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곧 주선율에 변주가 들어갔다. 파트너와 잠시 동안 헤어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못돼 처먹은 걸로는 번데기인 아리엘 달튼의 앞에서 감히 주름을 잡는 제이든 스펜서로부터 반걸음 멀어졌다.
“오, 그래? 혹시 오늘 아침에는 채소를 전부 남겼니?”
한껏 빈정거리고 나서 이어지는 박자에 옆으로 돌았다. 대뜸 손목이 잡혔다. 손을 더듬어 깍지를 끼는 힘이 어찌나 센지 손아귀가 다 얼얼했다. 내게로 다가오던 부엉이 가면이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잠시 주변을 헤매던 그가 마찬가지로 짝을 잃은 다람쥐 가면을 향해 갔다.
우리를 제외한 모든 파트너가 바뀌었다. 다음에도, 그 다음 반 바퀴에도, 마침내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이 폴로네즈에서 왈츠로 변할 때까지 제이든은 내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봐.”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이는 누구 때문에 ‘익명의 자작가 영애’ 콘셉트를 잊을 뻔했다. 나는 어지럼증이 도진 척 제이든의 가슴에 머리를 박고 아주 오래도록 웃었다.
스펜서 공작가의 연회장은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위치에 발코니가 마련되어 있었다. 춤을 추는 공간에서든 카드놀이나 다과를 즐기는 공간에서든 두루 잘 보이는 위치였다. 그래서 악단이 물러나자 거기는 여친 선발 대회의 무대가 되었다.
발코니 바로 밑에 커다란 모금함이 놓였다. 무대가 마음에 든다면 기부금을 넣는 구조인 듯했다. 저속하지만 재미있는 발상이었다. 더구나 취지도 좋았던 것이다. 그래서 금세 발코니를 둘러싸고 구름 같은 인파가 모였다. 계단참에는 나 같은 재능 기부자들이 길게 늘어섰다.
독수리 가면을 쓴 여자를 비롯한 대부분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갈고닦은 가무 실력을 뽐내었다. 모금액은 다양했는데, 기본적으로 픽시 아홉 마리는 그냥 넘기는 듯했다.
아라크네를 밀반입한 범인은 이마 가운데 뿔이 달린 여우 가면을 쓰고 있었다. 걔의 태피스트리는 딱 봐도 일반적인 물건이 아니어서, 지금까지 중에 최고로 많은 금화를 쓸어 담았다. 직접 짜지 않았음을 성공적으로 숨긴 점까지 감안하면, 확실히, 인정받아 마땅한 업적이긴 했다.
얄미운 조디는 사슴 가면을 쓰고 나타나서 클레멘스 맥코이의 시를 읊었다. 아마도 그린 자작가의 세 영식, 조디보다 얄미운 사촌형제들이 과시하듯 금화를 투척했다. 눈으로 대충 세었더니 마흔 개였다. 제이든 스펜서를 차지한 ‘익명의 자작가 영애’로서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그거의 두 배는 벌어야 했다.
초조하게 차례를 기다리는 내게 공작새가 날아왔다. 2층에 놓인 모든 의자에 앉아 봤는데 아무래도 강낭콩은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로 수다의 포문이 열렸다. 이윽고 밀루아산 가구의 쾌적함에서 스펜서 공작 부인의 안목, 밀루아 귀족들의 소탈함과 비교되는 일레스티아 귀족들의 가식적인 면모, 같은 가면을 쓴 두 명의 남자까지 화제가 마구 전환되었다.
“저거 체이스 터커 아냐? 왜, <미남들>에 실린. 비교 제대로 되네. 어쩌다가 똑같은 걸 사 가지고.”
공작새가 아니라 앵무새임이 틀림없는 브리아나 모슬리의 활약이 긴장을 사뭇 완화시켰다. 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다가 문득 진지해져서 말했다.
“브리, 앞으로 내 장래 희망은 쓰레기야.”
“뭐? 왜? 갑자기?”
딱히 엄청 갑자기는 아니었다. 제이든과 폴로네즈에 이어 왈츠를 추는 동안에도 나는 줄곧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폴로네즈와 달리 왈츠 스텝은 목각인형에게 언제나 고난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가명 사용을 합의할 때 왈츠에 대한 합의 역시 마쳤다. 밀루아에서 대충 일곱 번째로는 고귀할 스펜서 공자는 그의 구두에 나를 태우고도 무리 없이 움직였다. 오히려 내 발이 땅을 딛고 있을 때보다 훨씬 여유로워 보였다. 약간의 자괴감에 사로잡혔다.
나도 꽤나 여유로웠다. 몸이 말이다. 파트너의 발등을 깨부수지 않으려고 별 난리를 칠 필요가 없었으니까. 마음은 여유롭지 못했다. 나는 난데없이 나의 삶에 들이닥친 여러 갈래의 낭만에 대해 끊임없이 되새겼다. 내가 그것을 누려 마땅한지도.
한편으로 나는 마땅이고 자시고 그걸 누려야 되는 입장에 있었다. 로즈마리 블로썸을 밀어내고 시스템을 망가뜨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 내가 하는 건 그냥 쓰레기 짓이 아니었다. 옳게 된 쓰레기 짓이었다.
긍정적인 것만이 나의 장점이었다. 피할 자신이 없으면 즐기는 게 맞았다. 나는 능동적인 쓰레기가 되기로 했다.
“그냥, 그게 맞는 거 같아서.”
“맞긴 뭐가 맞아. 진로 상담 시간에 그 소리 하면 험프리스 교수님 까무러치시겠다.”
한심스럽다는 투로 핀잔하는 브리 덕분에 마침내 생각의 바다에 휘몰아치던 파도가 잠잠해졌다. 이제 거기에는 제자의 충격 고백에 영원히 몸서리칠 험프리스 교수만이 떠다녔다.
징계 담당 교수를 못살게 구는 건 피츠시몬스의 장난꾸러기들에게 있어 굉장히 숭고한 사명이었다. 개학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우스울 만큼 키 차이가 나는 담비 가면과 토끼 가면-그들이 켄드라 브래들리와 미아 페터슨이라는 것에 무엇이든 걸 수 있었다-의 모의 전투는 합이 딱딱 맞아서 단연코 보는 재미가 있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은 두 사람의 다음 순서가 바로 ‘익명의 자작가 영애’였다.
발코니 중앙 부근에 뻘쭘하게 서자 왁자지껄하던 장내가 조용해졌다. 슬쩍 둘러보기만 했을 뿐인데 적어도 스무 명과 눈이 마주쳤다. 브리아나-앵무새-모슬리에 의해 가까스로 내리눌러진 불안이 다시금 솟아났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자랑할 장기는 짧고 굵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심호흡한 후에 미리 준비한 드워프제 고도주를 입에 머금었다. 술기운으로 용기를 얻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술에 취했을 때 내가 용기보다는 객기를 부린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지난 5월에, 나는 채프먼 교수의 보살핌 아래 며칠을 보냈다. 그때에 에드가는 허구한 날 3층 창문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의 교류는 대개 실없었지만, 가뭄에 콩 나듯 영양가를 가지는 순간이 있었다.
천재 마법사 에디는 심심풀이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마법을 나에게 전수해 주었다. 마법진에서 불기둥이 솟아오르게 하는 마법이었다. 월시 자식을 태워 버리겠다는 일념 하에 죽어라고 연습했는데, 에드가 라모스한테나 불기둥이지 마나라고는 약에 쓰려도 없는 나로서는 손톱만 한 불씨가 한계였다.
드워프제 고도주와 함께라면 손톱으로 충분했다. 나는 서서히 허공을 향해 치솟는 불씨를 집중해서 봤다. 조금 기다리니 눈높이까지 닿았다. 멀리서 엄지를 치켜드는 브리가 아른거렸다.
스펜서 공작가의 상징은 산드쉘 계곡에서 실종된 줄만 알았던 공자가 용을 타고 돌아온 날 이래로 줄곧 용이었다. 내 가면은 용과 닮았다. 등짝에 매달린 시어 원단은 얼핏 날개 같았다. 힘차게 술을 뿜어내자 꽤나 큰 불줄기가 퍼져 나갔다. 나와 브리아나가 사흘 밤낮 머리를 맞대 창조해 낸 환상의 화염 브레스였다.
우리의 상상 속 관중들은 분명히 반응이 좋았는데, 현실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날카로운 비명이 돌림 노래처럼 일고 나서는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왔다. 누가 시간을 멈추는 주문이라도 외운 게 아닐까 싶었다. 불을 내 머리통에 붙이고자 하는 충동에 시달리기 시작한 찰나였다.
느긋하게 손뼉을 치는 소리가 울렸다. 까치발을 하고 내려다보았더니 모금함 앞에 선 남자와 시선이 맞았다. 브리아나 모슬리랑 폴로네즈를 춘 사자 가면이었다.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모금함 위에서 뒤집었다.
금화가 쏟아졌다. 끝도 없이. 홀쭉한 가죽 주머니에서 나왔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양이었다. 이미 반쯤 차 있던 모금함은 금방 가득 메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자 가면의 손은 도통 거두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모금함에서 넘쳐흐른 금화가 평평한 윗면에 얕게 쌓였다.
비슷한 광경을 눈에 담은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기억을 더듬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그는 아직도 나를 보고 있었다.
가면 아래에서 번뜩이는 안광은 빨강과 보라가 오묘하게 섞인 색이었다. 이를 드러낸 미소는 시원한 듯 선뜩했다.
천재 마법사 에디가 거기에 있었다.
***
“미스 달튼? 잠깐 얘기 좀 하실까요?”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좋게 말할 때 따라오지?”
“이게 좋게 말하는 거야?”
“나쁘게 말하는 거 보여 줘? 여기서?”
사자 가면을 쓴 남자, 에드가 라모스가 목울대를 가볍게 두드리며 음성 증폭 주문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그의 뒤를 따랐다.
에드가에게는 항상 짐승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으므로, 사자 가면과 에드가는 마치 한 몸 같았다. 조금 간사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상을 전하자, 그는 약간 자존심이 상한 듯이 직접 준비했으면 훨씬 멋진 가면을 썼을 거라고 그랬다.
말하는 투가 심상치가 않아서 사자 가면의 출처를 따졌다. 밀루아 귀족은 스펜서 공작가 외에는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난데없이 남의 나라 왕자한테 삥을 뜯긴 신원 불명인이 가여워지는 순간이었다.
잠시 걷고 나서 우리는 바깥이 보이는 발코니에 도착했다. 벽면을 완전히 메운 커튼에 가려 존재하는 줄도 모르던 장소였다. 망설임 없는 발걸음에, 나는 그가 스펜서 저택의 구조에 꽤나 밝음을 깨달았다.
“자주 왔나 봐?”
“어렸을 때는.”
에드가가 짧게 말했다. 나는 그가 그것에 대해 더는 떠들고 싶지 않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충 수긍하며 오는 길에 챙긴 샐러드 보울을 뒤적거렸다. 양이 많지는 않은데 상추나 적채보다 게살과 으깬 감자가 많아서 체면 차리며 배도 채우기 딱 좋았다.
“자, 너와 내 마법이 제이든 스펜서 여친 선발 대회에서 발견된 경위를 들어 볼까.”
에드가도 그 난리법석을 ‘제이든 스펜서 여친 선발 대회’라고 표현한다는 부분이 재밌었다. 내가 처한 상황은 별로 재미없는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