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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78화 (78/178)

78화

수정된 계약서가 깃펜과 함께 켈란에게 건네어졌다. 그는 내가 고친 문장에 밑줄을 치고 나서 3항과 4항 사이의 공간을 펜촉으로 툭툭 쳤다.

“스킨십 관련 조항이 없는데… 네가 원하지 않을 테니 최대한 자제하겠지만, 꼭 필요한 경우에는 할 거야.”

“꼭 필요한 경우라 함은?”

“우리의 관계를 과시해야 하는 경우.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키스해 본 적 있어?”

그건 ‘꼭 필요한 경우’에는 키스를 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 거 같았다. 켈란이 키스를 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있었으므로, 좀 더워졌다. 나는 머리카락의 일부를 매만져 옆 볼을 가렸다.

“처음은 아냐.”

픽시의 재채기만 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켈란은 우아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맘에 드는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는 반응이었다.

문득 내 첫 키스가 평행 세계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켈란이 어떻게 나올지 되게 궁금해졌다. 단순히 입술을 붙였다 떼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도 말이다. 당황하는 켈란을 구경하기란 아주 재밌을 거 같았다. 기억을 되짚는 것뿐인데 절로 배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자극적인 키스였으니.

한편으로는 어깨나 으쓱이고 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야 인생 최초의 키스이니만큼 강렬한 인상이 남았다지만, 켈란에게는 아닐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만일 얘한테도 처음이었다면, 진짜로 그 짓거리에 천재적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자부심을 가져도 좋았다.

여자 기숙사와 광장, 밀루아행 공간 이동 마법진, 그리고 달튼 저택에서 나를 찾았다던 금발의 귀공자가 떠올랐다. 당최 뭔 꿍꿍이로 밀루아까지 왔는지 감이 안 와서, 엊그제는 3학년 때 썼던 수정구와 점술용 룬 카드를 꺼냈다. 켈란의 마음을 보여 달라고 주문을 외웠더니 수정구에는 금이 가고 카드는 마구 흩어졌다. 내 마법이 문제였는지 요구 사항이 문제였는지 헷갈렸다.

아무튼 중요한 건 지금 나의 눈앞에도 금발의 귀공자가 있다는 거였다. 그러고 보면 얘는 나에게 있어 가장 예쁜 수정구였다. 그 스스로만큼 켈란 일레스티아의 마음을 잘 아는 존재가 또 있을까.

“저기….”

“‘품위 유지’라는 건 뭐야?”

참으로 아쉽게도, 나에게 예쁜 수정구를 쓰다듬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고민 끝에 입을 연 시점과 켈란이 2조 4항에 의문을 표현 시점은 거의 같았다.

4항. 갑과 을은 연인으로서 서로의 평판을 망치지 않기 위한 품위 유지에 힘쓴다.

그 조항을 작성한 게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니더라도 나는 그녀의 심중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준비라도 한 것처럼 술술 말이 나왔다.

“외모 관리를 게을리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야. 너도 알다시피 난 잘생긴 남자를 무지하게 좋아하거든.”

그랬더니 켈란은 짧게 ‘아.’ 하고 나서 다시는 2조 4항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3조 1항에는 계약 기간이 종료되었을 때 그가 나에게 지불해야 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쓰여 있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평행 세계의 나는 수완이 여간 뛰어난 게 아니었다.

소시민에 불과한 밀루아 자작가 영애로서는 혀를 내두르고도 남을 거금이었다. 데이트에 돈을 못 써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레스티아의 황태자로서는 별것이 아니었나 보았다. 평온한 안색에서는 일말의 동요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계약서의 최하단부에는 서명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켈란이 테이블에 딸린 서랍에서 영원한 맹세용 트롤 깃펜을 꺼냈다. 그건 맹세를 어긴 사람이 진심으로 반성할 때까지 조그마한 트롤들에게 엉덩이를 맞게끔 하는 무시무시한 마도구였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내 거잖아!”

“압수당한 시점에서 더는 아니지. 아카데미에서 사용이 금지된 물건이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

“그럼 넌 뭐야?”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학생회장?”

켈란이 빈 칸에 멋들어지게 서명하고는 내게 영원한 맹세용 트롤 깃펜을 내밀었다. 나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한때 내 것이었지만 지금은 아닌 마도구로 이름 옆에 서명을 갈겼다. 트롤의 영원한 맹세를 상징하는 월계수 문양이 계약서 뒤로 희미하게 떠올랐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의 연애 계약이 완료되었다. 무르지 못하는 꼴이 되고 나니까 거짓말처럼 머리가 차가워져서, 나는 여느 때보다 명석하게 내게 떨어진 날벼락을 인식했다.

켈란과 나눴던 대화들을 돌이켜 보았을 때, 신성 일레스티아의 황태자가 저질 농담 같은 계약서에 서명을 남긴 까닭은 꽤나 명확했다. 시스템을 자극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플로렌스 벨의 세계가 로즈마리 블로썸의 세계와 같은 게임이라면, 배경 인물이 켈란의 여친 자리를 꿰참이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내가 아는 시스템이라면 바로잡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었다.

다만 계약의 상대로 하필이면 아리엘 달튼이 선정된 이유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켈란에게는 거추장스러운 계약서 없이도 뜻대로 부릴 수족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었다. 피츠시몬스에 포진한 일레스티아 첩자 중 누군가는 나보다 예쁘거나 똑똑하거나 착할 것이었다. 어쩌면 세 가지를 동시에 충족할 수도 있었다.

아리엘 달튼이 여친 연기 경력자라는 소문이 평행 세계까지 났을 리는 없고. 통 납득이 안 돼서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농담의 달 연회를 앞둔 학생회실에는 검토가 필요한 서류-대개 분장을 위한 금지 물품 반입 허가 요청이었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시답잖은 수다를 떨기에 적절한 공간이 아니었다. 나는 떠밀리다시피 학생회실을 나섰다.

“아리엘.”

반쯤 열린 문을 발뒤꿈치로 밀어 닫으려는데, 불현듯 이름이 불리었다. 상쾌한 숲 향이 전신을 감싼다 싶더니만 이윽고 커다란 손바닥이 등을 쓸어 올렸다.

“지금이 네가 말한 과시해야 하는 경우야?”

떨떠름하게 묻자 켈란이 귓가에 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알면 어떡해야 되겠어?”

귓속이 간지러워질 만큼 웃은 후에 그가 속삭였다. 나는 버벅거리며 켈란을 끌어안았다. 그랬더니 무슨 아기 어르듯이 ‘옳지.’라고 그러길래, 부끄러워서 죽는 줄 알았다.

***

학생회실의 문이 완전히 닫히고 복도를 조금 걸은 뒤에야 프라스웰 호수에 뛰어든 목적을 요만큼도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이마를 쳤다. 켈란에게 제이든의 비밀이랑 겸사겸사 플로렌스 벨과는 어떻게 되었는지를 듣고 싶었는데 말이다.

심지어는 내가 ‘아리엘’이 아니라 ‘아리’라는 사실도 밝히지 못했다. 연애 계약서에 정신을 모조리 빼앗긴 탓이었다.

“아리!”

잠깐의 고민 끝에 되돌아가려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빨간 머리통이 모퉁이를 돌아 금방 나타났다.

“카일?”

“또 징계야? 이번엔 무슨 짓을 한 거야?”

“또라니.”

가까이 다가온 카일이 노골적으로 내 머리 위를 쳐다봤다. 나는 뚱하니 다물린 그의 입매를 봤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천장에 조각된 옛날 마법사들의 로브 주름에 잔뜩 낀 먼지만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카일에게는 다른 무언가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뭐가 되었건 간에, 그거로 인해 얘의 기분은 완전히 곤두박질쳐 버린 듯 했다.

따지고 보면 로즈마리 블로썸의 세계에서 카일이 나를 맘에 두기 시작한 것은 2학년 때였다. 평행 세계의 카일도 마찬가지라면 그는 지금 나한테 푹 빠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카일의 표정이 영 처참했다. 아무래도 내 머리 위에는 그가 충분히 오해할 만한 단어들이 쓰여 있는 게 틀림없었다. ‘칭호’라고 불리던 거 말이다.

혹은 켈란의 과시용 스킨십을 목격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어느 방향에서 봐도 금전적 이해관계가 느껴지는 포옹이었을 건데, 얘가 나를 엄청 좋아하니까. 자랑은 아니지만.

아무튼 갑자기 풀이 죽은 소꿉친구 때문에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러나 켈란과 나의 연애 계약서에서 가장 강조된 조항은 ‘계약 내용을 발설하지 말 것’이었다. 작은 트롤들의 작은 몽둥이에 엉덩이를 맞는 고통을 가여운 ‘아리엘’에게 선사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재빨리 카일을 흥분시킬 만한 화제들을 주워 삼켰다. 농담의 달 연회와 골 때리는 선물 교환식은 언제나 피츠시몬스 최고의 장난꾸러기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곤 했다.

“드와이어 교수님 분장 준비는 잘되어 가?”

켈란이 검토하던 서류들 중 절대 다수는 인간을 드워프처럼 보이게 하는 변신 도구의 반입 요청서였다. 학생들이 구사하는 허접스러운 마법과 달리 감쪽같은 변신이 가능한 약이나 마도구는 악용될 소지가 다분해 아카데미에서 쉽게 허용되는 종류의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일은 쉽게 허용되지 않는 물건을 쉽게 허가받는 방법에 도가 튼 애였다. 그는 반입 요청서를 적어도 수백 장 작성했다. 만일 켈란이 그 모든 요청서에 불허 도장을 찍는다면, 수백 장을 더 작성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수백 장마저 반려된다면, 글쎄, 어떻게든 목적한 바를 이루겠지. 나는 카일 빌라드가 치고자 마음먹은 장난을 실패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너야말로, 험프리스 교수님의 분노를 사지 않을 자신은 있고?”

그래서 카일은 꽤나 여유가 있었다. 그가 낄낄거리며 받아쳤다. 말하는 것을 듣자 하니 ‘아리엘’은 올해 기어코 험프리스 교수 분장을 하나 보았다. 수염 달린 근육질 아기가 농담의 달 연회장에 뜬다면, 확실히 매혹적인 십 인치의 이마를 자랑하는 중년 여성이 함께인 편이 훨씬 볼 만할 거긴 했다.

“내가 그거 가지고 놀릴 때마다 교수님도 은근 즐기시는 거 같던데,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농담의 달 연회에 참석하는 건 ‘아리’가 아니라 ‘아리엘’이었다. 적당히 대꾸하며 식당 쪽으로 향했다. 피츠시몬스 매점에서 시월에만 판매하는 호박등 토피 때문이었다.

그건 호박 맛이 나고 먹으면 눈과 입에서 잠시 동안 빛을 내뿜는 토피로, 내가 슬라임 푸딩만큼 좋아하는 간식거리였다. 독실한 스티아 신도처럼 번쩍거리며 다니는 재미가 쏠쏠한데 맛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면 서운했다.

나는 호박등 토피를 두 개 사서 하나는 내가 먹고 하나는 카일에게 건네었다. 우리는 곧 매점을 나서는 다른 학생들처럼 아주 성스러워졌다.

“골 때리는 선물 교환식은 어쩔 거야?”

“미친, 카일. 너 말할 때마다 눈 엄청 부셔. 진짜 웃기다.”

“너는 아닌 줄 알아?”

카일이 나를 삿대질할 때 그의 녹색 눈은 졸업 연회 기간 동안 피츠시몬스를 장식하는 조명들이나 채프먼 교수의 이빨처럼 빛났다. 나는 숨이 막힐 만큼 웃다가, 불현듯 정말로 숨이 막히고 있지 않나 싶어졌다.

이윽고 목구멍으로 바람이 새기 시작했다. 착각이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생생한 감각이었다. 가쁘게 뜨는 호흡을 가다듬으려는 순간 귀 안쪽으로 목소리가 울렸다.

“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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