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젠장, 너 뭐 하는 애야? 진짜 위습도 구별하는 거야?”
“에드가 어딨어?”
“멀쩡하게 잘 있어.”
“네 말을 어떻게 믿어?”
“안 믿으면 어쩔 거야? 바닥에 드러눕기라도 하게? 그래 봤자 상황이 바뀌진 않을 텐데?”
질려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브라이스 나돈이 간과하는 게 있었다. 아리엘 달튼이 상황이 어떻게 되든 오로지 누구를 열받게 할 심산으로 흙탕물에도 몸을 뉘일 청개구리 중의 청개구리라는 거 말이다.
하지만 오늘 입은 블라우스는 불쌍한 마법 인형들이 어제 막 빨아 놓은 것이었다. 나는 다시금 관대해졌다.
“넌 왕이 되고 싶은 거야?”
바닥에 등짝을 비비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그랬더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대꾸가 돌아왔다.
“왕 하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냐?”
‘그리고 너 은근슬쩍 나한테 자꾸 공책을 들이미는 거 같은데 이거 뭐 나더러 필기 하라는 뜻이야? 진짜 작작 해라.’ 나돈이 어느새 완전히 그의 자리까지 넘어간 내 공책을 짜증스레 쳐 내며 말했다.
나는 얕은 수작 따위는 부리지 않았다는 듯이 시치미를 뗐다. 그러고는 콘리 교수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목적에 따른 다섯 가지 결계의 기본 구조’를 열심히 따라 그렸다.
아무튼 나돈에게 왕위에 오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나마 최악은 아니었다. 만일 그가 바란 적 없었던 왕족으로서의 삶과 누리지 못하는 자유 운운하며 한탄이라도 했다면 나는 결계술이고 자시고 얘의 정강이부터 걷어차 버렸을 거였다. 형제가 바란 적 없었던 지위를 지키느라고 사선을 오가는 에드가 라모스 때문에 울화통이 터져 가지고.
내가 아무렇게나 그리는 방음 결계를 보다 못한 나돈이 내 공책을 뺏어 들었다. 막힘없이 움직이는 깃펜 끝에서 완벽한 방음 결계가 완성되자, 나는 가방에서 팔이 조금 뭉개진 점토 골렘을 꺼내었다. 결계 안에 집어넣고 마나를 불어넣었더니 그것은 마도구 제작 실습실에서처럼 입을 벌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도 흙덩이의 찢어지는 비명을 듣지 못했다.
나돈과 나는 신이 나서 손바닥을 맞부딪쳤다가, 우리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려 내고 동시에 어색해졌다. 그는 블로썸을 사랑했고 블로썸은 나를 싫어했다. 시작의 달 연회에서 경험한 바 아마 나돈도 나를 싫어할 거였다. 내가 이승에 잘못 떨어진 천사거나 제이든 스펜서여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기는 쉽지 않았다.
“주말에 뭐 해?”
방음 결계라는 산을 넘어선 내가 방열 결계와의 고독한 싸움을 시작한 것을 어깨 너머로 지켜보던 나돈이 대뜸 헛소리를 했다. 나는 고민하는 척도 않고 ‘싫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돈은 에드가의 안부가 궁금하지 않냐며 나를 협박했다. 아주 이게 왕자인지 불한당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어쨌든 에드가 라모스는 내가 제일 아끼는 친구들의 범주에 있었다. 걔를 위해서라면 불편한 만남쯤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우격다짐에 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순순히 응하겠다는 거는 결코 아니었다.
“블로썸이 남친이 생겨서 한가하구나?”
“까불지 마라. 안 그래도 기분 개같으니까.”
그건 나의 혼신을 다한 깐죽거림이었는데, 타격감이 꽤나 좋았다. 나는 실실거리며 천재 마법사 에디가 전수해 준 주문을 외웠다. 방열 결계를 시험하라는 콘리 교수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물론 콘리 교수가 실습에 쓰라고 한 것은 마법이 아니라 촛불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봤을 때 숙지한 마법을 굳이 써먹지 않는 건 마법사로서 올바른 자세가 아니었다.).
근처에 앉은 인간 마력석의 영항을 받아서인지, 마법진에서 솟아난 불씨는 유례없이 컸다. 도무지 대충 갈긴 결계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불! 불!”
“뭐야, 갑자기!”
내가 타오르는 공책을 가리키며 요란스레 굴자, 당황한 나돈은 끓어 넘치는 마나를 조절할 겨를도 없이 전이 주문을 외워 버렸다. 누가 사막 나라 왕자 아니랄까 봐 테이블 위에 금방 모래가 범람했다. 뿐만 아니라 테이블 밑도, 옆 테이블도, 괜히 거기서 어슬렁대던 마누엘 클리블랜드의 소매 속도 모래로 난리였다.
클리블랜드의 콜록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자 콘리 교수가 손가락 세 개를 펴고 나타났다. 다른 손으로는 뒷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돈은 억울하다는 듯 뻐끔거렸지만 끝내 대거리할 논리를 찾지 못하고 체념했다. 나는, 솔직히 억울하지는 않았으므로, 교실을 나서는 나돈의 등을 얌전히 쫓기나 했다.
***
개학 첫날의 저녁 메뉴는 걸레 씹는 맛과 식감으로 널리 알려진 켈피 튀김이었다. 나는 룸메이트와 피니건 거리에서 저녁 식사와 후식을 즐기면서 통금에 걸리지 않고 돌아올 계획을 짜는 중이었다.
무슨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노크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 보니까, 내 손목부터 팔꿈치까지의 길이보다 살짝 작은 노움 여섯 마리가 가마 비스무리한 무언가를 지고 있었다.
노움들 중 하나가 나에게 두껍고 반질반질하게 처리된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거기에는 나의 혜안을 칭송하고 영원한 젊음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시구가 짤막하게 쓰여 있었다. 브레넌 스톡스의 짓이었다.
아마도 얘들은 리즈와 브레넌이 부리는 노움인 듯했다. 확실히 대부분의 광산 사업가가 노움 광부를 고용하기는 했다. 술을 마음껏 마실 환경만 마련해 준다면 인간보다 훨씬 신속하고 신중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노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내가 묻자 종이를 건네 준 노움이 약간 뽐내는 몸짓으로 가마를 두드렸다. 재미있어 보이길래 올라탔더니 영차영차 잘도 갔다.
은근히 속도가 있어서 뒤따르는 브리아나는 빠르게 걸어야만 했다. 잠깐 같이 타기를 고민해 보기도 하였으나, 아카데미 내의 드워프들에게 어떤 오해를 살지 몰라 그만두었다(고대 드워프가 노움을 가혹하게 지배했던 터라, 근대에 접어들어서 그들은 도리어 다른 종족보다 노움이 다루어지는 방식에 예민했다.).
한 사람만을 태운 노움 열차의 종착지는 켈피 튀김의 여파로 한산하기 그지없는 식당이었다. 아마도 켈피의 악명을 듣지 못했거나 미각이 기능을 않는 학생들이 노움의 왕처럼 등장한 나를 기웃거렸다. 켈로즈 커플을 제외한-어디 레스토랑에서 칼질이라도 하고 있겠지-학생회도 마찬가지였다.
제이든은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켈피 튀김을 해치우느라고 나와는 목례만을 겨우 교환했다. 스펜서 저택에 신세지면서 제이든의 혀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 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그에 대한 평가를 재고해야 할 듯했다. 실망이다, 제이든 스펜서.
에드가 라모스를 가장한 브라이스 나돈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짓으로 인사와 욕을 교묘하게 섞은 무언가를 날렸다. 결계술 교실에서 쫓겨난 게 엄청나게 억울했나 보았다. 나는 무려 양손을 써서 그의 환대에 화답했다.
마르퀴즈 볼턴은 그들 중 노움의 왕에게 가장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안쓰러울 정도로 풀이 죽어 켈피를 깨작거리고 있었다. 로즈마리 블로썸의 열애 소식 때문인 거 같았다.
철혈의 귀공자는 방귀 소리가 나는 마도구 위에 앉거나 노움이 짊어진 가마에 타 본 적이 없을 터였으므로, 그의 실연은 나의 실연보다 꼬리가 긴 우울감과 함께할 게 분명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피츠시몬스의 장난꾸러기이자 실연 동지로서 조만간 볼턴에게 적절한 농담의 필요성을 일깨워 줘야 하겠다고 느꼈다. 내 생각에 우리는 같은 아픔을 나눌 만큼은 친했다.
노움들은 리즈와 브레넌이 기다리는 테이블까지 나를 데리고 간 다음 가차 없이 가마를 뒤집었다. 나는 형편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브리가 시끄럽게 깔깔거렸다.
“대접할 거면 끝까지 하지, 이게 뭐야?”
“고대 밀루아의 오스왈드 2세를 재현하려 한 건데, 노움 친구들이 대륙의 역사는 잘 모르나 봐.”
얼얼한 엉덩이를 문지르며 힐난하자 엘리자베스가 뻔뻔스레 대꾸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대왕이라고도 불리던 오스왈드 2세는 절대로 땅에 발을 대지 않고 아무리 짧은 거리라도 가마를 타고 다녔던 것으로 유명했다.
마나와 마법의 존재가 수면 아래 있었던 고대에, 비옥하지 않을지언정 넓은 영토를 지닌 밀루아는 지금의 밀루아와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당시 오스왈드 2세의 위세가 지금의 케이틀린 대제보다 강했다고 하니, 똥 싸러 가면서도 가마에 오르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오, 미스 달튼, 그대의….”
“됐고, 어디 너희들이 사랑의 수호자를 위해 얼마나 굉장한 걸 준비했는지 볼까.”
또 구구절절 뭐를 읊으려고 하는 브레넌을 물리고 테이블에 앉자 리즈가 자신만만하게 접시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커다란 뼈가 붙은 송아지 스테이크가 놓여 있었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에 섞인 특이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송로 버섯으로 양념이 된 것이 틀림없었다.
“솔직히 네가 나와 브레넌과 또 맥카시 백작가에 해 준 걸 생각하면 용의 심장쯤은 먹이는 게 맞지만….”
“미안한데, 나는 영원히 살고 싶지 않거든.”
나는 영원히 살지 않기 위해 별 짓거리를 다 하는 중이었다. 큰일 날 소리를.
“내 말은, 너는 나에게 있어 용의 심장이 아깝지 않은 은인이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네 편에는 우리가 서게 될 거라는 거야.”
무거운 분위기에 약한 내가 일부러 떠는 너스레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리즈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녀와 나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시선을 맞추었으며 말로 하기 어려운 몇 가지를 주고받았다.
하염없이 고양되는 기분을 느끼면서 송아지 스테이크를 썰었다. 곧 우정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