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치트로 채울 수 있는 호감도에는 한계가 있어. 특히 2학기에는 말이야.”
카일이 사람 모양대로 주무른 점토 골렘에 간단한 마법 회로를 새기며 말했다. 그러자 골렘은 카일이 설계한 대로 구석에서 꾸벅꾸벅 조는 드와이어 교수의 콧수염을 한 가닥 뽑아 왔다.
완전히 똑같이 한 것 같았는데, 내 골렘은 자꾸 내 눈썹을 쥐어뜯으려고 들었다. 나는 멍청하게 팔을 휘두르는 골렘에게서 잽싸게 마나 코어를 빼내어 그것을 도로 점토 덩어리로 만들었다.
“또 걔는 이미 소지금과 능력치를 올리기 위해서 너무 많은 치트를 사용했어. 1학기 학년 수석이 로즈, 블로썸이었던 걸 알고 있어?”
“와, 진짜?”
내가 기억하는 한 로즈마리 블로썸은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에서 연회의 여왕을 위시한 여러 영예를 차지했으나 학년 수석이 되었던 적은 없었다.
놀라서 혀를 내두르자 카일의 점토 골렘이 거기에 드와이어 교수의 콧수염을 투척하려고 시도했다. 주인 닮아서 괘씸하기 그지없는 흙덩이와 난전을 치르는 나를 보며 카일은 아주 심각해졌다.
“치트는 게임의 자연스러운 진행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걸 사용할 때마다 시스템은 조금씩 불안정해져. 켈란의 실을 끊어먹고 너를 주인공으로 착각한 걸 보면 이미 멀쩡하다고 할 수 없는데 말이야. 호감도를 저만큼 채울 정도로 치트를 쓰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거니와, 가능하다 해도 게임이 유지될 리가 없어… 분명해.”
하긴 굳이 블로썸이 치트를 남발하지 않아도 나는 조금씩 그녀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스스로 얼마나 멍청한지 외에는 되새길 길이 없었던 ‘상태창’은 이제 나로 하여금 더욱 많은 자기반성의 시간을 선사하는 존재가 되었다.
상태창에 따르면 나는 체력만 무식하게 높고 평범한 수준의 매력에 지력은 바닥을 기는 가난뱅이 여자애였다. 인성이 수치로 표현되지는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또 프라스웰 호수에 몸을 던져 플로렌스 벨의 세계로 다녀온 뒤로는 이상할 정도로 카일이 멋있게 느껴지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누가 쫓아다니면서 조명이라도 대어 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얼굴이 해사해 보였던 것이다. 뒤통수에는 동그랗게 빛이 퍼졌다. 어렸을 때 관광했던 스티아 신전의 벽화 속 성인들이 딱 그랬다.
하지만 그는 성인보다는 신성 모독자에 가까웠다. 너무 어이가 없어 가지고 물어봤더니, 카일은 웃겨서 한참 뒤집어진 다음에 말했다. ‘그건 내가 공략 대상이라서 그래.’ 그러고 나서 엄청 까불었다.
“좋겠다, 야.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너한테 막 매달리고.”
하도 얄밉게 굴어서 개학을 하자마자 켈란 일레스티아부터 쳐다봤다. 그에게 얼마나 대단한 효과들이 퍼부어졌는지 생생하게 전하자 카일은 더는 나대지 않겠다고 백기를 들었다. 샐러맨더의 무지개 비늘에 맹세컨대, <초보 마법 약사를 위한 3600가지 꽃 도감>보다 켈란의 얼굴에 더욱 다양한 꽃이 피었을 것이다.
“그럼, 저건 어떻게 된 거야?”
아무튼 그랬다. 내가 블로썸에 가까워진다는 건 그녀가 주인공의 자리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학기에 접어듦과 동시에 내가 마주친 것은 켈로즈 커플의 꽁냥질이었다.
“글쎄.”
블로썸에 대한 공략 상대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카일에 의하면,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그렇게 지지부진하던 켈란의 호감도가 순식간에 하늘을 뚫을 기세가 되었다고 했다. 지금도 그는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서 블로썸의 점토 골렘에 손톱만 한 점토 리본을 붙이고 있었다.
“확실한 건 켈란의 호감도가 거기까지 오르는 동안 시스템이 개입하지는 않았다는 거야.”
“마법이라도 썼다는 거야?”
“너도 알다시피,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마법은 용도 못 써. 마법약이라면 모를까.”
치트가 아니라면 켈란이 블로썸에게 매료될 만한 경우의 수는 단둘이었다. 주정뱅이와 나눈 키스 이상의 낭만적인 경험을 통해 시스템의 농간 없이 로즈마리 블로썸을 사랑하게 되었거나, 사랑의 묘약을 음용했거나. 둘 다 나한테는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차라리 전자인 편이 낫기는 했다. 그 경우 상하는 거라고는 내 감정뿐이었으니까. 후자일 때 상황이 훨씬 복잡해졌다. 마탑의 허가 없이 사랑의 묘약을 손에 넣고, 일레스티아의 황태자가 그걸 마시게 만들 법한 위인은 거의 없었다. 블로썸의 배후에 그런 거물이 있다면 앞으로 나와 카일의 계획은 순탄치 않을 것이었다.
나는 우울감에 사로잡혀 점토 골렘의 마법 회로를 손보다가 그만 그것의 팔을 뭉개 버렸다. 잔류 마나를 통해 아픔이 전해졌는지, 골렘은 조잡하게 뚫린 입을 크게 벌려 비명을 질렀다.
잠에서 깨어난 드와이어 교수가 나에게 주의를 주자 켈란의 호박색 시선이 내게 잠깐 머물렀다. 착각인가 싶어질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켈란은 다시 블로썸을 보고 있었다.
사르르 웃는 그의 등 뒤로 꽃잎이 마구 흩날렸다. 내 생각에 그것들 중 일부는 베고니아 꽃이었다.
***
일레스티아 출신의 블로썸이 마도구 제작 실습을 수강하게 된 까닭은 오로지 카일이 그걸 들어서였다. 1학기에 마과학을 수강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가 지금껏 ‘진엔딩’을 맞지 못한 이유가 카일이었으니까, 블로썸은 어떻게든 카일만은 공략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여기서 켈란 일레스티아가 변수가 되었다. 그의 호감도는 게임을 수 없이 반복한 카일도 불가해할 정도로 단시간 만에 지나치게 상승했다.
블로썸이 어떤 목적에서 그렇게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게 걔한테 마냥 유리한 결과만을 불러오지는 않았다. 켈란은 스스로 호언한 대로 욕심이 많았고 그의 연인이 그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하는 꼴을 두고 보지 못했다.
블로썸이 켈란에게 묶여 있는 동안 나머지 공략 대상에 내가 접근하기 용이할 거였다. 나는 2학기 수강 신청을 완전히 학생회에 맞춰서 했다. 블로썸도 마찬가지였다. 켈란은 블로썸을 따라 그의 수강 목록을 전부 정정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도구 운용 이론과 원소 마법 방어술을 제외한 모든 과목을 같이 듣게 되었다. 웃기지도 않는 촌극이었다.
“되게 신경 쓰이나 보네.”
“내가? 켈란이? 아닌데?”
결계술 교실에서도 두 마리의 사랑앵무는 서로 정다웠다. 나는 블로썸의 굽이치는 금발을 귀 뒤로 넘겨주는 켈란의 손놀림에 또 넋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빨리 변명을 주워 삼켰다.
“켈란이라고 한 적 없는데.”
에드가는 내가 공책에 그리다 만 간이 방어 결계를 마저 그리며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이어 수정액이 든 잉크통을 결계 안으로 굴리자, 얄궂게도 내가 그린 쪽으로 쏙 들어가서 에드가가 그린 쪽에서 튕겨 나왔다.
결계를 그리는 방식은 마법 회로를 짜는 방식과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었다. 늙은 드워프가 젊은 엘프보다 망치질을 잘하듯이, 나는 밀루아인인 내가 그래도 어느 정도는 결계술에 두각을 보일 줄 알았다. 늙은 드워프의 완력이 2라면 망치를 쥘 수조차 없다는 점을 간과한 착각이었다.
“이렇게 잘 나신 분이 교재는 얻다 두고 오셨을까.”
“사물함 비밀번호를 또 까먹었어.”
“오, 에디. 네가 하도 비밀번호를 기억을 못 해서 내가….”
에드가는, 젊은 나이에 치매라도 걸렸는지, 사물함에 걸린 자물쇠 비밀번호를 잊어버리가 부지기수였다. 나는 너무나 관대해서, 피츠시몬스의 수많은 학생들로 하여금 레프러컨 축제를 무사히 버티게 만든 일등 공신인 마법 자물쇠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5할의 이윤만 남기고 팔았다.
신이 나서 빈정거리다가 불현듯 얼토당토 않는 데에까지 의식이 뻗쳤다. 바로 곁에 앉아 나를 들여다보는 남자의 갈색 피부와 밀색 머리, 적자색 눈을 찬찬히 봤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너 누구야?”
마법 자물쇠는 사용자의 마나를 감지하여 열리는 물건이었으니까, 에드가에게는 더 이상 비밀번호를 외울 필요가 없었다. 그가 에드가 라모스가 맞다면.
왜 여태 눈치를 못 챘을까? 얘가 내 옆자리에 앉아서 나의 방어 결계에 참견하기 전까지 말이다! 쌍둥이를 구분하는 데는 이골이 난 줄 알았는데.
그가 교실에 나타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가 되짚어 보았다. 맙소사, 되짚을 게 없었다. 내 기억에 새겨진 것이라곤 켈란의 단정하게 손질된 머리 모양과 켈란이 블로썸을 발음하는 방식, 그리고 켈란이 전부였다.
스스로를 비난하며 생각을 옮겼다. 그러고 보면 나돈이 피츠시몬스로 복귀하지 못할 만큼의 부상을 입은 곳은 생일 연회장이라고 했다. 에드가 라모스는 대부분의 공식 행사에서 그의 쌍둥이 형을 가장했고. 대륙에서 브라이스 나돈 흉내를 제일 잘 내는 애가 걔였던 까닭이었다.
“그게… 왜 궁금해?”
반대가 성립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대륙에서 에드가 라모스 흉내를 제일 잘 내는 애가 되물었다. 느긋하게 말하는 버릇과 비뚜름한 미소, 등받이에 팔을 걸고 상체를 뒤로 뺀 자세가 에드가와 완전히 똑같았다.
“설마, 다친 쪽이….”
“입 닥쳐.”
나돈이 험악하게 지껄였다. 그의 말투는 에드가와 비슷할지언정 말하는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또 그는 에드가와 달리 몇 가지 보조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나돈이 마법진도 그리지 않고 주문을 외자 내 입술은 서로 달라붙었다.
감히 그따위 마법으로 달튼의 말괄량이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었다. 나는 혀를 꼭 붙잡은 기운을 느끼자마자 지체 없이 콘리 교수에게 달려갔다. 몸짓 언어로나마 내가 당한 공격에 대해 설명하려는데, 나돈이 잽싸게 나를 집어 드는(진짜로!) 통에 그러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내가 에드가와 친분이 있다는 인식이 아카데미 내에 제법 퍼져 있었으므로, 콘리 교수는 수업 중에 장난치지 말라고만 했다.
교실의 뒤편에서 작지 않은 소동이 벌어졌다. 나돈은 발버둥을 치는 나를 억지로 앉히고 의자에 자세를 교정하는 마법을 걸었다. 엉덩이와 등이 의자에서 떨어지지 않게 되자 나는 몸을 크게 들썩여 의자 다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통해 구조 신호를 보내려고 했다.
콘리 교수가 세 번째는 봐 주지 않겠노라고 으름장을 놓고 나서야 나돈은 내게 걸린 침묵 주문과 자세 교정 주문을 풀어냈다. 나는 씩씩대며 욕을 뱉는 나돈을 보고 약간의 승리감에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