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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77화 (77/178)

77화

그건 나의 동갑내기 사촌 주디스 그린이 적은 것이었다. 동시에, 그녀가 적었다기엔 지나치게 너저분한 글씨이기도 했다. 장식선을 달거나 곡선을 매끄럽게 그리기에는 여유가 없었나 보았다.

자선 연회에서 벌어졌던 불상사 이후, 샌크릭으로 돌아와 얼렁뚱땅 아흐레를 보내기까지 나는 사촌 자매의 안부를 통 접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린 자작가에 편지를 보냈더니, 깃펜을 쥘 만큼은 회복이 되었는지 답장이 금방 왔다. 다만 마음은 아직 추스르지 못한 상태라고 했다. 밤마다 악몽을 꾼다나.

조디는 그녀의 손으로 나를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린 일을 ‘악마에게 몸을 빼앗긴 사건’이라 표현했다. 그녀를 공격한 검은 생물체가 바로 그녀에게 깃들었던 악마라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동의하기 힘든 의견이 아닐 수 없었다. 조디에게 깃든 무언가는 명백히 내가 죽기를 바랐다. 하지만 조디를 공격한 것은 나를 살리고 싶어 했던 것이다. 두 존재는 결코 같지 않았다.

스펜서 공자를 조심해. 편지의 말미에 거듭하여 쓰인 문장이었다. 조디에 따르면 악마는 스펜서 공작가, 특히 제이든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무에 처박히는 순간 뭐를 본 모양인데, 설명하고 싶지는 않은 듯 했고, 외에는 딱히 근거랄 게 없었으므로 그녀의 주장은 합리적이라기보단 당위적으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디의 기발한 억지에는 일말의 진정성이 있었다. 비단 잠꼬대를 하면서도 부채로 입을 가릴 그녀라면 결코 선택하지 않을 쉰내 나는 편지지와 웃긴 글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기억에 주디스 그린의 용기사에 대한 팬심은 켄드라 브래들리에 필적했었다. 열여섯이던 시절과 방향은 다를지언정 크기만은 같았던 것이다.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흉악한 단어를 그녀의 우상에게 붙이게 된 걸까? 제이든 스펜서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악마와 거리가 먼 사람인데.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켈란 일레스티아는 제이든이 가진 비밀에 대해 언급했었다. 나와 조디가 겪은 기묘한 경험과 제이든 스펜서의 비밀이 이어져 있으리라고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수로 그것을 밝혀낸다는 말인가? 카일은, 걔의 지식이 얼마나 방대하든 간에 시스템의 감시를 피해 그걸 나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한계에 부딪혀야만 했다. 나는 근래 피를 토하는 소꿉친구를 지나치게 자주 봐서 완전히 질려 버렸다.

제이든에게 직접 물어본다면 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걔는 아주 많이 착했으니까. 그러나 괜한 화를 부를 가능성도 있었다. 그것이 ‘비밀’로 분류된 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거였다.

문득 내 궁금증을 완벽하고, 또 은밀하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지극히 사소한 문제 하나만 감안한다면, 평행 세계의 켈란 일레스티아가 기꺼이 나의 백과사전이 되어 줄 것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정보에는 정보였다. 내가 그에게 건넨 정보는 무려 세계의 이치였고. 우리의 곰처럼 크고 깜찍한 친구가 숨겨 둔 꿀단지와 관련된 단서 정도는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디와, 패닝턴에게 깃든 무언가의 정체가 시스템임은 거의 틀림이 없었다. 조디를 공격한 쪽은 솔직히, 물음표였다. 파고들 만한 구석이라고는 제이든 스펜서뿐이었다.

같지 않다는 말이 관계가 없다는 말이 되진 않았으므로, 확인해야만 했다. 만일 제이든과 검은 생물체, 검은 생물체와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 있다면 여간 커다란 문제가 아니었다.

“있잖아, 죽지는 않지만 죽을 만큼 아플 일이 뭐가 있을까? 근데 정말 죽지는 말아야 해.”

그래서 대뜸 말했다. 다행히, 성실하기 그지없는 나의 범생이 친구는 엉뚱한 질문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 아리엘. 카드놀이를 하면서 나누었던 애덤 월시 고문법들을 다 잊었니? 개학하면 진짜로 걔 속옷에 불개미를 넣기로 했잖아.”

“그것도 좋지만, 내 말은 목이 졸린다든가, 칼에 찔린다든가, 이런 거 있잖아.”

“나는 물론 너를 지지하지만 우리 폐하가 가만히 계시지는 않을 텐데. 월시 후작이 폐하 딸랑이 중 최고라잖아.”

“아니이. 월시를 어쩌려는 게 아니라.”

내가 신경질을 부리자 브리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막상 그렇게 물으니 대답할 말이 없어서, 브리에게서 시선을 돌려 청록색으로 반짝이는 호수나 쳐다봤다. 반투명한 날개를 지닌 곤충들이 낮게 나는 모양새는 매우 평화로웠고, 나에게 어떠한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브리, 혹시 수영 잘해?”

“당연히 끔찍하게 못 하지. 왜?”

“닐라!”

내가 갑자기 일어나 버린 바람에 나룻배가 크게 기울었다. 브리는 질겁을 하며 노를 부여잡았다. 수영에 젬병이라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나 보았다.

호숫가의 늙은 버드나무에 기대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던 코넬리아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카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연년생 누이의 독서를 방해하기 위해 냄새나고 끈적한 슬라임들을 풀밭에 풀어 놓는 중이었다.

내가 높이에 공포를 느낀다면 카일은 깊이에 공포를 느꼈다. 옛날에는 물놀이도 곧잘 했고 딱히 트라우마가 될 만한 사건도 없었건만,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그렇게 됐다.

하긴 엄청 대단한 계기가 있어야 뭐를 싫어할 자격이 생기지는 않았다. 모든 아이들의 침대 밑이나 벽장 속에 사는 괴물이 두려운 이유가 어디 따로 있었던가.

아무튼, 그래서, 당장 머릿속에 맴도는 꿍꿍이에 나의 소꿉친구를 끼워 넣기란 어려울 거 같았다. 그리고 그건 우리에게 있어 되게 드문 경우였다. 나는 입가를 손으로 감싸고 크게 외쳤다.

“닐라! 수영 잘해?”

“타메니 강의 세이렌을 뭐로 보고!”

코넬리아가 괘씸하다는 듯 받아쳤다. 참으로 흡족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곧바로 나룻배의 가장자리로 향했다. 괜찮을 거야. 아리엘 달튼의 긍정적인 그림자가 희망차게 말했다. 지금껏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에 처했지만 결국엔 헤쳐 나왔잖아. 너는, 그러니까, 행운의 어쩌고야. 레프러컨의 초록 바지라고.

게다가 이번에는 타메니 강의 세이렌이 있으니까. 스스로를 다독이며 나아가던 중에 코넬리아 빌라드와 눈이 마주쳤다. 이마에 손날을 대고 인상을 찌푸린 모습이 그녀의 남동생과 똑 닮아 있었다. 사이는 그렇게 나쁜데 말이지. 다시금 손나팔을 만들면서는 약간 실실거렸다.

“만일 위험한 상황이 오면 네가 날 구해야 해!”

“아리엘? 너 미쳤….”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건지 파악한 브리아나가 경악했다. 새된 비명을 뒤로하고 발을 굴렀다.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가 뺨을 마구 밀어냈다.

가라앉는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나룻배의 바닥면이 아득하게 멀어서 나도 모르게 허우적거렸다. 무모했던 게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을 때에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코로 입으로 물이 들어온다 싶더니 금방 힘이 빠졌다.

그러고 나서는 아주 고요하고 또 신비로운 풍경이 이어졌다. 바스라져 내려오는 햇볕 사이로 소용돌이치는 기포들의 움직임이 예술적으로 느껴졌다. 고통은 길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

“…실히, 플로라를 위해 존재하는 세계라면 움직이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겠지. ‘아리’의 주장을 검증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으응….”

녹청색 물보라가 사라진 자리에 보편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에 부합하는 이목구비가 나타났다. 눈두덩이를 꾹 누르며 대충 대답했다.

“하지만 몇 가지가 걸리는군. 계약 조건을 변경해도 될까?”

“내 동의를 구하는 거야?”

“물론 아니지.”

남의 의견 따위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아온 일레스티아의 황태자가 미소 지었다. 나는 공허하게 마주 웃었다.

켈란과 나의 사이에 놓인 테이블에는 웬 종이가 있었다. 얼핏 보니 무슨 계약서 같았다. 동그라미로 감싸여 강조된 숫자와 끄트머리를 멋지게 구부린 글씨의 생김새가 퍽 익숙했다.

프라스웰 호수의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동안, 나는 머릿속으로 평행 세계로 넘어갔을 때 맞닥뜨릴 법한 여러 상황들을 상상했다. 이렇게 창의적으로 흥미로운 상황까지는 상상하지를 못했다. 플로렌스 벨의 세계이든 로즈마리 블로썸의 세계이든 나에게는 문서까지 작성해 가며 켈란과 약속할 만한 것이 없었다.

별안간 불길한 예감이 뒷목을 두드렸다. 아주 불길한 예감 말이다. 일레스티아의 황태자는 밀루아 자작가 영애가 계약 같은 거를 맺기에 절대 좋은 상대가 아니었다. 계약서의 첫 조항을 읽고 나니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소름이 쫙 끼쳤다.

제1조. 계약의 목적

1항. 본 계약은 아리엘 달튼(이하 을)이 켈란 일레스티아(이하 갑)의 연인으로서 준수할 사항을 상호 확인 하에 명문화하기 위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이든에 이어 켈란의 여친 행세마저 해야 한다니 당장이라도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스펜서 저택에서의 경험 이후로, 나는 스스로의 연기력 부재를 통감하고 은밀하게 간직해 왔던 대배우의 꿈을 완전히 접어 버렸다. 더구나 피츠시몬스에서 학생회장의 여친이 되기란 탤론에서 ‘익명의 자작가 영애’가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주목도를 가질 거였다.

제2조. 계약 상세

1항. 본 계약의 유효 기간은 갑과 을이 상호 동의한 날짜로부터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의 졸업 연회 일까지이다.

2항. 데이트는 일주일 3회, 최소 4시간을 기준으로 하며 갑이나 을의 사정으로 이것이 지켜지지 못할 경우 반드시 보충되어야 한다.

3항. 데이트 시 발생하는 비용은 금화 50개까지 갑이 부담한다. 만일 50개가 초과되는 경우, 갑은 초과금만큼 계약 완료 시 을에게 지불할 금액에서 제할 수 있다.

“데이트는 일주일에 두 번으로 할게. 네가 생각하는 만큼 한가하질 못해서 말이야. 주중에 하루, 주말에 하루, 대신 주말은 여덟 시간 이상으로. 되도록 많은 학생들의 눈에 띄어야 하니까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피니건 거리에서 만나는 게 좋겠어.”

“어? 어어….”

“금화 50개… 그건 빼도 될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네. ‘데이트 시 발생하는 비용은 전액 갑이 부담한다.’로 바꿔 줄래?”

잠깐 훑어본 것만으로 계약서의 내용을 전부 외워 버린 모양인지, 켈란이 내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에게서 깃펜을 받아 들어 2조 3항의 ‘금화 50개까지’에 교차되는 두 개의 대각선을 긋고 ‘전액’이라고 썼다. 뒤 문장은 완전히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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