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에 악마가 나타났다는 괴소문이 돌았다. 근원지는 로즈마리 블로썸의 절친인 미케일라 메이나드였다. 연극부에 속한 그녀는 수확의 달 연회 기간에 선보일 극을 연습하며 밤늦게까지 연습하다가 그것과 마주쳤다고 했다.
그것은 얼핏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온통 검은 비늘에 뒤덮여 있었고, 날개에는 뾰족한 가시가 돋아 있었다. 두툼한 손가락들은 물갈퀴 같은 것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손톱은 무엇이든 찢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머리 양쪽을 뚫고 나온 뿔은 흉악한 생김새였고, 또 꼬리는 어찌나 크고 길었던지, 그것이 바닥을 꼬리로 칠 때 일어난 흙먼지를 메이나드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묘사했다.
대부분의 흥미롭지만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그렇듯이, 정체불명의 괴물은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릴수록 더욱 공포스러워졌다. 최초의 발화로부터 만 하루 하고 반이 지나자 그것에 의해 피해를 봤다는 애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산책 중 악마의 힘에 이끌려 넘어졌다는 제보여서, 험프리스 교수는 고심 끝에 특단을 내렸다. 마법 인형으로 하여금 산책로의 땅을 고르도록 하여 무시무시한 돌부리들을 제거한 것이었다.
마침내 일부 저학년 학생들이 그들의 걱정 많은 부모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하자 학생회가 움직였다. 마르퀴즈 볼턴은 수업이 비는 시간마다 게시판에 공지를 붙이고 다녔다. 거기에는 아카데미 내에 팽배한 악마 소문은 완전히 낭설이며, 메이나드가 목격한 것은 아카데미 근방의 숲에 사는 가고일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말도 안 돼! 가고일은 허리를 아무리 펴도 고작 내 키라고!”
“메이나드는 너보다 키가 작잖아, 달튼.”
볼턴이 짜증스레 받아쳤다. 별로 유쾌할 겨를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향해 쏘려던 하피 똥 폭죽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블로썸한테 고백도 못 했지?”
“놀리려는 거야, 위로하려는 거야?”
“둘 다야. 소름 사탕 먹을래?”
“신 거는 안 먹어.”
“따지기는.”
우리는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으며 광장까지 갔다. 수확의 달 연회를 맞이하여 아카데미를 상징하는 금색과 푸른색으로 꾸며진 차양막 아래는 너무 붐벼서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고민 끝에 계단 구석에 주저앉자 볼턴은 정색을 하며 재킷을 벗어 내 무릎에 집어 던졌다.
“본 교관은 또 감동했다.”
“이 정도는 네가 알려 주기 전에도 했거든?”
“그러시겠지.”
나는 손수건을 계단에 엎어 놓고 볼턴에게 손짓했다. 그는 자신을 뭘로 보는 거냐고 씩씩대면서도 손수건 위로 엉덩이를 댔다. 새침한 태도였다.
볼턴의 다리가 너무 길어서, 그의 무릎은 꼴사나울 만큼 솟아올랐다. 나는 그를 배려하여 조금 위쪽에 다시 앉았다. 볼턴과 나의 손수건도 그렇게 했다.
“악마라니 웃기네. 방학 때 비슷한 소릴 들었는데.”
“밀루아에서?”
정적이 끼어드는 게 싫어서 적당히 던진 화제인데, 돌아오는 대꾸가 사뭇 심각했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볼턴은 안경 줄을 손가락에 걸어 가볍게 당기며 생각에 잠겼다.
따지고 보면 주디스의 악마와 메이나드의 악마는 많은 부분이 닮아 있었다. 색이라든가, 날개라든가, 비늘이라든가. 머릿속을 밀고 들어오던 목소리와 손끝에 닿던 까슬까슬한 감촉이 아직 생생했다.
물론 스펜서 저택에서 만났던 걔는 괴물일지언정 결코 악마일 수는 없었다. 적어도 나에게만은 그랬다. 하지만 볼턴의 말하는 투가 영 이상했다. 그래서 뭔 상관이 있냐고 캐물어 봤더니, 그는 티가 나게 딴소리를 했다.
수확의 달 연회 기간 동안, 피츠시몬스의 여러 방과 후 활동 부서는 노점을 꾸리거나 무대를 꾸며 학점과 운영비를 벌곤 했다. 학생회는 연회를 총괄하는 입장이었으므로 다른 걸 준비할 필요가 없었는데, 볼턴은 그리폰 크리켓부의 ‘펀칭 부스’가 꽤나 재밌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그건 확실히 누구나 열광해 마지않을 기획이었다. 피츠시몬스 설립 이래 열렸던 수확의 달 연회를 죄다 통틀어도 그리폰 크리켓부가 올해 벌어들일 운영비에 견주지 못할 것이었다. 지난 9개월들을 반추해 보았을 때, 나만 해도 카일의 ‘펀칭 부스’에 상당한 양의 금화를 지출하지 않았던가.
“제이든도 참여하면 좋을 텐데.”
“걔 때려 보게? 네 주먹이 먼저 망가질 거 같은데.”
볼턴처럼 마른 애의 가냘픈 주먹은 제이든이 근육에 힘만 줘도 바스라질 게 분명했다. 그렇게 말했더니 볼턴은 세상 천지에 아리엘 달튼만큼 일레스티아의 성기사를 무시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신경질을 냈다.
나는 한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남은 손으로 시끄러운 주둥이에 소름 사탕을 밀어 넣었다. 소름 끼치게 신 맛에 그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너도 몸을 키워 보는 게 어때? 요즘 여자애들은 호리호리하고 예쁘장한 타입보다 가슴 막 빵빵하고 팔뚝 막 이따만 한 쪽을 더 좋아해. 혹시 모르지, 너네 블로썸도 돌아봐 줄지.”
“로즈 취향이 너처럼 천박한 줄 알아? 그리고 걔는….”
동그란 사탕을 내 머리통이라도 되는 마냥 깨먹고 나서 가까스로 평정을 찾은 볼턴이 비난을 쏟아붓다 말고 조용해졌다. 블로썸을 떠올리는 중인 것 같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결국 블로썸하고 잘해 보고 싶어서 천박한 여자애한테 머리를 숙인 처지였다. 드높은 자존심을 개나 주면서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아는 입장에서는 측은지심이 절로 솟았다.
힘내라는 의미에서 하피 똥 폭죽을 쏠 기회를 볼턴에게 양도했다. 그랬더니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걸 내 얼굴에다 터뜨렸다.
콧속으로 쏘아진 하피 똥 냄새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볼턴의 기분은 한결 나아진 듯했다. 의도한 방향으로는 아니어도, 내가 그에게 적절한 농담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기는 했나 보았다.
“달튼, 너 나랑 결혼 안 할래?”
썩 우아하지 않은 모습으로 웃고 난 뒤에, 볼턴이 대뜸 지껄였다. 상상도 못한 헛소리였다. 나는 강렬한 자극을 강렬한 자극으로 지워 내고자 혀 위에서 굴리던 소름 사탕을 하마터면 삼킬 뻔했다.
“큽, 컥, 뭐, 라고?”
“빌라드보단 조건 면에서 내가 낫다고 보는데.”
“천박하다며, 나!”
“천박하긴 해도 꽤 좋은 애야, 넌.”
너무 얕게 뜨지도 깊게 가라앉지도 않는 말투였다. 하늘은 파랗고 나뭇잎은 녹색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말하듯이 덤덤한. 쬐끔 민망해져서 소름 사탕의 빈껍데기를 꼼지락대며 만졌다. 목소리는 부루퉁하게 나갔다.
“너 내가 지금까지 가르친 거 어디로 배웠어? 이걸 지금 청혼이라고 하는 거야?”
“성대하게 하면 받아 줄 거야?”
“아니지, 당연히! 너랑 무슨 결혼이야!”
“그렇지….”
볼턴이 엄지와 검지로 턱을 문지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길게 뜸을 들이고 난 다음에 말이 이어졌다.
“전하는 포기해.”
“갑자기?”
“네가 감당 못 할 게 분명하니까 충고하는 거야. 로즈가 아니어도… 너 같은 애는 그분을 못 이겨.”
당최 ‘나 같은’ 게 뭐고 ‘그분’이 누구길래 난리인지 궁금했다. 근데 볼턴에게는 딱히 그걸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했다.
그는 삽시간에 머릿속을 물음표로 꽉 채운 나를 떨치고 단호히 일어섰다. 얼마간 휘적휘적 가더니 금방 쭈뼛거리면서 돌아오는 모습이 웃겼다. 그제야 재킷의 행방에 생각이 미쳤나 보았다.
나는 득달같이 볼턴의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약 오른 볼턴이 내 이름을 외치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감미로웠다.
***
에드가 라모스인 척하는 그의 형제가 나를 데려간 곳은 언젠가 에드가와 함께 들렀던 커피 하우스였다. 그때에 에드가가 남긴 인상이 워낙에 강렬했던 탓인지, 창 너머로 우리를 발견한 가게 주인이 호들갑을 떠는 게 멀리 보였다.
입구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곧 허리를 깊게 숙인 가게 주인의 정수리가 눈에 들어왔다. 쏟아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귀 끝은 제법 뾰족했다.
“엘프?”
“반만요. 햄 샌드위치 파는 거 보면 모르시겠어요?”
나돈이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리자 그녀는 넉살 좋게 웃어 보이고는 우리를 전에 앉았던 테이블로 안내했다.
“에드랑 왔었냐?”
“그러면 안 되냐?”
“어쭈. 왕자한테 무엄하기는.”
“엄밀히 따지면 너 지금 왕자 아니고 공작이거든.”
“저 주둥이, 저거.”
볼에 쏘아지는 날카로운 시선을 모른 체 하며 가장 긴 이름의 음료를 골랐다. 전에 마셔 보지 못한 메뉴를 시켜 보고 싶었다.
나돈은 음료와 함께 햄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엘프가 엄선한 고기는 뭐가 다른지 궁금하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엘프제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걸지 말 것을 조언했다. 로한 달튼과 엘프들의 지독하게 촌스러운 안목으로 인해 가세가 기울어질 뻔했던 것을 떠들면서 말이다.
내가 그녀의 종족을 헐뜯는 동안 주인이 음료 두 잔과 햄 샌드위치를 들고 나타났다. 머쓱해져서 그만 합죽이가 되자 주인은 ‘괜찮아요, 저는 엘프가 엮인 우스갯소리를 즐기는걸요.’라고 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는 보호복 없이 정화된 숲을 나갔다가 매독을 제외한 모든 병에 걸린 라그나의 모험담이에요. 그건 들을 때마다 제 존재에 의구심을 가지게 만들죠. ‘대체 아버지는 어떻게 죽지 않고 어머니와 그 짓을 한 걸까?’”
가게 주인과 나는 잠시간 민들레 홀씨보다 약한 엘프의 이종간 교합에 관하여 토론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보호복 바지에 뚫려 있는, 웬 마개가 달린 구멍이 기적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거듭 말했다. 보호복을 입은 엘프는 마법적인 조치를 통해 배변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가 되므로 구멍 같은 것은 필요가 없었다.
나는 주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만일 그녀의 아버지가 그 수상쩍은 구멍 바깥으로 뭘 내밀기라도 했더라면 그녀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었다. 실제로 달튼 상단과 날염 원단을 거래하기 위해 만난 엘프 잉그리드는 계약서에 지장을 찍기 위해 보호복의 장갑을 벗었다가 손가락의 모든 뼈를 부러뜨렸었다.
“혹시 여기 내가 있다는 사실을 까먹은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