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서점 건너편에는 다소 개방된 구조의 카지노가 마련되어 있었다. 거리를 통째로 덮은 천막 아래에는 카드 테이블과 룰렛 테이블이 드문드문 있었는데, 한낮임에도 사람이 바글거렸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중앙에 나란히 놓인 기계였다. 각 면에 서로 다른 그림이 그려진 상자 세 개를 쇠막대에 꽂아 놓은 생김새였는데,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왼편에 달린 손잡이를 내리면 짧은 음악이 나오는 동안 가동되다가 멈추었다. 멈춘 시점에서 상자 세 개의 정면에 보이는 그림이 일치하면 보상을 받는 식이었다.
나는 흐린 눈으로 손잡이에 매달린 사람들을 기웃거리다가 빈 의자에 앉았다. 이 정도는 해 볼 만도 하겠다 싶었다.
금화 투입구에 금화를 넣자 상자들이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마나탄이 터지는 것처럼 화려한 효과가 보기에 매우 재밌었다. 잠시 뒤 첫 번째 상자가 멈췄을 때 거기에는 레프러컨이 그려져 있었다. 다음 상자도 동일했다. 하지만 마지막 상자에서는 세이렌이 뛰쳐나왔다. 팔딱거리는 꼬리에서 파도가 일었다.
콧등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 내고 나서 금화를 꺼내 들었다. 상태창이 빛나며 소지금이 줄어들었다. 세이렌, 세이렌 그리고… 세이렌! 시끄러운 팡파르에 주변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얼굴에는 더욱 많은 물이 튀었지만 금화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쏟아지는 금 줄기를 허겁지겁 주워 담고 나니 소지금의 자리수가 바뀌었다. 동그란 모자를 쓴 직원 너덧이 몰려와 박수를 쳤다. 얼떨떨했다.
“축하드려요! 2등 상을 타셨네요!”
“이게 2등이에요?”
“레프러컨 3마리가 1등이에요.”
드워프족 직원이 내 기계에 사다리를 놓고 오르며 말했다. 갑자기 기분이 확 고양되었다. 2등 상이 이 정도면 1등 상은? 도박으로 유산을 죄 날려먹고 이름뿐인 귀족으로 사는 루스 삼촌을 손톱만큼은 이해할 수 있겠다고 느꼈다.
“금화를 채우려면 시간이 걸려요. 자리를 옮기시겠어요?”
직원의 물음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세이렌이 나왔으니 레프러컨도 나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게 레프러컨에 얽힌 좋은 추억이 없었다는 걸 기억해 냈어야 했다. 최초의 행운 이래로 내 기계는 잠잠했다. 계속해서 깜빡이는 상태 창을 의식적으로 무시했다.
어느 순간 [소지금 : 178골드]는 [소지금 : 6골드]가 되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브리가 부탁한 <니베이아 모험기 : 밀루아의 역사적 미남들>은 물론이요, <니베이아 모험기 : 밀루아의 역사적까지는 아닌 미남들-알렉산더 아담스부터 그레이엄 하워드까지>조차 살 수 없을 거였다.
그만두는 게 맞았다. 머리로는 알았는데 마음이 방해를 했다. 나는 뭐에 홀린 듯이 금화 주머니를 뒤졌다.
“어머, 아리엘! 오랜만이다, 얘!”
“조디?”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자 나의 사촌자매 조디가 하녀 두엇을 꼬리에 달고 지나는 중이었다. 걔가 입은 드레스의 치맛자락은 너무 긴 나머지 거의 바닥을 쓸었는데, 거기 걸린 금화가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주운 사람이 임자!’ 신이 나서 금화에 붙은 먼지를 떨어내자 조디는 진절머리를 쳤다.
“제발, 미스 달튼.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나야 언제나 그대로지, 미스 그린. 여긴 어쩐 일이야?”
“드레스를 가봉하러 왔어. 곧 중요한 연회가 있거든.”
나는 그녀의 ‘중요한 연회’가 스펜서 공작가의 연회임을 직감했다.
“너도 그거 하는 거야? 장기 자랑?”
“장기 자랑이라니. 재능 기부라고 해 줄래.”
조디가 잘난 듯이 말했다.
“로드 스펜서와 마담 스펜서께서는 고귀한 밀루아의 영웅께 어울리는 여성을 이번 연회에서 선별하시겠다고 했어. 물론, ‘선별’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시진 않았지만, 너도 귀족적인 화법이 무언지는 알 거 아냐.”
“그래, 그래. 신문에서 봤어.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며.”
대충 대꾸하며 손잡이를 당겼다. 고블린, 고블린 그리고 레프러컨. 일말의 지체도 없이 금화 하나를 더 넣었다.
“연회는 짧아. 그 짧은 시간 동안 족히 수십이 넘는 여자애들이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쓸 거고. 나는 시를 낭송하려고 해. 너도 알다시피 내가 목소리가 꽤 좋잖니.”
“장기 자랑에는 딱이지.”
“‘재능 기부’. 그러는 너는? 곧 죽어도 샌크릭 촌구석에 박혀 계시던 분께서 수도까지 행차를 하셨다면, 내가 봤을 때 우리는 연회장에서 또 만나게 될 것 같거든.”
“나? 글쎄? 생각한 적 없는데?”
“위기감이 전혀 없네. 내가 아는 누구는 마물 보호법을 어기고 아라크네까지 밀반입했대. 공자께 직접 수를 놓은 태피스트리를 전해 드리려고.”
“아라크네가 짠 태피스트리가 어쩌다가 직접 수를 놓은 태피스트리로 둔갑하게 되는 거야?”
“세상만사가 다 그런 거 아니겠니? 내 말은, 다들 칼을 갈고 있다는 거야. 태평하게 도박이나 할 때가 아니라니까?”
“이건 도박이 아냐, 인생이지.”
“도박이 인생인 게 아니라 인생이 도박이란다, 아리엘. 공작부인이 될 수만 있다면 뭘 걸어도 성공이야.”
한심하다는 듯, 조디는 팔짱을 끼고 나를 비난했다. 그녀의 말투에서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졌으므로, 나는 손잡이를 당기다 말고 조디를 쳐다봤다. 냉랭한 태도였다. 상상 속에서 제이든 스펜서와 셋째까지 낳은 조디답지 않은.
다시 요란스레 돌아가는 기계를 보았다. 가고일, 레프러컨, 픽시. 완전히 꽝이었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나를 놀리는 레프러컨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조디에게는 제이든 스펜서가 레프러컨이지 않나 싶었다. 스펜서 공작가에 몰려드는 대다수의 구혼자처럼 말이다.
생각해 보면 그린 자작 부인, 조디의 어머니는 준남작도 아니고 평민이었다. 나는 제이든과의 결혼을 ‘공작부인이 된다’고 표현하는 조디를 금방 받아들였다.
“하나만 물어볼게, 조디. 스펜서 공자에게 반했어?”
하지만 제이든이 연회장에서 찾는 것은 사랑이었다.
“동경했던 적이 있었지. 열여섯쯤엔 확실히 그랬어.”
이제 열아홉이 된 주디스 그린, 그린 자작가의 고명딸은 부채로 내 목덜미를 툭툭 친 뒤에 턱을 치켜들고 사라졌다.
***
조디의 말이 옳았다. 도박 같은 걸 할 때가 아니었다.
제이든에게 여친이 있다고 할지언정 코앞으로 닥친 연회를 물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익명의 자작가 영애가 그의 마음을 뺏었다는 소문이 구혼자들 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연회에 참석하는 누군가는 여전히 미래의 스펜서 공작 부인 자리를 기대할 거였다. 심약하고 병약한 익명의 자작가 영애와는 싸워볼 만하겠다고 자신하며.
현재의 스펜서 공작 부인, 마담 스펜서는 내게 그런 것들에 대한 충분한 양해를 구했다. 물론 제이든의 가짜 여친인 나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지금껏 내가 신경 써 왔던 거라고는 자꾸만 튀어나오려고 하는 말괄량이 자아뿐이었으니까. 조디와 만나기 전까지는, 확실히 그랬다.
“제이든, 나 열심히 할 거야.”
내가 제이든의 귀에 말을 꽂아 넣기 위해서는 점프를 해야 했다. 때아닌 뜀박질에 박자와 동작이 전부 밀렸다. 어깨뼈 아래 가볍게 닿아 있던 손이 허리로 미끄러졌다. 제이든이 불에라도 덴 마냥 떨어져 나가자 우리가 놓친 춤곡의 가락은 꽃과 나무의 이파리를 흔들었다.
나는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춤 실력을 자부했던 적은 없었다. 춤을 추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제이든 스펜서의 ‘여친’을 온 수도가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춤을 추지 않고는 괜찮을 수 없었다. 그것도 잘.
그래서 제이든은 공작가 후계자로서의 업무와 밀루아 왕실 기사단 소속 기사로서의 업무에 치여 얼마 되지 않는 개인 시간을 쪼개고 쪼개 나를 또! 가르치기로 했다. 키가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심긴 미로 정원 덕분에 성사된, 은밀하기 그지없는 개인 교습이었다.
“춤을?”
제이든이 물었다. 일말의 두려움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볼턴에게 지독하게 갈궈진 덕분인지, 나는 시작의 달 연회 때보다 훨씬 덜 뚝딱거렸다. 덜 뚝딱거리는 것과 안 뚝딱거리는 것이 전혀 달랐으므로 그의 발등은 아작이 났다.
모진 세상을 살아가기에 지나치게 착한 제이든 스펜서는, 그럼에도, 나의 발놀림은 아주 가벼워서 어떤 자극도 되지 않았으며 내가 그를 밟는 게 반대의 경우보다 낫다고 격려했다(자극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통각을 잃은 탓이라고 했더니 제이든은 그냥 미소 지었다. 하지만 내가 하도 난리를 피워서 치료사를 만나기로 약속했다.).
“아니.”
뭐가 어찌 되었건 간에 내 결심은 춤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여친 선발 대회 말이야.”
“왜?”
제이든은 이제 내가 공작가의 자선 연회를 ‘제이든 스펜서 여친 선발 대회’라고 표현하는 것에 별달리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허구한 날 놀려 대었더니 무뎌진 모양이었다. 아쉬워서 입맛을 다셨다.
“내가 네 ‘여친’ 행세를 제대로 하면 당분간은 다들 잠잠할 거 아냐.”
주디스 그린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제이든에게 가장 진심이었다. 걔는 자기 남친 사진을 동봉한 편지에서도 편지지의 반 이상을 제이든의 팔뚝에 솟아난 핏줄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다. 근데 그런 조디에게마저 최고로 중요한 것이 제이든의 성씨라니. 남의 속은 진짜로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동시에 그게 현실이지 않나 싶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맥카시와 대릴 코완의 약혼처럼 말이다. 제이든 스펜서는 그의 됨됨이만을 따지기에는 과하게 완벽한 신랑감이었다.
그러나 리즈는 기어코 그녀의 낭만을 따랐다. 기왕이면 제이든도 그러면 좋을 거 같았다.
“난 네가 바라던 사랑을 찾았으면 좋겠거든.”
폼 잡고 말하자 제이든이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좋아하는 예쁜 웃음이었다.
기분이 좋아져서 아무렇게나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의 사교춤 강사가 허겁지겁 다가왔다. 크고 따스한 손아귀에 손을 얹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 팔이 꼬이길래 실은 시계 방향이 맞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