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햄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고 나서 나돈은 엘프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가 질려 죽겠다는 듯이 주인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눈치 빠른 주인이 재빨리 겨드랑이에 쟁반을 끼고 공손하게 손을 모았다. 나돈은 그녀를 향해 금화 몇 개를 튕겨 낸 다음 ‘구스타보’라는 것을 요청했다.
반쪽짜리 엘프가 뒷걸음질로 사라진 뒤, 나는 ‘구스타보’의 정체를 추리하는 한편 손바닥만 한 잔에 위태롭게 쌓인 크림을 입술로 훔쳤다. 커피는 엄청나게 썼고 누구의 코에도 붙일 수 없을 양이었다. 탤론에서도 느꼈지만 나는 도박에 소질이 없었다.
‘구스타보’가 무엇인지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뾰족한 모자를 쓴 음유 시인이 긴장한 듯 머뭇대며 우리 테이블로 왔다. 그는 이제 에드가, 혹은 나돈의 이름을 모르지 않아서, 그에게서는 전과 같은 유쾌함을 찾기 어려웠다.
반면 나돈은 음유 시인 구스타보에게 퍽 친근하게 굴었다. 달궈진 모래보다 뜨거운 심장을 지닌 왕자가 어떤 식으로 조롱당했는지를 알 텐데 말이다. 내가 봤을 때 나돈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막연히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자유라든가, 평등이라든가)에 가까워진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구스타보, 친구, 내 어머니의 노래를 불러 봐.”
“하지만 전하….”
“소심하기는. 부르라면 불러.”
나돈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음유 시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갈색 얼굴은 한 눈에 보기에도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나돈이 요청한 ‘어머니의 노래’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게 가엾은 구스타보를 가시 방석에 앉힌 모양이었다.
사실 그는 나돈과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다리가 많이 달린 벌레를 반만 삼킨 듯한 표정을 짓는 중이었다. 나돈이 뭔 꿈을 꾸든, 얼마나 다정한 말씨를 꾸며 내든 간에 그는 권력자였고 들숨으로 음유 시인의 팔을, 날숨으로 다리를 잘라 낼 수 있었다.
“명예로운 로, 강인한 로.”
내가 쓰디쓴 커피를 우물우물 넘기는 사이 음유 시인은 주변을 아주 꼼꼼히 둘러봤다. 그는 나와 나돈을 제외하고 아무도 자신을 주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조그맣게 노래를 시작했다. 현을 뜯는 손가락은 마구 떨렸으며 목소리는 어디에 걸린 것을 억지로 긁어내는 듯이 뻑뻑했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이전만큼 아름답게 들리지 않았다.
“한낮의 햇볕처럼 뜨거운 눈빛, 그녀는 왕관을 반쯤 썼지.”
어쩌면 노랫말이 워낙에 끔찍했던 탓일 수도 있었다. 그것은 ‘로’에게 일어난 참사를 담고 있었다. 그녀는 얼간이 왕의 자식들 중 가장 고귀하고, 현명하고, 용감했지만, 욕심 많은 측근에게 등을 찔려 그녀의 것인 줄만 알았던 왕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사랑스러운 로, 달콤한 로, 선인장보다 굴곡진 몸맵시, 그녀의 미모는 비극을 낳았다네.”
‘로’의 추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탐낸 배신자는 끈질긴 구애 끝에 그녀를 억지로 취했다. 치욕을 견디다 못한 ‘로’는 몇 번이나 자결을 꾀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마침내 역겹기 그지없는 죄악의 산물을 잉태하고 말았다.
음유 시인 구스타보가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쏟아진 두 개의 핏덩이에 대해 묘사할 때 나돈은 실실 웃으며 검지로 자기 가슴을 찔렀다. 나는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 아까 마신 커피의 쓴맛이 위액과 함께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미치광이 로, 더러운 로, 모래처럼 바스라진 가슴, 가장 뛰어난 광대도 그녀를 위로할 수 없으리.”
죽지 못해 살아가는 ‘로’의 처지를 슬퍼하듯 우울한 분위기의 후주로 노래를 마무리 짓고, 음유 시인은 나돈이 건네는 금화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도망쳤다.
“어때?”
“몰랐어, 나는, 너희가, 그런….”
“야, 기특하긴 한데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대외적으로는 쉬쉬하고 있지만 이미 꽤나 퍼진 사실이고, ‘로’나 우리 형제를 감히 동정하라고 너에게 이걸 들려준 건 아니니까.”
‘어머니는 잘 견디고 계셔. 조금 미쳤고, 그래서 그녀가 놓친 영광에 지나치게 집착하기는 하지만 내 생각에 적당한 광증이 도리어 그녀를 단단하게 만든 것 같더군.’ 나돈은 한 눈썹을 치켜든 채 커피를 단숨에 넘겼다.
“왕이 되고 싶냐고 물었지? ‘로’의 아들로서는, 물론. ‘브라이스’로서는, 글쎄. 그는 항상 알지도 못하는 곳을 그리워하거든.”
“…….”
“아마 에드에게 물어도 비슷한 답을 들을 수 있을 거야. 스스로를 내던져 가면서 내게 헌신하는 이유 말이야. 그건 걔가 나와 같은 ‘로’의 아들이면서, 간발의 차로 나보다 늦게 태어났기 때문이야. 만일 산파의 품에 먼저 떨어진 쪽이 에드였다면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똑같은 짓을 했겠지.”
나는 잠시 궁리한 끝에 나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내가 ‘브라이스 라모스’였어도 기꺼이 형제의 그림자를 자처할 게 분명했던 까닭이었다.
로즈마리 블로썸이 아닌 플로렌스 벨의 세계가 존재함을 알았다. 어딘가에는 브라이스 라모스의 세계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 세계에서 나는 얘랑 친구를 먹고 에드가와 반목하였을까?
별안간 스푼으로 거품을 걷어 하트를 만들던 에드가 라모스가 무지하게 보고 싶어졌다.
“네가 에드를 이해하길 바랐어. 걔가 너를 꽤나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그건 내가 에드가를 친구로 아끼는 것과는 별개로 잘 끼워 맞춰진 거짓부렁이야.”
그가 내민 낭만적인 가능성을 단박에 부정하자, 나돈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멍청하긴.’ 그가 거칠게 투덜댔다.
“너 같은 계집애한테 낚인 내 형제가 불쌍하다.”
***
얼굴을 오래 보고 있는다고 해서 별로 달가울 사이가 아니었으므로, 나돈과 나는 커피 하우스를 벗어나자마자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합의했다.
피츠시몬스 아카데미행 마법진으로 가면서 주전부리와 마법 수식을 그려 주는 깃펜을 샀다. 언젠가 에드가 라모스가 관심을 보이던 것이었다. 차양 아래로 마주친 붉은 안광이 기억에 남았다.
나는 조금 울적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착실하게 과자를 씹었다. 가을의 가장 좋은 부분은 거리에 맛있는 음식이 늘어난다는 점이었다. 뻑뻑한 밤 페이스트가 목구멍을 채우는 감각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바야흐로 하늘은 높고 아리엘이 살찌는 계절이로구나.
종이봉투에 꽉 차게 담겼던 과자의 반 이상이 동났을 쯤에 기숙사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기숙사 건물의 층마다 공간이동 마법진을 설치해 달라는 나의 간절한 소원은 수리되지 않았다.
아홉 학기 동안 건의서를 어림잡아 백 통은 넣었는데, 읽기나 하는지 의문이었다(여자 기숙사 사감인 레이디 에드워즈는 내가 아카데미를 다니는 내내 단 한 번도 건의함에서 건의서를 꺼내는 모습을 보인 바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기척을 지우는 마법을 알고 있거나, 잠긴 건의함을 여는 열쇠를 잃어버린 게 틀림없었다.).
내 방이 위치한 4층에 다다르자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졌다. 복도를 오가는 학생이 많은데, 매일같이 보던 얼굴들이 아니었고, 자꾸 시선이 맞았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남자애들도 섞여 있었다.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는 실내 통로를 두고 이어져 있기는 했으나 그건 4층이 아니라 3층이었다.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1학기에 말이다. 계단을 구르듯 뛰어 내려가던 재클린 포크너의 뒤를 쫓았을 때. 그때만큼 거대한 인파는 아닌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나이스와 브리아나가 서로를 쥐어뜯는 것만큼 대단한 사건이 벌어지지는 않았나 보았다.
아무튼 여자 기숙사 4층에, 아마도 내 방에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남의 방문을 동그랗게 가리고 선 어깨들을 밀쳐 냈다. 그러자 재난과도 같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피츠시몬스 최고의 매춘부 아리엘 미첼 달튼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나무 문짝에 가느다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그 아래로는 내가 남자애들과 어울리는 장면을 마법 잉크로 새겨 놓은 그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볼턴의 옷을 가지고 도망치는 모습이나, 나돈과 공책 하나를 두고 투닥거리는 모습, 찰나를 어찌나 잘 잡아냈는지 꽤나 알콩달콩한 방향으로 왜곡되어 있었다.
카일이 엎드려 자는 내 어깨 위로 그의 재킷을 드리운 것은 마과학 수업을 듣던 1학기의 일이었다. 또 켈란과 언제 춤을 췄던가를 되짚어 봤는데 사랑의 달 연회 때인 것 같았다. 내 표정이 저랬구나.
그림들 중 한 장은 밀루아의 사교 신문을 오려 낸 것이었다. 거기에는 스펜서 공자의 미스터리한 파트너, ‘익명의 자작가 영애’에 관해 실려 있었다. 용 가면을 맞춰 쓰고 딱 붙어 움직이는 남녀는 어디서 어떻게 봐도 연인 같았다. 그래 보이려고 여간 노력한 게 아니니까, 당연하긴 했다.
알록달록한 색종이 조각과 반짝이 장식은 덤이었다.
“있지, 이건 나 아니거든?”
그나마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신문 삽화를 가리키며 외쳐 보았다. 나를 둘러싼 불특정 다수에게 던지는 변명이었다.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수군거리는 소리에 묻혀, 내 목소리는 다소 외롭게 사그라들었다.
“야, 구경났냐? 구경났냐고!”
내가 그 빌어먹을 것들을 잡아떼는 동안, 나의 룸메이트가 레이디 에드워즈와 함께 등장했다. 브리는 ‘미래의 공용어 철자 말하기 대회 챔피언’이라고 수놓인 스웨터를 입고도 맹렬하게 구경꾼들을 들이받았다. 벌떼처럼 모여 있던 어중이떠중이 무리가 확 흩어졌다.
“달튼, 또 너니.”
팔짱을 단단히 낀 레이디 에드워즈가 나를 흘겼다. 악독한 십대 애들에게 시달리다 가까스로 맞은 주말에 떨어진 날벼락 탓인가, 그녀는 지금 상황이 매우 달갑지 않아 보였다. 나는 구제 불능의 말썽쟁이를 대하는 훈육자들의 싸늘한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또 너니’가 아니라 ‘또 너를 노린 음모가 있었니’라고 하셔야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전 사건의 범인인 라모스에게 더는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 보려무나.”
“그건 마누엘 클리블랜드가…!”
“그만.”
레이디 에드워즈가 손을 치켜들자 내 입술은 침묵 마법에라도 걸린 마냥 딱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