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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84화 (84/178)

84화

이윽고 마법 인형이 나타나 능숙한 솜씨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낡은 나무 문짝은 삽시간에 어제와 똑같아졌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색종이 조각까지 싹싹 긁어 바구니에 담은 인형이 레이디 에드워즈를 향해 팔을 뻗었다. 나는 자극에 미쳐 있는 가짜 언론인의 룸메이트이자, 어머니이기도 한 레이디 에드워즈에게 바구니를 넘겼다간 끔찍한 꼴을 보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재빨리 그것을 공격했는데, 자기 방어 설계가 얼마나 잘되었는지 이마를 호되게 맞기나 했다.

얕게 튀어나온 이마를 문지르는 사이 레이디 에드워즈는 장래 희망이 쓰레기인 여자애의 문란한 사생활이 담긴 증거물들을 남김없이 손에 넣고 말았다. 당장 내일 모레 발간될 피츠시몬스 타임즈에 어떤 지랄 맞은 기사가 실릴지를 상상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

일요일 저녁에 나는 몇 개의 권유를 거절하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를테면 나의 범생이 친구인 브리아나 모슬리는, 수확의 달 연회 때 열릴 공용어 철자 말하기 대회를 함께 준비함으로써 나의 기분이 나아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내 방문에 매춘부 운운하는 플래카드가 없었더라도 나는 공용어 철자 말하기 대회 따위에는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입맛을 다시며 공용어 토론부실로 향하는 브리아나를 애매한 미소로 배웅했다.

연극부의 유일한 음향 효과 담당자인 켈리 라미레즈와 밀루아의 신흥 광산 재벌 엘리자베스 맥카시는 아주 바빴다. 아마 걔네들이 내가 처한 상황을 깨닫게 되는 것은 월요일 아침일 것이었다. 지금쯤 크리스타 에드워즈가 그녀의 삼류 가십지만도 못한 망상을 기사로 써 제끼는 중일 테니까 말이다.

아나이스의 제안은, 솔직히, 솔깃했다. 그녀는 오늘 저주 전문 주술사를 만나서 도넬리 준남작용 저주 패키지를 받아 올 예정이었다.

거기에는 평범한 저주 인형부터, 초상화와 함께 태우면 하루 동안 재수가 없어지는 향, 이름이 적힌 상대에게 유당 불내증을 선사하는 깃펜까지 다양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애덤 월시를 위해 하나쯤 구비하는 건 꽤나 좋아 보였다. 이번에도 나를 지저분한 소문의 늪에 밀어 떨어뜨린 장본인이 그 개자식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까닭이었다. 내 기억에 나는 피츠시몬스 입학 이후 월시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내 미들네임이 ‘미첼’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외출 준비를 마쳤을 때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월시의 주장이 아예 허무맹랑한가?

볼턴이나 나돈과는 오해라고 치더라도, 켈란, 카일, 제이든, 하물며 에드가와는 완전히 결백하다고 볼 수 있던가? 더구나 나는 2학기를 맞아 빌어먹을 시간 여행의 고리를 깨어 부수고자 본격적인 쓰레기로 거듭날 준비를 마친 참이었다.

카일에 따르면, 그저 학생회의 공주님 소리나 듣고 말았던 블로썸과 달리 내 행보를-심지어 켈란을 제외하면 아직 누구와도 별 짓을 하지 않았는데-거북스럽게 여기는 부류가 있는 건, 물론 개자식을 전 남친으로 둔 탓도 있었으나, 내가 배경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이 여러 공략 대상을 거느리는 것은 세계에서, 그러니까 시스템에서 미리 설정한 바이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배경 인물은 그게 아니라서 반발이 생기는 거라나.

완벽히는 이해하기 힘들어도 대충 알 거는 같았다. 솔직히 나 같아도 블로썸만큼 예쁘고, 목소리도 막 종달새 같고, 아무튼 대단한 여자애라면 남자를 한 부대씩 끌고 다녀도 그러려니 할 것 같았다.

부스스한 갈색 머리에 찍어 낸 듯한 파란 눈의 여자애는, 글쎄, 개연성이 없지 않은가. 마력선의 갑판에서 볼턴과 나돈의 팔짱을 끼고 춤을 추던 블로썸을 떠올렸다. 상상 속 그녀의 얼굴에 내 얼굴을 집어넣어 보았다.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아나이스와 포크너 역시도 배웅만 했다. 월시는 죽어 마땅하지만 걔의 선동에 휘말려 아리엘 달튼의 불가해한 매력에 대해 논하는 애들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았다. 내 속이 상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다행히 내게는 일요일 저녁을 끝내주게 보낼 계획이 있었다. 결계술을 가르치는 콘리 교수는 피츠시몬스에서 휴스턴 교수 다음으로 지루한 사람이었다. 나는 개학 첫 주부터 과제를 작성해야만 했다.

1학기에 결계술에서 A를 받은 내 친구 켈리에 따르면 콘리 교수는 맞춤법에 깐깐했기 때문에, 내게는 과제를 작성할 시간에 더하여 맞춤법 교정 주문을 외울 시간까지 필요했다. 여태껏 내가 마법사로서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보면 아마도 전자보다 후자가 더 오래 걸릴 게 분명했다.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현실이 되었다. 맞춤법 교정 주문은 저학년 보조 마법 실습 시간에 배우는 것이었다. 즉 난이도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리는 마법진은 계속해서 예상치 못한 효과를 자아냈다.

처음에 내 과제물의 모든 ‘마나’는 ‘많아’가 되었다. 그걸 교정하기 위해 마법진의 구조를 살짝 수정했더니 ‘많아’는 ‘매너’로 바뀌었다. 충분한 매너를 보유해야만 결계술을 쓸 수 있다는 문장이 묘하게 말이 되길래 혼자 키득거렸다.

웃긴 건 잠시였다. ‘매너’가 ‘문어’에서 ‘민어’, 다음으로 ‘밀어’, 마침내 ‘밀애’로 변한 순간 나는 지독하게 낮은 확률에 매달리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건 내가 열심히 써낸 과제에게 너무 ‘미안’한 짓거리였다.

그러자 내 집중력은 완전히 바닥이 났다. 나는 창가로 가서 커튼을 걷었다. 천문학을 배우기 이전의 때 묻지 않고 청초한 아리엘처럼 달에다가 내일은 꼭 애덤 월시가 뒤로 자빠져서 코가 깨지기를 기도할 참이었다.

창문을 활짝 여니 바람이 머리카락을 마구 날렸다. 옆머리가 싸대기를 갈기는 와중에는 청초한 아리엘이 될 수 없었다. 하릴없이 몸을 쭉 내밀었다. 창을 닫기 위해서였다. 기숙사 외벽을 오르던 남자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어제 봐 놓고 뭐야, 또?”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더니 그는 한가롭게 인사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제 봤다고?”

“미안한데 네 장단에 맞춰 줄 시간 없거든? 맞춤법 교정 마법이 얼마나 고도의… 잠깐, 너 에드가야?”

“브라이스랑 어제 만났어?”

“지금 그게 중요해? 너 어떻게… 다쳤다며! 괜찮아?”

말하면서 창문턱까지 온 에드가 라모스를 끌어 올렸다. 고질적인 지병인 공간 이동 멀미로 비틀대는 꼴을 살피노라니 셔츠 아래로 빡빡하게 감긴 붕대가 보였다.

“살 만하니까 여기까지 왔겠지?”

그가 대충 대답하고는 ‘밀애’로 가득찬 내 과제물에 관심을 가졌다.

“되게 야한 내용이네. 콘리 교수님 같은 분한테는 좀 자극적이지 않아? 여자 손도 잡아 본 적이 없을 텐데.”

에드가는 헛구역질을 하는 동시에 웃기까지 하는 묘기를 선보였다.

“놀리지 마.”

뒤꿈치를 최대한 들고 팔을 최대한 뻗은 뒤에야 나는 ‘멀대’에 ‘못된’ 에드가로부터 과제를 지켜 낼 수 있었다.

“내 마법이 얼마나 창의적이면 결계술의 5원칙에 대한 서술을 통속 소설로 둔갑시키겠어?”

천재 마법사 에디는 의도치 않게 콘리 교수를 성희롱하게 생긴 미스 달튼을 불쌍히 여겨 옳게 된 맞춤법 교정 마법을 나의 과제에 걸어 주었다. 푸르게 빛나는 손바닥 아래에서 ‘밀애’는 전부 ‘마나’로 돌아갔다.

“브라이스랑 왜 만났어?”

“내가 걔랑 뭐 하러 만났겠냐? 네 뒷담화 했지.”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나와 나돈은 친하지 않다 못해 서로 악감정을 가진 사이였으므로 대화 거리가 거의 없었다. 우리 사이 공통점이랄 것은 에드가와 친하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적이 흐를 낌새만 보였다 하면 재빨리 에드가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나돈은 내 말의 대부분을 비웃거나 무시했지만 동생을 화두에 올리면 언제나 무난한 대꾸를 돌려주었다.

‘뭐? 진짜?’ 에드가가 경악했다.

“브라이스가 뭐라고 했는데?”

이제 그는 약간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점잖은 척 헛기침했다.

“오, 나쁜 에디. 너 남의 초상화를 완전히 망쳐 놨다면서?”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렸을 때, 그러니까 10년도 훨씬 전에, 대륙에 유행병이 크게 돌았다. 치명적이지는 않았으나 전염성이 강하고, 일부 어린이에게는 합병증을 부르거나 후유증을 남기기도 해 많은 부모들을 긴장시키곤 했던 병이었다.

병이라는 게 딱히 귀족이라고 비껴가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나도 앓았던 적이 있었다. 빌라드 백작가도, 백작가와 왕래가 잦은 달튼 자작가도 조심에 또 조심을 하던 와중이었다. 백작의 둘째 아들이 굳이 유행병이 아니어도 허구한 날 자리를 보전하고 있던 약골 중의 약골이었던 탓이다. 근데 하필 걔랑 제일 친한 내가 걸리는 바람에 되게 난감했다나.

나돈에게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네 살배기 에디는 그의 형제가 빨리 회복해서 함께 어울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또 마법 잉크를 사용한 초상화가 실물처럼 움직일지언정 한낱 그림에 불과하다는 것과 찢어진 무릎에 얹는 약초로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날 로즈마리 왕비 궁에 걸려 있던 왕자의 초상화는 빻아서 물에 갠 약초로 온통 더럽혀졌다.

“아기 시절에는 그렇게 귀여웠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여전히 꽤 귀엽다고 보는데.”

에드가가 머쓱한 듯이 뒷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나는 네 살배기 에디의 모험담을 더 떠들고 싶었는데, 그가 너무 민망해하기도 했고, 미래의 공용어 철자 말하기 대회 챔피언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서 말았다.

최대한 멀쩡한 듯이 굴기는 했으나, 에드가의 표정은 가끔씩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마 에드가에게는 성치 않은 몸으로 공간 이동 마법을 반복해서 외운 뒤, 여자 기숙사의 벽에 매달릴 법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가 하는 행동들이 대개 충동적인 건 맞았지만, 많이들 가지는 편견처럼 마냥 가볍지는 않았다.

“용건이 뭐야?”

그래서 이렇게 물었더니, 에드가는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꽂고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내 몸에 맞게 입은 셔츠가 벌어지며 가슴팍을 감싼 붕대가 드러났다. 거기서 스멀스멀 퍼지는 빨간색도 말이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에드가에게 달려들어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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