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76화 (76/178)

76화

신사인 척하기를 좋아하는 카일 빌라드는 달튼 저택에 들를 때면 항상 나를 방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나는 브리아나와 자기 전까지 카드놀이를 하기로 약속했으므로 2층 왼쪽 복도로 가야 했지만, 내 방에 두고 온 것이 있었던 탓에 오른쪽으로 꺾었다. 카일은 나와 브리아나가 갈림길에서 반대로 가자 찰나 멈칫하다가, 사용인을 브리에게 딸려 보내고 나를 따라왔다.

“왜 이리로 와?”

“알면서 왜 물어?”

카일이 콧등을 긁적이며 짜증을 냈다. 나는 그를 잠깐 쳐다본 후에 열린 문의 안쪽을 턱짓했다.

“들어와. 너한테 줄 거 있어.”

가지고 나와서 복도에서 주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 거 같았다. 부모님은 올해 부쩍 나의 교우 관계에 신경 쓰기 시작해서, 최근에 뽑은 사용인 애들은 죄다 귀가 밝고 소문에 훤했다.

그러고 보면 내 방에 카일을 들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꼬마 벤지처럼 주춤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는 카일도 비슷한 감상을 가진 듯했다.

“감회가 새롭네.”

그가 말했다.

“대충 10년 만인가?”

“훨씬 더 됐지, 나한테는…. 와, 너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카일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베개 맡에 놓인 뜨개 인형을 집어 들었다. 그건 나의 외할머니 헬렌이 신시아나 벤자민 같은 동생을 요구하는 ‘아가 아리’에게 떠 준 곰돌이로, 이름은 ‘탬’이었다.

탬의 머리통에서 귀가 돋아나는 부분은 부드러운 미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은 실로 꿰매어져 있었다. 빌라드 저택의 울보 도련님이 그의 소꿉친구에게 보들보들한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머지-왜냐면 모든 동생은 곰돌이가 아닌 인간이어야 했으니까-탬에게 무시무시한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내 동생인데 그럼 버려?”

내가 샐쭉하게 쏘아붙이자 카일은 스스로의 과거가 떠올랐는지 약간 민망스러워했다. 나는 그에게서 탬을 받아 들고 그것을 내 얼굴 높이로 들었다.

“마침 잘됐다. 얘한테 사과해.”

막무가내로 우겨 대자 카일은 의외로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미안, 탬.”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고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너에게도 잘못이 있어.”

“얼씨구.”

“너 때문에 아리가 나랑 안 놀아 줬잖아.”

마디가 굵은 검지손가락이 탬의 배를 간지럽혔다. 나는 그가 간지럽힌 것이 내 배라도 되는 마냥 몸을 움츠렸다. 품에 닿는 뜨개 인형을 꼭 껴안자 보들보들한 감촉이 가슴에 넘실거렸다.

불현듯 재채기처럼 말이 터졌다.

“야, 내가 왜 좋아?”

“뭐?”

“언제부터 좋았어?”

조금 뒤로 걸어 침대에 엉덩이를 댔다.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을 두드리자 카일은 잔뜩 당황해서 귓불과 뒷목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그러고는 내가 가리킨 데서 애매하게 먼 자리에 조심조심 걸터앉았다.

“갑자기?”

“그냥, 궁금해져서. 안 돼?”

“안 될 거는 없지. 알았어. 2학년 때, 네가 나한테 월시랑 사귀게 되었다고 그랬잖아.”

“윽. 그건 진짜 내 인생 최악의 선택이었어.”

인중에 똥이라도 달린 듯이 얼굴을 찌푸렸더니 카일은 짧게 웃었다.

“아무튼. 나 그때 엄청 화났단 말이야. 너는 몰랐겠지만.”

“어떻게 몰라? 이마에 핏대 세우고 막 오버했으면서. 왜 화났는지는 몰랐는데.”

대충 그가 여친을 사귀기 전에 내가 먼저 남친을 사귀어서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자존심 상해 가지고.

직접 밝히기를, 원래 카일도 비슷하게 생각했었던 모양이었다. 근데 저녁 먹고 씻고 자려고 딱 누웠는데 갑자기 엄청 억울해졌다고 했다. 곰곰이 되짚어 보니까 열받은 이유가 내가 남친을 사귀어서는 아니었다는 거다. 애덤 월시를 사귀어서지.

“카일 빌라드가 아니라.”

그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댓 발 나온 주둥이로 마음에도 없는 축하의 말을 지껄이던 열여섯의 소꿉친구에게 치사한 마음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볼이 무지 후끈거렸다.

“그러고 나니까 네가 엄청 예뻐 보이더라고.”

“그만 하자, 이제. 재미 하나도 없다.”

“난 재밌는데. 그리고 네가 물어본 거잖아.”

“대답 다 했잖아!”

“아직 아니거든. 어디까지 했지? 너를 왜 좋아하냐고 물었지? 예뻐서 좋아. 엄청 예쁘다고, 너. 머리색은 햇볕에 닿은 호두나무 줄기나 다람쥐 꼬리 같고, 눈은 프라스웰 호수의 아주 깊은 곳에 떨어뜨린 사파이어 같아.”

카일은 칭찬을 반복적으로 들으면 구운 오징어가 되어 버리는 나를 놀리기 위해 자꾸만 미사여구를 덧붙여 댔다. 내가 진절머리를 치며 귀를 막았을 때에는 손목을 붙잡아 누르며 능글맞게 미소 짓기도 했다.

“아리.”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문득 귀에 익은 애칭으로 나를 부르는 카일의 음성이 다소 낮아진 것 같다고 느꼈다. 묘한 말투에 고개를 들었다가 시선이 바로 맞았다. 내 눈이 프라스웰 호수에 떨어뜨린 사파이어라면 그의 눈은 스티아 신전의 성화 속에서 불타는 에메랄드 같았다.

“나 지금 너랑 엄청 뽀뽀하고 싶어.”

이윽고 입술에 손바닥이 닿았다. 나와 나의 소꿉친구가 이전에 나누었던 ‘친구 뽀뽀’의 준비 동작이었다. ‘해도 돼?’ 너무 간절하게 묻는 통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내게서 허락을 받아 내자마자 그는 몇 번이고 스스로의 손등에 입술을 부딪쳤다. 여전히 경건한 의식 같은 행위였으나, 이번에는 약간의 갈급한 느낌이 있었다.

그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내게서 떨어졌을 때 나는 발바닥을 핥다가 종아리와 허벅지, 아랫배로 올라와 종국에 심장을 관통하는 묘한 기분에 몸서리쳤다. 그래서, 재빨리 새로운 화제를 꺼내어 우리로 하여금 방금의 간지러운 경험을 곱씹지 않게끔 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탤론에 다녀왔잖아.”

내 침대의 반대편 벽에는 손바닥만 한 틀에 내 이름자를 하나씩 수놓아서 노끈으로 꿴 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아래로는 작은 서랍장이 있었다. 그것을 뒤지다가 주먹을 말아 쥔 채 돌아서자 카일이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선물이야?”

“의리 없는 어떤 친구는 채드록에 몸만 다녀왔다지만, 나는 그렇게 가차 없질 못해서.”

“작년에 사다 준 손수건은 죽어도 안 쓰겠다며.”

“‘나는 빨간 머리를 좋아해’라고 새겨져 있는데 그걸 어떻게 써!”

“빨간 머리 축제 기간에 채드록에서 파는 게 다 그렇지 뭐.”

일리가 있는 소리긴 했다. ‘나는 빨간 머리를 좋아해’는 빨간 머리 축제의 슬로건으로, 축제가 열리는 동안 채드록에서는 손수건이나 깃펜은 물론 음식에까지 그 문구를 새겨 팔곤 했다(라즈베리 과육이 씹히는 레드 벨벳 컵케이크의 맛을 잊지 못할 것이다. 비록 케이크를 빙 둘러 빨간 머리에 대한 질척거리는 사랑이 표현되어 있기는 했으나, 내가 먹어 본 컵케이크 중 단연 최고였다.). 나는 적당히 수긍하며 손 안의 물건을 카일에게 내밀었다.

“회중시계?”

카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약간 부끄러워져서 빠르게 말했다.

“네 거를 지금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근데 왜 두 개야?”

“거기에는 깊은 사연이 있는데….”

브리아나와 벨카나 지역에 갔던 날에 나는 코른토 서점보다 거기서 5분쯤 가면 있는 시계 장인의 가게에 먼저 들렀다. 다미앙 할아버지의 회중시계가 지니는 가치에 필적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내 죄책감이 덜어질 만큼은 훌륭한 시계를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나의 소지금 내에서 살 수 있는 시계들은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뚜껑을 열면 반투명한 유니콘의 형상이 나타나는 회중시계였다. 가격표에는 숫자가 아닌 글자가 있었다. ‘가격 문의’.

그래서 나는 레프러컨 세 마리와 승부했고 처참하게 패배했다. 끝내 수중에 남은 금화 일곱 개로 일등 시녀의 소원을 이루고 나니 선택지가 없었다. 부품의 아귀가 맞지 않는 투박한 은색의 회중시계는 그때에 산 것이었다.

다른 하나의 회중시계는, 놀랍게도, 가격표에 ‘문의’라고 쓰여 있던 바로 그 시계였다. 분침과 초침 사이에서 튀어나온 뿔 달린 말은 자신의 주인이 여자에서 남자가 된 게 불만스럽다는 듯이 발을 마구 굴렀다.

당최 어떻게 된 영문이냐 묻는다면 전적으로 에드가 라모스의 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이든 스펜서 여친 선발 대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스펜서 공작가는 앞으로 몇 년은 자선 연회를 열지 않아도 될 만큼의 기부금을 모았다.

선량한 제이든의 선량한 어머니는 당장 필요하지 않은 금화들을 재능 기부자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그것의 반절 이상이 사자 가면을 쓴 강도가 지불한 것이었으므로, ‘익명의 자작가 영애’에게는 특히나 흡족스러운 보상이 주어졌다.

“확실한 건 어느 쪽이든 정당한 값을 내고 구매했다는 거지.”

“엄청 비싸 보이는데?”

“내 노동의 대가야. 고맙게 받도록 해.”

일부러 생색을 많이 냈다. 그 편이 덜 쑥스러울 것 같았던 까닭이다. 그러자 나를 잘 아는 소꿉친구는 감사를 표하는 대신 유니콘에게 붙일 우스꽝스러운 별명들을 나열하기를 택했다. 정말이지 완벽한 대처였다.

***

달튼 상단의 사무실에서 마차로 반 시간만 가면 프라스웰 호수였다. 나는 상단 업무를 배운다는 핑계로 지긋지긋한 뎀시 준남작에게서 벗어나 간만에 자유를 누렸다.

“너는 상단주 한다는 애가 장부 정리하고 예산 짜는 걸 그렇게 싫어하면 어떡해?”

“모르나 본데, 브리아나 모슬리. 진정한 상단주는 그런 골치 아픈 짓은 안 해. 달튼 상단 보면 몰라? 시장이 어쩌고 투자가 어쩌고 하면서 여행이나 다니잖아. 숫자 놀음은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라고.”

“어휴, 얄미워.”

“그래도 상단주 대리 콜슨은 나와 꽤 친해. 뎀시 준남작과는 다르게. 그 사람은 정말로 나를 볼 때마다 때리고 싶다는 표정을 짓는다니까.”

나와 브리아나는 프라스웰 호수 한가운데에 작은 나룻배를 띄우고 잔물살에 흔들리는 기분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브리가 호수에 담갔던 손끝을 튕겨 내게 물이 튀도록 했다.

“나는 그를 충분히 이해하겠던데, 이 악마야. 미스터 뎀시의 깃펜을 자동으로 맞춤법이 틀리는 깃펜으로 바꿔 놨다며? 범생이들한테 그게 얼마나 괴로운 형벌인지 알아?”

‘합계’를 ‘학개’로 쓰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던 뎀시 준남작이 떠올라 웃음을 참았다. 하지만 그는 망나니 버릇을 고쳐야 한다며 나를 장난꾸러기의 무덤으로 유명한 일레스티아의 신학교에 처박으려 했던 장본인이었다. 엄청나게 지루해질 뻔했던 내 인생에 비하면 ‘학개’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악마라. 브리아나의 아낌없는 비난에 불현듯 전날 밤 눈에 담았던 글씨들이 생각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