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이거 뭐야!”
“어, 우리 아직 이럴 사이 아니지 않아, 미스 달튼?”
“개소리 말고!”
에드가를 내 침대에 앉힌 뒤 상처를 살폈다. 내 짐작대로 얘는 제대로 낫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낫지 않기는커녕,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정도였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너덜거리는 가슴팍을 끌어안고 공간 이동 주문을 외웠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피에 젖어 늘어진 그의 붕대를 풀어헤치고 서랍에서 새 붕대를 꺼냈다. 제이든 스펜서와 양호실에서 만난 이래 나의 응급 처치 실력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다만 지난 학기에 도서관에 구비된 모든 치료술 책을 읽은 범생이 룸메이트와의 관계는 아주 좋아졌다.
그녀는 옆구리에 구멍이 뚫렸던 나를 위해 붕대를 무더기로 사들인 다음 거기에 신성력을 부었다. 잘린 목도 감쪽같이 붙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던 브리가 기억났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넓었다. 또 마구잡이로 찢어져 있었다. 독을 쓴 것 같기도 했다. 상처 주위가 검었고 혈관은 부푼 상태였다. 셔츠를 완전히 젖혀 내자 확 풍기는 피 냄새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마물을 썼길래.”
에드가가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거렸다.
“만티코어 말이야. 이빨이랑 발톱, 꼬리를 다 피하기는 확실히 무리더라고. 너도 알다시피, 인간의 팔하고 다리는 두 짝씩밖에 없잖아.”
신성력이 담긴 마법 붕대는 상처에 이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날아가 붙었다. 나는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의미에서 말끔하게 감긴 붕대 위를 아프지 않게 쳤다. ‘아야!’ 스리슬쩍 치미는 웃음을 참지도 못하는 주제에, 에드가는 엄살을 무지하게 부렸다.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갈빗대까지 이어져 있던 상처가 붕대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자비롭고 자애로운 스티아 신의 권능에 감탄을 마지않는데, 문득 다치지도 않은 오른쪽 어깨에서 뒷목으로 그어진 선이 보였다.
처음에는 또 다른 전투의 흔적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웬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흑마법과 주술 수업을 들은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아마도, 흑마법에 사용되는 고대 문자 같았다.
희미하게 빛나는 그것에 무심코 손을 가져다 대자 에드가는 앉은 자리에서 진짜로 1피트는 뛰어올랐다. ‘야, 어딜 만져!’ 그가 짜증을 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갰다. 얘가 너무 오버를 해서 나도 괜히 민망해졌다. 되레 큰소리를 쳤다.
“여기도 조치해야 되나 해서 만져 봤다, 왜!”
그랬더니 에드가는 허리를 살짝 비틀어 내게 등 쪽을 보이며 말했다.
“주술이야. 건드리지 마. 낮에는 괜찮은데 해 지면 좀 민감해져.”
그의 너른 등에 빼곡히, 송곳 같은 것으로 도려낸 듯한 자국이 있었다. 오른쪽 어깨에 새긴 것처럼 전부 고대 문자였다. 은근슬쩍 감도는 푸른빛으로 미루어 보아 패인 살을 따라 마나가 흐르는 듯했다.
확실히 마나는 밤이 깊어갈수록 원기가 왕성했으므로, 해가 지면 민감하다는 에드가의 설명에도 일리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아는 한에서도, 주술이 맞았다. 다만, 이렇게 난폭한 형태의 마법진을, 그것도 사람 몸에 올리는 건 내가 아는 주술이 아니었다.
“되게 멋있지?”
“적당히 넘어갈 생각 마, 에드가 라모스. 어쩌다 네 등짝에 금주가 새겨지게 된 건지 꼭 알아야겠으니까.”
“흑마법과 주술 수업은 또 열심히 들었나 보네.”
단호하게 말하자 에드가가 혀를 내둘렀다. 이윽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대꾸가 돌아왔다.
“마나의 흐름을 빠르게 해서 마력을 증폭시키는 주술이야.”
왜냐고 물을 것도 없었다. 그가 형제의 가장 날카로운 칼이 되어야 했음은 익히 이해하는 바였다. 이제 내가 궁금한 것은 그 학대와도 같은 행위가 도대체 언제부터 자행되었냐는 거였다.
에드가의 말마따나 나는 다른 과목들보다 흑마법과 주술을 열심히 들었고 그래서 그의 금주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새겨진 것임을 알았다. 여기서 ‘아주 오랜 시간’이라 함은 적어도 10년 이상이었다.
로즈마리 왕비에게 얼마나 대단한 사연이 있고 그것이 얼마나 강한 동기가 되었든 간에, 만일 그로 인해 형제의 초상화에 약을 바르던 에디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면 나는 더 이상 쌍둥이를 응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말했더니, 에드가는 팔짱을 끼고 눈썹을 한쪽만 치켜올렸다. 내가 거기까지 파고들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재미있게도, 그러자 그는 지금까지의 어느 순간보다 브라이스 나돈과 닮아 보였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냐.”
그가 방어적으로 내뱉었다. 나는 여태 할 얘기 못할 얘기 다 지껄여 놓은 주제에 갑자기 선을 긋고 밀어내는 에드가의 태도에 화가 났다.
“아, 그러셔? 그럼 상관없는 사람 방에는 왜 계신대?”
한껏 빈정거리자 에드가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한편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손아귀에 말아 쥐었다. 그러고 나서는 한참 뜸을 들였다.
밀색 속눈썹 아래 깜빡이는 빨간 눈이 토끼의 그것처럼 보인다는 감상이 들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신발 뒤축을 끄는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는 것이 귀에 걸렸다.
“숨어!”
“뭐?”
“빨리, 들어가!”
나는 이불을 들춰 가슴까지 덮은 다음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늘어졌다. 이어서 에드가를 이불 안으로 욱여넣었다. 그가 내 명치에 이마를 박은 것과 브리아나가 방문을 젖힌 것은 거의 동시였다.
“안뇨옹!”
열린 문을 뒷발길질로 닫는 나의 룸메이트는 드물게도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제과제빵부에서 수확의 달 연회 기간에 판매할 쿠키라고 나눠 줬는데, 엄청 맛있는 거 있지! 네가 먹어 봤음 해서 가지고 왔어. 완전 마약 쿠키라니까!”
“와, 진짜 고맙다.”
“룸메 사랑 나라 사랑이잖니!”
손수건에 싸 온 쿠키 세 개를 침대가에 두고, 브리아나 모슬리는 등장했을 때처럼 활기차게 사라졌다. 우리의 국적이 다르다는 점은 그녀의 ‘룸메 사랑 나라 사랑’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나 보았다.
낡은 문짝이 문틀에 부딪히는 쾅 소리에 귀를 막고 있는 동안, 에드가는 불에라도 데인 듯이 튀어나와 방의 구석까지 갔다. 그가 들숨을 무지하게 길게 쉬고는 말했다.
“그거 먹지 마.”
“어?”
“일랑 풀 냄새가 진동을 하네. 모슬리 방방 뜬 거 보면 모르겠냐. 제과제빵부? 미친놈들.”
일랑 풀은 아카데미를 포함한 일부 지역에서 마약으로 분류되는, 대륙법상 아슬아슬하게 섭취 가능한 기호 식품이었다. 그것의 중독성은 담배보다 아주 약간 강한 수준이었으나 그렇다고 간과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미련 없이 마약 쿠키-브리가 알고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한 표현이었다-들을 창밖으로 내던졌다.
“그나저나, 왜 벽 보고 있는 거야?”
“잠깐만 이대로 둬 줄래….”
나로서는 영문을 알기 어려웠으나, 에드가는 갑자기 되게 슬퍼진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끄트머리가 꽉 메여 있었다.
“그, 나, 갈게.”
“그냥 간다고? 이유가 있어서 온 거 아니었어?”
“다음에.”
허둥대는 에드가의 걸음이 우스꽝스러웠다. 나는 의아하여 미간에 주름을 잡았지만, 어차피 자작가 영애가 말한다고 듣는 라모스 공작이 아니었으므로, 이십여 분 전처럼 창밖으로 다리를 걸친 그를 향해 손이나 흔들어 주었다.
“야!”
흰 셔츠가 달라붙은 등짝에 금지된 주술의 푸른색이 어렴풋 비쳐 보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나는 입가에 손을 대고,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서 바람 빠지는 소리로 외쳤다.
“다치지 말라는 소리는 안 할 테니까!”
“…….”
“죽지 마. 그게 내 소원이야.”
나는 그와 굉장히 권위 있는 유니콘 팽이 대회에서 치열하게 겨룬 끝에 소원권을 따 낸 전적이 있었다. 엄숙하게 말하자 그는 찰나 머리라도 얻어맞은 듯 경직되어 있다가 곧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어젖혔다. 결코 재밌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삽시간에 부루퉁해졌다.
“왜 비웃어?”
“비웃은 거 아냐… 그게 소원이라면 당연히 들어 드려야죠, 미스 달튼.”
“비웃었잖아.”
“안 비웃어. 나는 너한테 구애하는 입장이잖아.”
“오, 그래, 그러시겠지. 피츠시몬스 타임즈에 따르면 말이야.”
뜨거워진 볼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창틀을 부여잡은 에드가의 손가락을 떼어 내려고 했다. 그러자 그가 대뜸 말했다.
“아닌데.”
에드가 라모스 특유의 가벼운 척 날리는 말투였다.
“뭔 소리야?”
“잘 생각해 봐. 무슨 소린지.”
아리송한 단어들을 남겨 두고, 에드가는 4층을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고 나서는 일말의 미련도 없이 비틀린 마나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지극히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침대에 도로 누웠다. 두터운 가을 이불을 한껏 모아 끌어안으니까 에드가의 체향이 났다.
문득 바늘 비슷한 것이 종아리를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불 더미를 뒤져 보았더니 손가락 반만 한 길이의 귀걸이가 한 짝만 나왔다. 귓불에 댄 채로 거울을 봤다. 엄청 화려한 데다가 알이 큰 루비로 장식된 귀걸이는 나에게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거는 로즈마리 블로썸 같은 애한테나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했다.
***
얼마나 개 같은 사건이 벌어졌든 간에 내게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2학기에 블로썸이 공략 대상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목적 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행위, 즉 밤마다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와 피츠시몬스를 배회하는 것에 꽤나 익숙해져 있었다.
카일은 나한테 정확히 무엇이 필요한지, 혹은 이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짓거리가 누구의 무슨 ‘이벤트’와 관련이 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2학기에 ‘게임’의 난이도는 어려워졌고 카일이 시스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즉, 그의 몸을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전달할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블로썸에게도 같은 정보가 주어진다는 점은 위안이 되었다. 다만 그녀는 나와 달리 공략 대상의 함락 경험이 다수 있었다. ‘이벤트’의 정확한 발생 조건은 똑같이 모르는 상태일지언정, 그 외의 모든 부분에 있어 블로썸이 가진 지식의 양은 나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이번에도 아리엘 달튼의 출발선은 로즈마리 블로썸보다 훨씬 뒤였다. 결승선에 먼저 도달하기 위해서는 속도를 높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