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방금 나 부르지 않았어?”
“혹시… 평소에 자의식 과잉이라는 생각 안 해 봤어?”
“아니라는 소리 그렇게 재수 없게 할 거야?”
내가 짜증스럽게 소꿉친구를 걷어차는 와중에도 답답함은 계속해서 차올랐다. 가슴이 꽉 조였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리!”
다시 한번, 목소리가 내 귓속을 헤집었다.
“아냐! 불렀잖아! 분명히 네 목소리였다고!”
“불쌍한 아리. 내가 너무 그리운 나머지 내 곁에서도 내 목소리를 듣는구나.”
카일이 빈정거렸다. 화려한 욕설로 맞서려는 찰나 송곳 같은 고통이 관자놀이를 찔렀다. 갈 때가 되었구나. 하긴 타메니 강의 세이렌으로 불렸다는 게 코넬리아 빌라드의 허세가 아니라면, 그녀가 나를 호수에서 끄집어내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시간이 흐르긴 했다.
“아리엘!”
머리를 싸매고 휘청이는 동안 환청은 계속해서 나를 맴돌았다.
“정신 차려!”
점점 가까워지는 거 같기도 했다.
“제발!”
아니, 확실히 가까워졌다!
미지근한 흐름에 갇혀 있었던 의식이 차츰 부상했다. 전신의 감각이 완전히 둔해진 다음에 극단적으로 날카로워졌다. 말랑한 살덩이 같은 것에 의해 입이 억지로 열린다고 느낀 다음 순간 안으로 바람이 강하게 들어왔다. 같은 과정이 서너 번 반복되고 나서야 나는 내가 아까부터 줄곧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괴로움이 밀려들었다. 캑캑 기침을 뱉자 호흡 대신에 물이 솟구쳤다. 그러고 나서는 주변이 확 밝아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더니 축 늘어진 빨간 머리가 시야에 가득 찼다. 카일이었다. 질리지도 않고 울고 있었다. 어쩌면 그냥 젖은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의 얼굴은 온통 엉망이었다.
“아리, 윽… 괜, 찮아…?”
“아니네, 진짜로 우네.”
신음에 가깝게 허덕이는 목소리 덕분에 카일이 물에 젖은 동시에 울기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멍청하게 중얼거리자 브리아나가 득달같이 끼어들어 타박했다.
“그럼 안 울게 생겼어? 제정신이야, 너? 죽고 싶어서 환장했니?”
브리는 내 손을 잡고 미약하게나마 신성력을 불어넣는 중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사뭇 험악했다.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드레스 자락을 비틀어 물을 짜내던 코넬리아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나를 봤다.
“죽으려던 게 아니라….”
그야 뱃놀이 중에 난데없이 호수로 뛰어들면 누가 봐도 미친 사람이거나, 자살하려는 사람이거나, 미쳐서 자살하려는 사람 같아 보일 거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뭐라 반박의 말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강한 힘에 허리가 반쯤 들렸다. 이윽고 싸늘한 옷감과 뜨끈한 몸이 한꺼번에 나를 감쌌다.
“이래서, 널…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카일이 속삭이는 소리는 너무 작아서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제발, 아리엘…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그가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애원했다. 어깨와 이어지는 완만한 곡선을 타고 켜켜이 쌓인 단어들이 내 목을 짓눌렀다. 그래서 나는 ‘사정이 있었다’거나 ‘살았으니 된 거 아니냐’고 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 못된 거 같았다.
“너 나랑 뽀뽀했다.”
“야, 지금… 그게… 멍청아!”
일부러 능청을 떨었더니 말을 막 더듬으며 화를 막 내는 게 웃기고 쪼끔 귀여웠다. 나는 깔깔 웃다가, 물을 토하다가, 다시 웃었다.
타메니 강의 세이렌이라던 닐라의 드레스는 허리 위로는 멀쩡했다. 반면 카일은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아주 난리였다. 내게 닿는 그의 모든 부분이 축축했다. 아마도 프라스웰 호수의 밑바닥에서 나를 건져 낸 건 코넬리아가 아니라 그녀의 남동생인 모양이었다.
카일의 심장에서 내가 차지하는 부분이 그가 가진 공포증보다 크다는 사실이 슬펐다. 내게는 감탕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얘를 구해 낼 자신이 없었던 까닭이다. 기특하고 안쓰러운 내 소꿉친구. 하필이면 아리엘 달튼처럼 매정한 애한테 반해 가지고.
***
다사다난했던 여름 방학이 끝났다. 나 같은 5학년에게는 마지막 방학이기도 했다. 브리도 나도 2학기 수강 과목이 그다지 만만하지 않았으므로(그녀는 적성에 조금도 맞지 않는 원소마법 방어술을, 나는 적성에 맞지 않을뿐더러 어렵기로 유명한 고대 마법과 전설을 들어야만 했다.)우리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발을 질질 끌면서 피츠시몬스로 향했다.
그간 피츠시몬스에는 재미있는 변화가 있었다. 이를테면, 한동안 시간 강사들이 오가던 점술 과목에 드디어 전임 교원이 임용되었다. 미세스 커크패트릭이 된 미스 프록터를 대신하여 점술을 가르치게 된 나돈 출신 교수의 이름은 ‘폴라 알바라도’였다. 켈리 라미레즈의 영적 멘토인 ‘폴라 이모’가 피츠시몬스의 교수가 된 것이었다!
내가 알기로 미스 알바라도가 점술사로서 쌓은 업적은 라미레즈 후작에게 닥칠 뻔했던 재난을 예지한 것 하나였다. 재작년에는 켈리의 주변에 죽음이 보인다고 떠들고 다녀서 켈리로 하여금 수상쩍은 물건들을 잔뜩 사도록 했는데, 그녀의 전 남친인 케이시가 ‘장래 희망을 ‘장례 희망’이라고 쓸 것을 예지한 거였다면 두 개라고 해도 되었다.
아무튼 교수입네 할 정도의 실력자는 아니라는 거다. 나는 그녀가 점술 교수 자리를 차지한 배경이 꽤나 지저분함을 확신했다. 아무래도 마담 바틀렛은 평민 특례 입학생을 수용한 것으로 교수 채용 비리의 오명을 충분히 덜었다고 판단했나 보았다.
삶의 기로에 서 있던 나의 친구들은 다행히도 무사했다. 엘리자베스 맥카시와 브레넌 스톡스, 그리고 아나이스 오브라이언 말이다. 피츠시몬스를 떠날 때 손가방 하나와 외출복 한 벌이 전부였던 리즈는 그간 금화를 얼마나 벌었는지 귓불과 손가락에 보석을 주렁주렁 달았다.
반면 브레넌은 차림새야 좋았지만 얼굴이 영 해쓱해져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하기를 광부들과 뒤엉켜 지내면서 술을 죽어라고 마셔서 그렇다고 했다. 원래 모든 행운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 고개나 끄덕여 주었다.
아나이스는, 걔의 대담한 시도는 엄청나게 화제가 되어서, 정말로 모든 피츠시몬스 학생이 아나이스의 짧은 갈색 머리에 대해 떠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깨나 귀밑으로 애교스럽게 떨어지는 길이가 아니라 아예 뒷목이 전부 드러나는 길이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오브라이언의 장미였다. 오히려 우아하고 고귀한 이미지에 중성적인 매력까지 더해져, 기존의 추종자 무리에 여자애들이 대거 유입되었다고 했다. 여태껏 유일했던 짧은 갈색 머리의 여학생, 켄드라 브래들리는 그리하여 아나이스의 선택에 불만을 표하는 유일한 여학생이 되었다. 학생회장 선거를 앞두고 흐려져 버린 본인의 존재감을 책임져 달라나, 뭐라나.
아나이스가 변한 것은 겉모습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성서’ 속 율법을 계속해서 준수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조용했고, 내성적이었으나 더는 숨지 않았다. 눈치도 없이 아나이스에게 시비를 걸던 모리스 스위니는 아나이스가 주춤거리며 날린 주먹 두 방에 개학 첫날부터 양호실 신세를 졌다.
듣기로는 5학년 2학기 수강 과목으로 검술을 넣기도 했다고 그랬다. 덕분에 아나이스가 하는 것은 죄다 함께해야 하는 재클린 포크너의 아카데미 생활만 고단해졌다. 뒤늦게 개화한 오브라이언의 장미와는 달리 포크너는 내가 알기로 검술에 요만큼의 흥미도 재능도 없었다. 불쌍한 포크너. 무어 교수 엄청 빡센데.
나는 1학기에 볼턴이나 제이든을 노리고 검술을 수강한 말랑한 팔뚝의 여자애들이 두 가지 극단적인 결말을 맞는 것을 직관했었다. 하나, 너덜거리는 몸뚱어리를 부여잡고 수강을 철회한다. 둘, 강인하고 단단한 무인으로 거듭난다. 결코 전자도 후자도 될 수 없는 포크너로서는 제3의 길을 개척할 필요가 있었다. 그게 뭐일지 너무 궁금해서 잠도 안 왔다.
또 항상 맞춘 듯이 함께 다니던 나돈의 쌍둥이는 반토막이 나서 나타났다. 브라이스 나돈이 그의 생일 연회에서 암살자에게 공격을 당했다는 소식은 방학 중에 이미 접한 바가 있었다. 치료에 전념하느라 아카데미 복귀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돌아온 쪽이 랭카스터의 룸메이트라고 하길래 가슴을 얼마나 쓸어내렸던지. 참 이기적이긴 한데.
피츠시몬스의 재미있는 변화 중 가장 거대한 것은 켈란 일레스티아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는 딱 한 번 달튼 저택에 들른 뒤로 나를 전혀 찾지 않았는데, 개학 이후에나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신문부의 크리스타 에드워즈는 피츠시몬스 타임즈의 한 면을 전부 ‘켈로즈’ 커플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들의 완벽한 외모 합과 완벽하게 다른 지위에 대해서 말이다. 확실히 두 사람의 낭만적인 데이트 장면을 담아낸 그림은 내가 본 어떤 명화보다 인상적이었다.
켈란이 블로썸의 볼을 다정스럽게 쓰다듬는 장면이 일곱 번쯤 반복되었을 때 나는 신문을 곱게 접어 휴지통에 넣었다. 침대에 엎드려 베개의 잔꽃무늬 자수를 손톱으로 긁고 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울적하지? 켈란과 블로썸이 사귀는 게 뭐라고.
물론 내가 블로썸의 자리를 뺏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입장이기는 했다. 하지만 9개월이 반복되는 동안 둘이 맺어지지 않는 경우는 단연코 없었던 것이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전개라는 뜻이다. 근데 이렇게까지 큰 낭패감에 시달릴 이유가 있나?
불현듯 나를 너무 좋아하는 소꿉친구로부터 얼마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내가 애덤 월시랑 만난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의 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억울하고 막 열이 뻗쳐 가지고.
나도 억울했다. 열이 뻗쳤다. 그럼 켈란을 좋아하는 건가?
가만 보니 내 베개에 수놓인 꽃은 베고니아였다. <초보 마법약사를 위한 3600가지 꽃도감>을 정독한 이래로 꽃만 봤다 하면 아는 척을 하길 좋아하는 브리아나 모슬리에 따르면, 베고니아의 꽃말은 ‘짝사랑’이었다.
나는 베개를 뒤집어 자각하자마자 망해 버린 나의 가엾은 사랑을 보이지 않게끔 했다. 그 위로 얼굴을 묻으니 쿰쿰한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