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에드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영 건강치 못해 보여서가 아닌가 싶었다. 에드가가 말이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안색이 상당히 구렸다. 듣자니 공간 이동 멀미로 속이 말이 아니라길래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너 나돈에서 공간 이동으로 여기까지 왔어?”
“그럼 뭐 코끼리라도 타고 왔겠냐. 동물 반입 절차가 얼마나 번거로운데.”
“혹시나 해서 묻는데, 입국 허가는 받고 들어온 거지?”
나는 근래 ‘익명의 자작가 영애’의 신상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악몽에 시달리며 신문을 달고 살았는데, 라모스 공작이 밀루아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접한 바가 없었다.
당당하게 고개를 젓는 에드가 때문에 정신이 혼미했다. 공간 이동으로 국경을 넘으면 최소 대륙법 위반이었다. 지적하자, 에드가는 안 걸리면 장땡인 거 아니냐고 뻔뻔스레 굴었다.
마탑이 국경마다 마력 탐지 결계를 꽁으로 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천재 마법사 에디가 밀루아까지 어떻게 왔는지는 별로 안 궁금했다. 뭐 하러 왔는지가 궁금했지.
“나의 오랜 친구 힐랜드 후작이 무려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길래 구경하러 왔지.”
대답이 곱지가 않았다. 일단 얘가 제이든을 ‘힐랜드 후작’이라고 부르는 거 자체가 심사가 단단히 꼬였다는 뜻이나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아픈 데가 몸만은 아니었나 보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에드가를 쳐다봤다. 가면 때문에 표정을 읽기가 힘들었다.
“왜 또 성질이야?”
“왜 성질이냐고? 그걸 몰라서 물어?”
내가 참다못해 입을 열었을 때 에드가의 기분은 아예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버렸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흐트러뜨리더니 내게로 다가왔다. 퍽 흉흉한 기세였다. 그래서 나는 에드가에게서 슬그머니 멀어지는 동시에 그가 열받은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옷에 뭐 쏟았나? 슬쩍 봤는데 셔츠에 감싸인 탄탄한 상체 때문에 집중을 잃기나 했다.
내가 그의 마법을 내 것인 양 사용해서? 내 불씨는 그의 불기둥에 비해 너무 조그마해서, 우리가 같은 주문을 외웠다는 사실은 마탑주도 모를 거였다.
아니면 돈을 너무 많이 썼나? 그거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냅다 들이붓긴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금화가 쏟아져 버렸다거나. 도로 달라 그러기는 구질구질해서 싫은데 자꾸 되새기는 중이라거나.
“그, 기부금은 내가 다는 아니어도 반 정도는 지불할 수 있을 거 같아. 근데 모금함에서 넘친 건 깎아 주면 안 될까?”
“뭐라는 거야.”
나름대로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토해 낸 제안이었는데, 단박에 기각되니 사뭇 억울해졌다.
나를 수치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낸 것은, 확실히, 에드가였다. 참 고마웠다. 근데 내가 구해 달라고 빌기를 했어, 뭘 했어.
더구나 쓰잘머리 없이 모금함을 터뜨리기까지 한 것은 라모스 공작 전하가 아니던가. 대충 그런 내용을 불만스레 꿍얼거렸더니 에드가는 기가 차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너 지금 내가 돈 아까워서 이러고 있는 줄 아는 거야?”
그건 내가 추리해 낸 가장 그럴듯한 경우의 수였다.
“아니야?”
어안이 벙벙하여 되묻자 에드가는 지력 2의 명탐정에게 완전히 질려 버린 듯했다.
“몰라서 묻는구나, 그래… 몰라서 묻는 거였어.”
그가 뒷목을 주무르며 혼잣말했다. 이윽고 소름 끼치도록 낮은 음성이 목을 긁고 올라왔다.
“그럼 알려 주면 되겠네.”
허리를 잡아끄는 강한 힘을 느낀 순간 나는 이미 에드가의 품으로 곤두박질치는 중이었다. 상쾌한 향이 나던 일레스티아의 황태자와 달리 나돈의 왕자에게서는 더운 냄새가 났다. 짙은 사향과 약간의 향신료 냄새. 그가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가면을 벗어 던지자 허공에 흩어지는 밀색 앞머리 사이로 빛나는 적자색 눈동자가 바로 보였다.
적성이 아니라고는 해도 여자 놀음을 하던 깜냥이 있어서인지, 에드가는 평소 허튼수작을 자주 거는 편이었다. 근데 그럴 때는 항상 눈매와 입매에 즐거움이 서려 있었다. 누가 봐도 장난이라는 걸 알 수 있게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글쎄. 나는 에드가의 비슷한 표정을 전에도 봤다. 형제의 마법 인형에게 습격을 당한 뒤였는데, 변태가 아니고서야 그럴 때 즐거움을 느끼진 않았다.
“뭐, 너 지금, 뭐 하려고….”
멍청하게 말을 더듬기나 했다. 나돈은 일레스티아 이상으로 왕족의 권세가 강한 나라였다. 에드가 라모스는 나돈의 왕자이면서 동시에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 중 하나였고. 그에게 누군가를 재로 만들기란 유니콘 팽이를 돌리는 것보다 간단했다.
눈빛이나 몸짓으로 상대를 무릎 꿇리는 법을 그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나는 전신을 감싸는 위압감에 완전히 짓눌렸다.
“보면 몰라? 너랑 키스할 거야.”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용 가면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가면이 닿던 자리에 난데없이 공기가 닿아서 다소 오싹해졌다. 놀리기라도 하듯 끈적하게, 하지만 끈덕지게 가까워지는 입술을 밀어내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에드가는 내 손가락 사이로 눈을 마주한 채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그건 굉장히 묘한 접촉이었다. 심장이 또 나대었다.
“왜, 왜?”
“힐랜드 후작이랑 사귄다며? 내가 걔보다 낫다는 걸 증명해야지.”
“안 해! 안 사귀어!”
시야에서 허우적대는 팔을 성가시다는 듯이 치워 내던 에드가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눈썹은 비뚤어졌다.
“안 사귄다고?”
“그래!”
“진짜로?”
“진짜로! 걔가 도와 달라고 해서 사귀는 척하는 거야!”
나의 필사적인 외침에 에드가의 태도는 갑자기 산뜻해졌다. 그가 양손을 어깨 높이까지 들고 물러나더니 바닥에 널브러진 용 가면을 집어 들었다. 지가 거기 내던져 놨으면서 호호 불고 문지르며 먼지를 털어 내는 손놀림이 퍽 신중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좋아, 장난 좀 쳐 봤어. 너네 둘이 진짜 사귀는지 너무 궁금했는데, 그냥 물어보면 안 가르쳐 줄 거 같아서.”
곧 오른쪽 뿔 끄트머리가 살짝 깨진 가면이 얼굴에 내려앉았다. 내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꼼질거리며 끈을 묶는 눈매와 입매에 집 나간 즐거움이 돌아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순진한 여자애-능동적인 쓰레기가 되겠노라고 결심하긴 했지만,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은-를 농락해 놓고, 혼자 신이 난 꼬라지가 영 밉상이었다.
“개자식. 사람을 가지고 놀아?”
나는 리본으로 깜찍하게 마무리가 된 매듭을 더듬어서 그것이 단단히 고정되었음을 확인한 뒤에 에드가의 정강이를 맘껏 걷어찼다.
“아야. 너 구두코에 무슨 쇳덩이라도 박았어?”
“앞으로는 칼날도 달고 독도 바를 거니까 기대해라.”
“무서워라.”
그가 콧노래를 부르며 내가 난간에 올려 뒀던 샐러드 보울에서 게살만을 쏙쏙 골라 먹었다. 콱 밀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거액의 쾌척에 대한 고마움으로 다스리던 찰나 굉장한 계획이 떠올랐다.
남는 거라고는 외모와 금화뿐인 이 남자, 과연 카지노에서는 어떨까? 나돈 왕가의 자본과 함께라면 그토록 갈망하던 레프러컨 세 마리도 꿈이 아니었다.
“에드가, 너 내일은 뭐 해? 꼭 같이 가고 싶은 데가 있는데.”
“와, 유혹하는 거야?”
“아냐! 넌 왜 항상 생각이 그쪽으로만 가?”
“내일은 빠지기엔 곤란한 일정이 있는데. 브라이스의 생일 연회가 열리거든. 근데 네가 이렇게 매달리니까 막 흔들리는 거 있지.”
“내가 언제 너한테… 잠깐, 브라이스 나돈의 생일이라고? 그럼 네 생일 아냐?”
“그렇게 되나?”
에드가가 태평하게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정말로 남의 일 대하듯 하는 태도였다. 그러고 보면 얘는 형제의 칼이었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를 가장해야 했다. 말인즉슨 브라이스 나돈의 생일 연회는 열릴지언정 에드가 라모스의 생일 연회는 열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 짓을 매년 한다 치면 나라도 남의 일처럼 여겨질 듯했다.
근데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내 생각에 생일을 기념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례로 빌라드 저택의 새침데기 신시아는 생일에 그녀가 아는 모두에게 축하를 받아야만 했으며 한 명이라도 그냥 지나칠라 치면 크나큰 슬픔에 사로잡혔다.
에드가는 생일 축하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슬픔에 사로잡힐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일 축하를 받는다면 조금은 행복할 거였다.
달의 모양새를 보며 시간을 가늠하다가 드레스의 주름 안쪽에서 음성 기록 및 재생용 마도구를 꺼냈다. 거기에는 내가 준비한 회심의 불 쇼가 지나치게 싸늘한 반응을 얻을 경우 틀려고 했던 환호성이 기록되어 있었다. 망설임 없이 녹음 버튼을 눌렀다.
“에드가 라모스!”
“응?”
“생일 축하해!”
“뭐?”
에드가가 미친 사람 보듯이 나를 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득의양양하게 마도구를 내밀었다.
“이따 열두 시 지나면 들어.”
“녹음한 거야?”
“끝내주는 환호성도 깔려 있어.”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에드가는 내가 건넨 마도구를 손아귀에 말아 쥐었다. 이내 멋쩍은 듯이 입꼬리만 올려 웃다가 이렇게 말했다.
“최고의 생일 선물이네.”
***
공간 이동 주문에 뛰어나지만 멀미를 없애는 주문은 못 외는 천재 마법사를 배웅하고 홀로 돌아왔을 때, 공교롭게도 나의 사촌 자매 조디와 딱 마주쳤다.
“당장 이리 와, 아리엘 달튼.”
“혹시 내 가면에 이름 써 있나?”
“아니. 근데 너를 아는 사람이면 그 불 쇼를 보고 네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걸. 수도에 네 지인이 친척들뿐인 걸 감사하라고.”
나는 애꿎은 가면을 만지다가 불현듯 아주 무기력해졌다. 그래서 에드가 라모스에 이어 주디스 그린에게 순순히 납치되었다. 우리는 연회장을 나가서 바로 보이는 분수의 뒤쪽으로 이어진 길을 함께 걸었다.
“도대체 왜 미리 알려 주지 않은 거니!”
인적이 드문 장소에 접어들자마자 조디가 쏘아붙였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귀가 다 아팠다.
“뭘?”
“네가 ‘익명의 자작가 영애’라는 거! 세상에, 얌전한 만티코어가 입질을 먼저 한다더니!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연애를 해? 그것도 스펜서 공자랑? 리사 고모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