문 기자로 거듭날 거야.”

“대어?”

“악마 말이야. 악마. 메이나드가 너한테는 말 안 해 주던?”

로즈마리 블로썸의 가장 친한 친구인 미케일라 메이나드는 정말로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그녀가 악마와 만났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안달 나 있었다.

걔가 나를 요만큼이라도 덜 싫어했다면 내게도 그녀의 생생한 모험담이 전달되었을 거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서, 나는 고대 마법과 신화 수업 내내 블로썸에게 호들갑을 떨어 대는 메이나드를 곁눈질해야만 했다.

에드워즈는 벽에도 귀를 달고 있는 애였다(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그녀는 2학년 2학기, 3학년 1학기, 그리고 4학년 1학기에 몇몇 복도에 도청 마법을 사용한 혐의로 징계를 받았다.). 얘라고 해서 메이나드와 내 사이가 어떤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여간 얄밉게 구는 솜씨 하나만은 일품이었다. 슬쩍 눈을 흘겼더니 에드워즈가 비뚜름한 미소로 화답했다.

“맙소사, 내 정신 봐. 메이나드는 네 연적인 블로썸의 절친이지.”

크리스타 에드워즈와 열 마디 이상 섞는 것은 시간을 코 푼 휴지만도 못하게 다루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지금이야말로 그녀가 내 완벽한 밤 산책에 끼어들 여지를 없앨 때임이 분명했다. ‘말을 말자.’ 손사래를 치며 에드워즈를 지나쳤다.

픽시 구슬과 마법 깃펜의 배치를 고심해서 바꾸는 에드워즈를 떠나 얼마나 걸었을까, 어디선가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왔다!”

에드워즈가 환희에 차서 커다랗게 외쳤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조심스레 다루던 취재 장비들을 무턱대고 끌어안은 채, 그녀는 말릴 겨를도 없이 뛰쳐나갔다.

“야! 에드워즈!”

멀어지는 등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방금 들린 게 ‘악마’의 소리임은 확신하기 어려웠으나 소리를 낸 존재가 에드워즈의 바람대로 얌전히 취재에 응해 줄 리가 만무하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의 울부짖음은 너무나 섬뜩하고 또 강렬해서 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나는 크리스타 에드워즈를 지독히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죽거나 다치길 원하지는 않았다. 그것도 내가 보는 앞에서!

***

에드워즈는 결코 몸을 쓰는 게 익숙한 애가 아니었다. 뛰는 자세부터 영 어설픈 것을 보면 알 만했다. 따라잡기 어렵지 않을 거라고 판단해서 마음을 느긋하게 먹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나의 체력 수치와 지력 수치가 각각 하늘과 땅에 붙은 것을 고려하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밤의 숲은 미궁 그 자체였다. 잠 없는 새들이나 일부 마물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정말로 모든 방향에서 울렸다. 또한 빽빽하게 자란 나무의 생김새나 색깔, 코끝을 스치는 흙과 송진의 냄새가 다 너무 비슷했던 것이다.

대충 달이 보이는 위치를 기준으로 뛰다 보니 마침내는 방금 어디서 들어와서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는 휘청거리며 달리는 에드워즈를 순식간에 놓쳐 버렸다.

초조함에 달음박질이 거세어졌다. 전력질주를 하다가 에드워즈의 흔적을 찾아 두리번거리기를 반복하다 보니 호흡이 턱 끝에 닿았다.

이대로라면 에드워즈를 돕기는커녕 미아가 되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에 멈춰 섰다. 손으로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는데 길고 또 쇳소리가 나는 비명이 귀를 찔렀다. 욕과 침을 한꺼번에 뱉어 내고 다시 종아리에 힘을 넣었다.

비명의 근원지는 다행히 멀지 않았다. 거의 똑같이 생긴 갈림길을 너덧 번쯤 지났을 때 탁 트인 공터가 나를 맞았다. 혼비백산 도망치는 픽시 구슬과 반토막 난 깃펜, 바닥에 널브러진 크리스타 에드워즈도 함께였다. 가슴 부근이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기절한 모양이었다.

에드워즈의 상태를 빠르게 살핀 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보는 생명체와 대치했다. 빛이 전혀 들지 않아 나무와 나무가 아닌 것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곳에 한 쌍의 눈이 있었다.

동공은 좁으면서 세로로 길었다. 눈꺼풀은 대부분의 포유류처럼 눈을 위아래에서 덮는 형태로 하나, 반투명하게 양쪽에서 안구를 덮는 형태로 하나가 있었는데, 시간차를 두고 깜빡여 나로 하여금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되새기도록 했다. 에드워즈를 기절시킨 ‘악마’가 틀림이 없었다.

극도로 느리고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에드워즈에게 다가갔다. 메이나드가 악마가 나타난 순간의 공포를 호들갑스럽게 묘사할 때 나는 그녀를 반도 믿지 않았지만, 실제로 마주하게 되니 어깨가 절로 떨렸다.

내가 움직이는 만큼 ‘악마’도 움직였다. 밤하늘보다 더욱 검은색에, 매끄럽게 광이 도는 비늘이 돋아난 팔과 다리가 달 아래 서서히 드러났다. 튜닉 비슷한 것을 걸친 몸통과 얼굴은 까맣다 뿐이지 부드러운 살결로 덮여 있어서, 내가 막연히 상상하던 악마보다 훨씬 인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저기.”

인간과 너무 닮은 탓인지, 무심코 의사소통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픽시의 날갯짓보다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음에도, ‘악마’는 꼬리를 슬쩍 휘둘러 반응했다. 메이나드의 말마따나 흙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얘만 좀 데리고 가면 안 될까?”

만일 ‘악마’가 스펜서 저택에서 나를 구했던 걔가 맞다면 내 부탁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었다. 내 기억에 걔한테는 인간을 죽이거나 먹고자 하는 욕망이 없어 보였다. 나는 ‘악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몸을 낮춰 에드워즈를 짚었다.

“악!”

비굴한 웃음 혹은 우스꽝스럽게 엎드린 자세가 ‘악마’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았다. 청색이 희미하게 도는 입술 사이로 얼핏 뾰족한 게 보인다고 느꼈을 때 내 등은 이미 아무렇게나 자란 풀들을 짓누르는 중이었다.

거친 감촉이 쇄골 근처에 내려앉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비늘로 감싸인 인간의 손에 가까웠던 ‘악마’의 손은 이제 완전히 괴물의 발처럼 바뀌어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목 아래쪽과 가슴 위쪽을 얕게 찔렀다.

통증은 크지 않았으나 두려움은 컸다. 마찬가지로 무슨 바실리스크나 아니면 레비아탄처럼 변해 버린 머리통이 문자 그대로 코앞에 있었던 것이다. 아가리가 어찌나 거대한지 송곳니가 주먹만 했다.

‘악마’가 내 이마에 대고 울부짖자 머리카락이 마구 헝클어졌다. 공포로 몸이 굳어서 미처 고개를 돌리지 못한 탓에, 나는 뚝뚝 흐르는 그것의 침으로 얼굴을 고스란히 적셔야만 했다.

공포보다 불쾌감이 커지고 나니까 약간의 용기가 샘솟았다. 나는 티 안 나게 손가락을 구부려 내가 아는 유일한 공격 마법을 시전했다. 웅얼웅얼 주문을 외우니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불씨가 내 바지를 조금 태우고 나서 굵직한 꼬리를 덮쳤다. 그러자 ‘악마’는 나를 압박하던 발톱을 거두고 꼬리로 바닥을 짜증스레 쳤다.

축축해진 얼굴에 흙이 끼얹어지고 나서 눈이 마주쳤다. 오묘한 색의 홍채는 형광 안료가 섞인 녹색과 노란색으로 빛났다. 꽤나 예쁘지 않나 싶었다. 수상할 정도로 말이다. 물리적으로 가당치 않은 각도에서 쏘아지는 바람, 주변을 맴도는 반짝이에서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내가 최근에 저런 걸 어디서 봤더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