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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75화 (75/178)

75화

오후가 되자 알리사 달튼과 로한 달튼 그리고 카일 빌라드가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이건 또 뭐야?”

“이거? 사람한테 이거?”

“아리! 내 아가!”

제 집인 양 위풍당당하게 문턱을 넘는 카일과 투닥거리는 사이 엄마가 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나를 꼭 껴안고 마구 흔드는 엄마에게서 바닷바람의 짠 내가 물씬 났다. 나는 몸을 비틀어 그녀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 하지 마. 나 아가 아냐.”

평소 같았으면 마주 안고 홀을 한 바퀴는 돌았겠지만, 카일이 있어서 괜히 올해부터 숙녀 하기로 한 신시아처럼 점잖게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카일이 입꼬리를 슬금슬금 올리며 ‘아가 아리?’라고 했다. 32절까지 부르려고 시동을 거는 표정이었다.

팔꿈치로 카일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아주 마베릭 빌라드한테 못된 거만 배워 가지고.

“왜 셋이서 같이 와? 오다가 만났어?”

“달튼 항에 배가 들어올 때가 된 거 같아서, 사위 노릇 좀 해 봤지.”

“까분다, 또.”

내가 주먹을 휘두르자 카일은 아빠 뒤로 쏙 숨어들어 갔다. 사용인들이 옮기는 궤짝의 내용물을 검토하다 말고, 아빠가 적극적으로 카일을 변호했다.

“짐이 너무 많아서 혼났는데 덕분에 살았구만, 왜 구박을 하냐. 이거나 받아라, 아리.”

“또 이상한 거 사 왔구나!”

습관적으로 타박을 던지는 와중에도 내 입꼬리는 잔뜩 치솟아 있었다. 아빠는 교역선을 타고 어디 다녀올 때마다 항상 내게 흥미로운 선물을 사다 주곤 했는데, 대개 여행객들을 등쳐 먹는 용도의 장난감이었다.

이국적인 장난감은 언제나 상인의 말썽쟁이 외동딸을 흥분하게 했다. 질이 좋지 않을수록 더욱 그랬다. 그것들은 끔찍하게 내구성이 낮았으며 결코 예상한 대로 동작하는 법이 없었다.

일례로 지난 겨울 방학에 북 대륙에서 사 온 장난감은 쥐고 흔들면 안에 들어 있는 눈 표현제가 눈사람 모양으로 뭉치는 수정구였다. 싸구려 마도구가 대개 그렇듯 이것 또한 설계의 어느 부분이 단단히 잘못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머리와 몸의 비율이 잘 맞았지만 갈수록 몸보다 머리가 커졌다. 만들어질 때마다 스스로의 커다란 머리를 증오하며 한탄하던 눈사람 덕분에 눈물을 쏙 뺐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이번에 받은 상자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화를 내려고 하자, 아빠는 그러지 말고 안에 손을 넣어 보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하자, 맙소사, 부드러운 무언가가 만져졌다!

“이게 뭐야?”

“투명 옷감이란다. 월말부터 정식으로 들여 올 거야. 아리, 너 투명해지는 마법이 얼마나 귀한 줄 알지?”

아빠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엄마는 눈을 세모꼴로 뜨고 그에게 들리지 않게끔 입모양으로 뭐라고 했다. 아마도 엘프제 날염 원단에 금화를 그만치 쓰고도 또 옷감을 사들이기로 결정한 아빠가 불만스러운 거 같았다.

“미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투명 옷감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잽싸게 집어 들고 허리춤에 둘렀다. 집중하면 약간의 굴곡이 눈에 들어왔지만, 대충 보면 골반부터 아래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카일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모자 달린 로브 같은 거 지으면 딱이겠다. 네 숙원도 이룰 수 있겠는걸.”

“완전 범죄 말이지.”

월시의 환상적인 부고가 들리게 될 날도 머지않았다. 나는 음흉하게 웃다가 말을 이었다.

“그것도 좋지만, 나의 또 다른 숙원은 농담의 달 연회에서 듀라한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거였다고.”

“야, 네가 그러면 내 메두사가 너무 초라해지잖아! 올해는 꼭 ‘최고의 농담’ 트로피를 따야 된단 말이야!”

코넬리아 빌라드의 방에도 놓인 ‘최고의 농담’ 트로피 없이 졸업한다는 건 카일에게 치욕이나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나라고 해서 피츠시몬스의 장난꾸러기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큰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카일과 다투는 동안 나는 쥐고 있던 투명 옷감을 놓쳐 버렸다. 우리는 그것이 떨어진 위치를 찾기 위해 저녁이 준비되는 내내 홀의 바닥을 더듬어야 했다.

간만에 만찬장에 불이 들어왔다. 부모님이 안 계실 때 나와 브리는 내 방이나 번화가의 식당에서 대충 끼니를 때워 왔다.

피츠시몬스 매점의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나는 그다지 미식가라 할 수 없었다. 브리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일은 달랐다. 어린 시절처럼 까다롭게 굴지는 않았으나 어떤 요리에서 훌륭한 점과 아닌 점이 무엇인지를 잡아낼 줄 알았다. 또 달튼 자작 부부는 하도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요리를 접하다 보니 어지간한 맛에 심드렁했다.

그렇다 보니 접시를 내려놓는 조리장의 표정이 사뭇 결연했다. 오늘의 메뉴는 버터에 살짝 볶은 토끼 고기에 버섯과 향신료, 크림소스를 곁들인 프리카세였다.

“시험은 잘 봤니, 아리?”

잘게 잘린 토끼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자마자 엄마가 물었다. 나는 제대로 씹지도 않은 고기를 물로 넘기고 가슴을 두드리며 변명했다.

“나쁘지는 않았어….”

“피츠시몬스는 왜 성적표를 안 보내 준다니.”

“말했잖아, 날다람쥐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 중이라니까. 난 걔들을 지지해. 요즘에 사과 한 알에 막 열 시간씩 일하는 날다람쥐가 어디 있어?”

서재의 벽난로에서 재가 된 성적표를 떠올렸다. 나쁘지 않다는 건 좋지도 않다는 뜻이었고 나한테 나쁜 성적의 기준은 유급이었다. 어차피 성적이 어떻든 나의 미래는 시스템과 블로썸에게 달려 있기도 했다.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하자 카일은 킥킥거렸고, 브리아나는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나는 새털같이 가벼운 룸메이트의 주둥이에서 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떨어뜨린 포크를 줍는 시늉을 하며 속삭였다. ‘아니까 조용히 해.’

사용인이 새 포크를 가져다주자 엄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란히 앉은 나와 브리, 그리고 카일을 번갈아 쳐다봤다. 우리는 동시에 그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도 된다는 듯이 양송이버섯의 한쪽 면에서 크림소스를 긁어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나서 아빠가 끼어들었다.

“탤론에는 뭐 하러 다녀온 거냐?”

나를 도우려고 했던 모양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억지로 끼워 넣은 퍼즐 조각처럼 어색하게 바뀐 화제 역시 그다지 반갑지가 않았다. 나는 완두콩을 포크로 찍기 위해 노력하는 카일을 슬쩍 본 다음에 대답했다.

“친구 만나러.”

“친구 좋아하시네.”

카일이 참지 못하고 빈정거렸다. 그 브리아나-확성기-모슬리도 가만히 있는 와중에 말이다! 테이블 밑으로 못된 발등을 짓밟자 그가 ‘아, 왜.’ 하고 짜증을 부렸다. 아무래도 빨간 머리의 날 행사에 참여하느라고 내 여행 가방에 숨어들어 가지 못한 것이 아직도 분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빌라드 백작가가 빨간 머리에 진심인 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시치미를 떼며 냅킨에 잡힌 주름을 펴는 동안 사용인이 쟁반에 와인 한 병과 치즈 한 덩어리 그리고 편지 한 통을 가지고 들어왔다. 와인과 치즈는 엄마에게, 편지는 내게 전해졌다.

“지나의 편지에 따르면, 네가 스펜서 공작가의 연회에서 불 쇼를 선보이고 강도에게서 돈을 받았다던데.”

“오해가 아닌 부분이 없네.”

지나는 그린 자작 부인, 그러니까 주디스의 어머니였다. 대체 조디와 걔의 형제들은 나에 대해 뭐라고 지껄인 걸까? ‘익명의 자작가 영애’의 정체를 숨겨 달랬더니 그거 말고는 다 말한 듯했다.

알 수 없는 생물체에 의해 나무에 처박힌 조디가 입은 부상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었다. 나는 의식이 돌아온 그녀가 나를 공격했던 존재가 아니라 내가 알던 사촌 자매라는 것을 확인한 다음 치료사와 산양 가면을 쓴 자레드 그린을 찾았다. 자레드는 ‘찢어진 바지 사건’ 이후로 내게 지독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걔를 데리고 나오기 위해서는 제법 애를 써야 했다.

나에게는 적당하게 둘러댈 열두 가지의 거짓말이 있었다. 하지만 조디는, 내가 열심히 꾸며 낸 사정을 떠들 겨를도 없이, 간단한 응급조치가 마무리되자마자 도망치듯 스펜서 저택을 떠났다. 그건 꽤나 이상한 태도였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얘가 거기서 제이든 스펜서랑 분위기가 얼마나 좋았는지 두 분이 아시면 깜짝 놀라실걸요.”

“제이든 스펜서? ‘그’ 제이든 스펜서 말이니?”

생각에 잠겨 있느라고 그만 나의 수다쟁이 친구를 막지 못했다. 브리아나의 과장스러운 묘사에 엄마는 거의 까무러치려고 했다.

나는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찾기 위해 머릿속 농담 사전을 재빨리 뒤졌다. 어른들이 듣기에 적절치 않은 농담과 브리아나가 알아듣기 어려운 밀루아식 농담을 제외했더니 케케묵은 옛날 농담만이 남았다. 내가 스티아 신도가 기르던 두꺼비에 얽힌 설화를 허겁지겁 꺼내자 만찬장의 모든 사람이 정색했다.

“아빠는 네가 당연히 네 소꿉친구와 결혼할 줄 알았는데.”

재미없는 농담으로 분위기가 식은 후에도 화제는 전환되지 않았다.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는 아빠에게 카일이 가볍게 대꾸했다.

“저는 그러고 싶은데, 쟤가 싫다잖아요.”

“오, 아리! 미스터 빌라드가 어디가 어때서 그러냐!”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아리엘 달튼 청문회에 그만 밥맛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뭐라고 항변하는 대신 토끼 고기를 계속해서 결대로 찢었다. 그러자 카일이 얕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사뭇 밝은 말투였다.

“참, 꼬마 벤지가 올해 빨간 머리의 날에 ‘가장 멋진 빨간 머리’로 선정된 거 아세요? 당분간은 코가 높아져 있을 것 같던데요.”

카일의 막내 동생인 꼬마 벤지, 벤자민 빌라드는 명화 속 아기 천사처럼 통통한 뺨과 브리아나 모슬리 뺨치는 곱슬머리를 지닌 일곱 살배기였다. 나는 평소에 마베릭의 다리에 매달려 우물거리기나 하던 벤자민이 그가 취한 자그마한 영광에 우쭐대는 모습을 상상했다. 너무 귀여울 거 같아서 웃음이 다 나왔다.

“신디는? 엄청 질투 났겠는데.”

“신시아의 드레스는 거기서 제일 화려했지. 하지만 빨간 머리랑은 영 아니었어. 정말로 가족 전부가 걔한테 노란색이나 오렌지색 계열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너도 알다시피, 빌라드는 고집이 세잖아.”

카일의 몇 마디에 아리엘 달튼 청문회는 막을 내렸다. 이제 부모님은 나와 제이든 사이에 있었던 일보다 신시아와 벤자민 사이에 있었던 일이 더 궁금해진 것 같았다. 신디가 벤지의 뺨을 꼬집고 벤지가 신디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은 이야기가 나올 때 나는 최근에 브리가 오브라이언 공녀의 두피에 흔적을 남긴 썰을 풀었다. 브리아나 모슬리를 제외하고 다들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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