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근데, 너무 열심히 해서 연회장을 압도해 버리면 어쩌지?”
빵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수프부터 마셨다. 나에게는 아직 경쟁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할 무기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피츠시몬스 아카데미의 5학년 중 똑똑하기로는 손에 꼽는 애를 시녀로 두고 있기도 했다.
끝내 나는 레프러컨 세 마리를 뽑아낼 수 없었다. 세이렌도 마찬가지였다. 꿩 대신 닭이라고 픽시 세 마리를 맞혔더니 3등 상이라며 금화 열 개를 던져 줬다. 2등 상의 반의 반의 반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부조리하지 않나 싶었는데, 거칠게 항의하던 카드 테이블의 주정뱅이가 드워프 직원들에 의해 짐짝마냥 옮겨지는 걸 보니까 절로 분노가 조절되었다. 나는 겸허하게 스스로의 실패를 받아들였다.
<니베이아 모험기 : 밀루아의 역사적 미남들>과 함께 브리가 기다리는 빵집으로 돌아갔을 때 수중에 금화는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그거로는 ‘레이디 갈레고스의 타르트’는 어림도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음료만 시켰다. 갑자기 속이 좋지 않아졌다고 둘러댔다. 눈치 없는 브리아나 모슬리는 친구의 몸짓 언어-애꿎은 빨대를 잘근잘근 무는-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브리가 많이 즐거워해서 나도 쬐끔 즐거웠다.
그러니까 내 말은, 여섯 개의 밑줄과 세 개의 별로 강조된 목표를 달성한 브리아나가 요사이 행복한 고양이처럼 관대했다는 거다. 어쩌면 기깔나는 장기 자랑 아이디어를 떠올릴지도 몰랐다. 마구 허세를 부려 보았다.
“내가 너무 뛰어나서 너네 부모님이 나를 너무 맘에 들어 해 버리면?”
가엾은 발등이 놓인 곳을 피하느라 중심을 잃었다. 의도했다는 듯이 뒤로 기대는 자세를 취했다. 마침 기적적으로 박자가 맞았다.
“그러면 어떡할 거야?”
장난스레 올려다본 턱은 완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결혼?”
“너랑? 말도 안 되지! 너는 밀루아의 영웅이고 나는 밀루아의 뭣도 아닌데!”
“난 괜찮은데.”
“그리고 나 수도랑 안 맞나 봐. 이런 데서 살다간 파산하겠더라.”
[소지금 : 0골드]를 슬쩍 보며 덧붙이자 제이든이 심각하게 대꾸했다.
“이사… 할까?”
“뭔 소리야!”
제이든 스펜서와 농담은 정말이지 하나도 안 어울렸다. 그에게는 표정이랄 게 거의 없었으므로 더욱 그랬다. 내가 시끄럽게 깔깔거리자 제이든은 부루퉁해져서 웃지 말라고 했다.
당연하게도 그 말은 그가 기대했던 방향과 반대로 작용했다. 하지 말라고 하면 기어코 하고 싶고 울지 말라고 하면 기어코 눈물 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음악이 완전히 흘러가 버리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어 젖혔다.
***
내가 제이든의 가짜 여자 친구 자리를 수락하며 내건 단 하나의 조건은 절대 내 신분을 밝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펜서 공작가는 연회를 정말 코앞에 두고 부랴부랴 추가적인 지침을 발표했다. 이제 연회장에 발을 들이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가면을 착용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수도 귀족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며칠 만에 가면을 제작하는 건 불가능했다. 매우 잽싸거나, 운이 좋거나, 불가능을 가능케 할 능력을 지니지 않았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 기성품이라도 구해야 했다.
어쨌든 상인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가면을 취급하는 탤론의 모든 가게는 밤낮 없이 열렸다.
스펜서 공작가의 위세가 불가능을 가능케 했다. 제이든과 나와 브리아나는 연회 당일이 되어 겨우 얼굴에 딱 들어맞는 가면을 손에 넣었다. 브리 것은 깃털이 화려해서 무슨 공작새 같았고, 제이든 것은 아무래도 용인 듯했는데 디자인 자체는 단순했으나 검은 마노석을 깎아 만든 뿔 덕분에 밋밋하지 않았다. 우리가 파트너라는 것을 드러내야 했으므로 내 것도 거의 동일한 생김새였다.
누가 공작가 아니랄까 봐, 사용인들은 빠르고 조용하고 전문적이었다. 갑자기 더해진 가면으로 인해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방식이나 피부에 분칠을 하는 방식, 액세서리 선택에 한계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치장을 선보였던 것이다.
검은 가면에 옷까지 검으면 지나치게 칙칙할 거라고 판단했는지, 드레스의 어깨끈에는 마지막 순간 네모나고 납작한 오팔들이 촘촘하게 꿰매어졌다. 가슴팍은 살짝 더 파였다.
대신 치맛단에 붙었던 시어 원단이 등까지 올라오고 주름이 잡혀 반투명한 날개 같은 느낌을 냈다. 제이든 것처럼 내 가면도 마노석 뿔이 달린 용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건 꽤나 좋은 선택이었다.
기다란 거울에 비친 나는 배경 인물보다 주인공에 쬐끔 더 가까웠다. 기분이 붕붕 떠서 귀걸이를 달아 준 사용인을 꼭 끌어안고 싶었는데 가까스로 참았다. 스펜서 저택에서 달튼 자작가 영애는 낯을 너무나 가리는 나머지 남친 부모님이랑 밥도 못 먹는 애였다. 생각난 김에 인위적인 기침을 터뜨리며 방문을 나서자 나를 반기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게 누구야! 맙소사, 미스 달튼! 너 정말 최고다!”
“너야말로, 미스 모슬리.”
주황색이 조금 섞인 분홍빛 실크 드레스는 브리아나 모슬리의 장점인 하얗고 투명한 피부를 잘 살렸다. 불탄 듯한 곱슬머리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나 이거 때문에 스펜서랑 결혼하고 싶어졌잖아.”
매끈하게 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돌리며, 브리가 너스레를 떨었다. ‘브리아나 너마저?’ 짐짓 질린 듯이 받아치니 한참을 깔깔거렸다.
제이든 스펜서는 별채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밀루아 왕실 기사단 제복이 아닌 다른 예복을 걸친 그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은사로 희미하게 수가 놓인 흰 조끼는 결코 과하지 않았고, 몸통에 적당히 맞는 재킷이 근사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부터 쟤 여친 행세를 해야 한다는 거지. 우리는 서너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서 동시에 머뭇거렸다.
“어때, 스펜서. 예쁘지? 장난 아니지?”
브리아나는 자기 일도 아니면서 엄청 우쭐거렸다. 그녀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뭐 해?’ 그래서 먼저 앞으로 간 것은 나였다. 어정쩡하게 손을 내밀자 제이든 역시 어정쩡한 동작으로 마주 잡아 왔다.
그러고 나서는 바로 출발인 줄 알았는데, 별안간 제이든이 무슨 비눗방울 쥐듯이 살살 쥔 내 손을 그대로 입가에 가져갔다. 얇은 장갑 너머로 숨이 닿는다고 생각한 찰나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전류 비슷한 게 팔을 타고 올라왔다.
***
무슨 정신으로 연회장까지 갔는지 몰랐다. 제이든에게 부드럽게 이끌려 걸으면서, 내 머릿속에는 그야말로 폭풍우가 일었다.
켈란. 걔랑 키스한 건 술에 취한 탓이기도 했고, 분위기에 취한 탓이기도 했는데, 동시에 안경을 쓴 그가 너무나 잘생긴 탓이기도 했다. 카일. 인정하기 싫지만, 걔는 열아홉이 되고 부쩍 잘생겨졌다. 더구나 그가 내게 목맨 세월은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에드가. 그와 보았던 소금 사막을 잊지 못할 것이었다. 물론 잘생겼다. 근데 이제는 제이든한테까지 설렌다고? 아리엘,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잘생기면 다 되는 거야? 벌써 털이 부숭부숭 난 양심의 마지막 조각이 나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각양각색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끝도 없이 들어찬 연회장에 다다랐을 때쯤 나는 완전히 맛이 가 버렸다. 얼마나 넋을 놓고 다녔냐면, 내 칙칙한 머리색에 대해 떠드는 뱀 가면을 쓴 남자에게 나도 모르게 슬라임을 토해 내는 마법을 걸려고 했을 정도였다. 갑자기 손을 꽉 쥐어 오는 제이든 덕분에 내가 그의 손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근데 그건 제법 다행이었다. 굳이 ‘익명의 자작가 영애’를 연기하려 애쓰지 않아도 적당히 앓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신분을 밝히거나 아는 체를 하는 건 원래 가면무도회에서 엄격히 금지되는 행위였다. 그러나 이 악물고 무시하기에 밀루아의 영웅은 지나치게 거물이었다. 나는 쉴 새 없이 치근덕대는 손님들 앞에서 지금까지 중 가장 수월하게 내일 죽어 버릴 여자애를 흉내 냈다.
제이든은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내가 걱정이 되는 듯했다. 그는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려고 시도했지만 그에게 말을 걸려는 가면들에 의해 번번이 가로막혔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제이든은 시들어 버린 식물처럼 서 있는 나와 악단만을 번갈아 봤다. 춤을 추는 동안에는 방해 없이 대화할 수 있을 거라는 속셈에서인 듯했다.
당분간 그러고 있으려니 꽉 끼는 예복을 걸친 지휘자가 뒤뚱거리며 나타났다. 나는 그가 지휘봉을 잡기도 전에 거의 들리다시피 하여 홀의 중앙으로 갔다.
첫 곡은 느린 폴로네즈였다. 지독하게 춤을 못 추는 나라도 세 번째 박자에 무릎을 구부릴 줄은 알았다. 멀리서 사자 가면을 쓴 남자와 춤의 대열에 합류한 브리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아리엘, 괜찮아?”
무릎을 두 번 구부린 다음에 제이든이 물었다. 엄청 크지는 않았지만 마냥 작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폴로네즈는 왈츠만큼 파트너와의 거리가 가깝지 않았으므로, 확실히, 속삭여서는 의사소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 들을 가능성이 있는 음량으로 말할 때에는 가명을 쓰기로 합의를 봤었다. ‘익명의 자작가 영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은근슬쩍 제이든을 꼬집어 눈치를 줬다. 그가 다시 말했다.
“르네, 괜찮아?”
“나는 쓰레기야, 안톤.”
그건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었는데, 내뱉고 나니까 갓 태어난 새끼 흰꼬리사슴보다 순수한 제이든에게는 너무 자극적인 단어가 아닌가 싶었다. 잠시 고민하고 나서 말을 고쳤다.
“아니, 나는 월시야.”
“아냐. 왜 그렇게 생각해?”
제이든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내 지랄맞은 심장이 잘생긴 남자하고만 엮이면 막 나대서?
“너처럼 착한 애는 몰라.”
땅이 꺼져라 한숨이나 쉬었더니 제이든은 다소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네 생각만큼 안 착해, 나.”
홀을 반 바퀴 돌았을 때쯤 그가 불만스러운 듯 툴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