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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74화 (74/178)

74화

에드가와는 달리 조디는 탤론 근교에 사는 미혼의 귀족 여성이었다. 제이든에게 청혼서를 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물론 에드가도 보낼 수야 있겠지만, 아무튼.). 내가 뻔뻔스러운 낯으로 어깨를 으쓱이자 조디는 기함을 했다.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닫았다가, 미간을 구겼다가, 폈다가 야단이더니 끝내 쌀쌀맞게 말했다.

“뭐, 됐어. 내가 안 될 바엔 너라도 공작 부인이 되면 좋지. 그냥 우리가 네 사촌이라는 거만 잊지 말아 줬으면 좋겠네.”

“왜 이렇게 선선해? 목숨 걸고 있는 거 아니었어? 제이든 스펜서 여친 선발 대회에?”

“목숨은 걸어야지! 스펜서 공작가의 여친 선발 대회, 실수, 자선 연회가 얼마나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악기 들고 나온 애들 심상치 않은 거 못 느꼈어? 모르긴 몰라도 탤론의 젊은 여자 예술가는 여기 다 모였을걸. 지금쯤 후원자를 물었으려나.”

“여친 선발 대회래.”

“네가 하도 그러니까 나도 헷갈리잖아! 내 말은, 스펜서 공자를 노리든 아니든, 거기 선다는 거 자체가 밀루아 중앙 사교계에서 스스로를 선보일 절호의 기회였다는 거야. 우리 같은 하위 귀족한테 그게 어디 흔하니? 물론 그와 잘되기를 바라기도 했지만, 그건 물 건너갔고.”

“왜?”

“당연히 ‘익명의 자작가 영애’ 때문이지! 간단히 제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까 전혀 아니잖아. 말이 나온 김에, 그가 네게 아주 푹 빠진 모양이더라. 춤을 출 때는 아예 다른 남자 손에 널 넘기려고 하지 않던데.”

그게 그렇게도 보이는구나.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볼을 긁적이다가 대꾸했다.

“그렇게 됐다.”

“좋겠다, 그래. 아까 그 사자 가면은 스펜서 공자의 부하지? 네가 무안하지 않게 손을 써 준 거 같던데.”

‘아니, 걔는 나랑 제이든이 진짜 사귀는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대륙법을 어기고 강도질까지 해 가면서 초대한 적 없는 연회에 참석한 나돈 왕자인데.’ 에서 오해를 부를 만한 요소를 거르고 나니 남는 단어는 얼마 없었다.

“걔는… 그냥… 강도야.”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냥 강도일 때에 훨씬 큰 오해가 생길 거 같았다. 특히 그 강도가 수상쩍을 만큼 많은 금화를 쓰고 사라진 상황이라면 따질 것도 없었다. 나는 즉시 말을 덧붙였다.

“제이든의 부하기도 해.”

“서 스펜서는 조건 없이 사람을 쓰는구나… 하긴, 그러니까 너랑도 만나는 거겠지.”

조디가 감탄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가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는 제이든 스펜서에게 정말로 감동한 건지 아니면 나와 강도를 같은 선상에 두고 비꼬는 건지 헷갈렸다. 조디가 신봉해 마지않는 ‘사교계 화법’에 따르면 후자였다.

아무튼 어영부영 내놓은 허접스러운 설명으로도 납득을 해 줬다는 거 자체는 나한테 다행이었다. 그래서 착하게 웃기나 했다. 당장 저자세로 나가야 되는 때이기도 해서 그랬다. ‘비밀은 지켜 줄 거지?’ 나는 허영심 많은 주디스가 약간 우쭐해질 만큼 비굴하게 굴었다.

“물론이지. ‘익명의 자작가 영애’의 이면이 폭로된다고 해서 내가 무슨 이득을 보겠니. 언제 돌아가? 밴포드에는 안 들를 거야? 자레드가 찢어진 바지 사건으로 아직도 너한테 이를 갈고 있던데.”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걔가 내 드레스에 개똥을 발라 놔서 나도 걔 바지를 뜯은 거야. 우리의 차이점은 나는 입기 전에 그걸 발견했고, 걔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뿐이었지.”

“뭐야, 그런 거였어? 주의력이나 기르라고 해야겠네. 하여간 남자들은 쪼잔하다니까.”

“동감이야. 아놀드 삼촌에게 안부나 전해 줘.”

찢어진 바지 사건이 없었어도 나는 밴포드로 가지 못했다. 부모님이 달튼 항에 거의 다다랐다는 소식을 받았기 때문이다. 알리사 달튼과 로한 달튼은 모든 교역선의 갑판에서 다투기를 일삼았으므로, 돌아올 쯤엔 항상 냉전 상태였다.

그러면 이제 그들의 사랑스러운 외동딸이 나설 차례였다. 아리엘 달튼의 혀가 조금이라도 빡빡했더라면 지금쯤 달튼 상단은 반쪽이었을 거다. 내가 그 빌어먹을 엘프제 날염 원단을 증오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조디?”

불현듯 나의 사촌 자매가 죽은 듯 조용해졌다고 느꼈다. 미로 정원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한 발을 내딛은 시점이었다. 기묘한 예감에 곁을 보니 주디스는 계단참 끄트머리에 우뚝 서 있었다. 둥그런 눈에 반사되는 빛이 하나도 없었다.

[치명적인 오류가 VMM+00002F20의 0028:C0003F20에서 발생하였습니다.]

부자연스러우리만큼 감정이 배제된 말투에서 그리 오래지 않은 기억을 끄집어내는 도중에 다리가 꼬였다. 가까스로 몸을 돌려 중심을 잡나 싶었는데, 접부채의 뒤꽁무니가 가슴팍을 찔렀다. 가볍게 미는 힘. 내 발을 완전히 떠오르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추락은 춥고 외로웠다. 목숨의 위기에 여간 자주 처한 게 아니다 보니 사뭇 덤덤한 감상이 들었다. 애초에 계단이 길기는 해도 가파르지가 않아서 치명적인 높이가 아니었다. 죽지는 않을 거였다. 재수 없게 머리로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깨진 머리통을 신성력으로 붙였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없었다.

문득 울리는 굉음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검고 큰 덩어리가 가냘픈 몸뚱어리를 나무에 처박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맥없이 늘어지는 조디를 향해 나도 모르게 팔을 뻗었다. 닿을 리가 만무했다. 뭐지? 누가 왔나? 적이? 아군이? 아니면 시스템이? 다양한 가능성을 빠르게 계산하던 찰나 시야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공중에 못 박힌 듯 추락이 멎었다. 이윽고 거칠고 두꺼운 무언가에 전신이 감싸였다.

왜 ‘무언가’라고 표현했냐면, 명백히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얼굴을 덮은 그것의 일부에는 비늘 같은 것이 빽빽하게 돋아나 있었다. 귓가엔 거센 숨이 닿았다. 사이사이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섞였다.

[내게 손대지 마.]

갑자기 뜬금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침범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것을 더듬던 손을 거두었다.

“방금, 네가 한 거야?”

[눈 감아.]

“조디는 어떻게 됐어?”

[눈 감으라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체는 나와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거 같았다. 하릴없이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어딘가로 옮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발밑에 딱딱한 감촉이 닿았다. 그것이 나를 바닥까지 데려다준 모양이었다.

“저기, 고마워. 근데….”

[삼십까지 세고 나서 눈을 떠.]

나는 끝내 그것과 그럴듯한 의사소통을 하는 데 실패했다. 내가 일부터 삼십까지 단숨에 세고 눈을 떴을 때 그것은 이미 스스로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 낸 뒤였다. 몽마에게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

내가 제이든에게 쥐여 준 ‘아리엘 달튼 자유 이용권’의 효력이 미치는 기간은 단 1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탤론에서 여드레가 넘게 제이든의 여친 행세를 했다. 초과 근무에 대한 정당한 보상으로 2학기에도 나의 과외 교사가 되어 줄 것을 요구했더니, 제이든은 일말의 고민도 않고 받아들였다.

하는 김에 농담의 달 연회에서 있을 골 때리는 선물 교환식에 대한 결재도 올렸다. 부드럽게 승인되었다. 내가 작년에 카일에게 실물 크기의 드와이어 교수 목조각을 건넨 사실을 모르나 보았다(그건 아직도 카일의 기숙사 방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호세 소토는 그가 악몽을 꾸는 원인이 그 목조각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있잖아, 제이든. 앞으로 땅 사고 그럴 때 꼭 제3자한테 계약서 보여 줘야 돼.”

제이든의 미래가 걱정된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그냥 무뚝뚝하게 알겠다고 했는데, 너무 고분고분한 태도여서 대체 뭘 알겠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브리가 샌크릭행 기차에 오르기 위해 기차역으로 갈 때에 투구를 쓴 기사와 놀랍게도 그의 어머니가 마차를 함께 탔다. 마담 스펜서는 내가 여친 선발 대회에서 보인 모습에 큰 감명을 받은 듯했다. 개성을 펼치기보다 스펜서 공작가를 기념하기를 택한 사람은 원인불명의 불치병과 고질적인 인간 불신에 시달리는 자작가 영애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일등 시녀에서 다시 나의 친구가 된 브리는 그 불 쇼가 실은 내 개성 그 자체였음을 전하고 싶어서 연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마담 스펜서에 따르면, 심지어 로드 스펜서는 아닌 척 눈물까지 훔친 모양이었다. 원래 감수성이 풍부한 양반이었구나. 영원히 미스터리일 것만 같았던 ‘햄의 노래’와 눈물의 상관관계가 마침내 밝혀졌다.

불 쇼 직후에 분위기가 싸했던 것은 그들이 본 것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던 탓이라는 해명을 들었다. 그건 브리아나도 인정한 바가 있는 사실이었다. 내가 에드가 라모스와 도망치듯 홀을 떠나고 나서, 정말로 모든 가면이 ‘익명의 자작가 영애’에 대해 속삭였다나. 역시 브리아나-똑똑이-모슬리와 지력은 2일지언정 잔머리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리엘 달튼의 계획은 틀리지 않았다.

여드레 전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열 시간을 보냈다. 탤론에 비하면 우중충하기 짝이 없는 샌크릭의 비 내리는 풍경마저 낭만적으로만 느껴졌다.

달튼 저택에 도착해 여장을 풀자마자 내 유모이자 달튼 저택의 하녀장이기도 한 매들린이 나타났다. 그녀는 우선 나의 빨랫감을 분류하는 주문의 구조가 잘못되어 빨래들이 전부 뒤섞였으므로 앞으로는 마법을 엄금한다고 했다. 시무룩하게 끄덕였다.

“그리고, 탤론에 가신 동안 아가씨를 찾아온 분이 계셨어요.”

“나? 누가? 카일?”

“둘째 빌라드 도련님은 오후에 오신대요. 금발의 귀공자 분이셨는데, 아가씨도 부재중이시고, 신원도 밝히지 않으셔서 정중히 돌려보냈어요.”

“금발?”

불쑥 짙은 불안감이 정수리로 내리꽂혔다.

“혹시 엄청 잘생겼어?”

“말도 마세요. 정말로 육십 평생에 그렇게 번쩍거리는 남자는 처음 본다니까요. 물론 둘째 빌라드 도련님도 충분히 미남이시지만, 제 말은, 보편적인 아름다움은 필연적으로 상대적이기 마련이잖아요….”

뜻밖의 충격에 마비 가루라도 뒤집어쓴 듯이 몸이 저려 왔다. 호들갑을 떠는 매디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게 들렸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다잡았다. 나는 만일 그가 다시 달튼 저택을 방문할 경우, 내가 부재중이 아니더라도 절대 들이지 말라고 거듭해서 말했다. 매디는 나의 필사적인 태도에서 수상함을 감지한 것 같았지만, 노련한 사용인답게 고개를 숙이고는 뒷걸음질로 나갔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다리가 풀렸다. 나는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맙소사, 켈란 일레스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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