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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69화 (69/178)

69화

피츠시몬스 아카데미는 물론 대륙을 통틀어도 제이든 스펜서만한 가슴, 아니, 덩치는 흔치 않았다. 투구와 망토로 그게 가려질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저었더니 브리아나는 또 무음으로 웃다가 슬픔에 잠겼다.

‘모슬리 무슨 일 있어?’ 지나치게 조용한 브리가 신경 쓰였는지, 제이든이 엄지와 검지로 내 소매를 살짝 당긴 뒤 귓속말했다.

“말 못 할 사연이 있어.”

나는 사실만을 말했다.

“이따가 치료사나 불러 줘.”

그러자 그는 무슨 상상을 했는지 아주 어두워진 안색으로 그러겠다고 했다.

마차는 돌로 쌓아 올린 거대한 아치를 지나서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가꾸어진 꽃나무가 늘어서 있고, 멀리 온실 비슷한 것도 보여서 금방 지나친 아치가 저택의 입구임을 깨달았다. 달튼 저택은 정원도 좁고 온실도 없고 내 방까지 달려서 5분이 안 걸리는데, 확실히 수도 사는 최고위 귀족은 뭐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이윽고 저택이라기엔 성에 가까운 규모의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따지면 나는 지금 제이든의 초대를 받아 걔네 집에 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친구네 놀러 가면 으레 가족이랑도 대면하기 마련이고, 제이든의 가족이라 함은…

불현듯 내가 뇌물까지 받아 가면서 맡은 임무가 뭔지 매우 궁금해졌다. 따져 물었더니, 제이든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눈치였다.

“너도… 알다시피, 부모님이 좀….”

짙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눈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고 미간과 콧등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제이든 스펜서가 실은 어떻게 웃는 애인지를 잘 몰랐던 시절엔, 그러니까 지난 4년과 다섯 번의 9개월 동안은 그게 참 위협적이고 공포스럽게만 보였더랬다.

요새는, 글쎄. 나는 제이든이 험악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거기서 공포와는 전혀 다른 것을 발견하곤 했다. 내가 봤을 때 그의 깜찍함을 캐내는 건 흑수정을 캐내는 것보다 훨씬 수월한 작업이었다. 곡괭이를 쥔 게 브레넌 스톡스가 아니라 노움 광부여도 마찬가지였다.

“알지. 다음 주에 네 여친 선발 대회도 열린다며. 그래서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

‘진행? 그건 카일 빌라드의 전문 분야인데. 마시멜로 동물 경주가 열리면 중계를 걔가 하고 나는 주로 바람을 잡았거든.’ 신문을 팔락이며 깔깔거리자 제이든은 그걸 재빨리 낚아채서는 확 구겨 버렸다. 가엾은 종이들은 제이든의 손아귀에서 말도 안 되게 조그매졌다.

“그게, 그것 때문에…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다가….”

“하다가?”

“아카데미에 여자 친구가 있다고 거짓말해 버렸어.”

“맙소사, 제이든! 그런 거짓말을 하면 어떡해!”

손바닥을 볼에 대서 솟아오른 입꼬리를 뭉개면 대충 경악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했다. 제이든에게는 미안하지만 용도 때려잡는 밀루아의 영웅이 난데없이 자기 손으로 무덤을 파고들어 갔다면 누구든 웃지 않고는 견디기가 어려울 거였다.

잠깐. 남의 불행을 실컷 즐기던 와중에 문득 어떤 의문이 뇌리를 스쳤다. 이 재밌는 얘기의 어디에 내가 끼어들 구석이 있는 거지?

그러자 이제 곤혹스러워진 것은 나였다. 아리엘 달튼이 시어 원단을 치맛단에 꿰맨 드레스를 입고 스펜서 공작가의 연회에 참여해야 하는 거랑 제이든 스펜서가 가짜 여친을 만든 것의 연결고리를 도통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절망적인 가능성을 제외하면.

“혹시… 누구라고 말했어?”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제이든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봤다. 나도 제이든을 물끄러미 봤다. 부자연스럽게 길다고 느껴질 시간 동안 그러고 있다가 브리를 봤더니 걔도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소름이 끼쳐서 뒤를 돌아봤는데 아무도 없었다.

“맙소사, 제이든! 그런 거짓말을 하면 어떡해!”

아까 했던 말을 다시 했다. 이번에는 일말의 장난기도 섞이지 않은 진심이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는지, 브리아나가 결국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끄트머리가 갈라진 보라색 혀가 허공에 날름거렸다.

***

내가 연회장에서 로드 스펜서를 본 것은 한 번이었다. 그리고 그때에도 제이든의 아버지라기엔 너무 아담하지 않나 생각했다. 물론 나는 그에 비하면 거의 바닥에 붙은 먼지였지만, 그러니까, 제이든 스펜서가 워낙에 거대했으니까.

수수께끼는 오늘에서야 풀렸다. 마담 스펜서는 인자하고 아름답고 평생을 고귀하게 살아온 사람 특유의 기품을 보였으나 상당히 컸다. 나는 간혹 가다 제이든의 앞에 설 때면 무슨 산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미스 달튼! 정말 반가워요! 미리 알았다면 성녀 아미나의 날과 유니콘 발굽의 날에도 초대를 했을 텐데….”

마담 스펜서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내 편견 속 공작부인들과는 달리, 분에 맞지 않는 연애를 하는 자작가 영애에게 그다지 박하지 않았다. 박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아주 친절했던 것이다.

하기는 스펜서 공작 부인의 마음씨가 비단결이라는 소문은 탤론에 살지 않아도 쉽사리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빈민 구제에 관심이 지대해서, 그녀가 주최하는 연회의 대부분이 자선 행사라고 했다. 제이든 스펜서 여친 선발 대회, 명목상으로는 모금을 촉구하는 재능 기부 행사가 열리게 된 배경이었다.

“제이가 그러는데, 수줍음이 많으시다면서요.”

“네에….”

아마도 제이든은 그가 지금껏 연애를 숨겨 온 이유를 지나치게 내성적인 그의 ‘여친’ 에게서 찾은 모양이었다. 나는 미아가 자주 그러듯이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시선은 바닥을 향한 채였다. 입꼬리는 아주 약간만 올렸다. 이는 보이지 않고. 완벽해.

한편으로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제이든 스펜서, 기왕에 거짓말을 할 거면 잘이나 해 주던가. 밝고 예쁘고 똑똑한 애예요, 친구도 많죠, 사랑의 달 연회에서는 여왕으로 뽑혔어요, 하면 좀 좋아? 곁눈질로 흘기자 제이든이 초조한 마냥 침을 삼켰다. 울대뼈가 크게 움직였다.

“약한 몸으로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해요. 억지를 부린다는 건 알았지만, 너무 만나 보고 싶어서….”

게다가 아프기까지 해? 폐라도 토해 낼 기세로 기침을 뱉어 내며 주먹을 꼭 쥐었다. 비틀거리는 시늉을 하는 와중에는 제이든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너 이따가 보자.’ 귀에다 대고 이를 갈자 화려한 견장으로 못다 가린 어깨가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제이든이 그의 어머니에게 묘사한 아리엘 달튼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상처 입는 애였다. 지독한 인간 불신에 걸려 있기도 했다. 콘셉트를 지키기 위해, 나는 과감히 칩거를 택했다. 공작 부부에게 본모습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였다.

외출이라고는 제이든과 정원을 산책하는 것이 전부였는데, 나름대로 즐겁기는 했다. 제이든은 농담을 잘 하지는 않아도 놀리는 재미가 있었으며 스펜서 공작가의 정원은 어찌나 넓은지 아직 반도 돌지 못했다.

식사마저 배정된 방에서 해결하는 아가씨 때문에 애꿎은 일등 시녀가 미쳐 갔다. 샌크릭에서처럼 수도 탤론에서도 브리에게는 웅대한 계획이 있었다. 코른토 서점에서 <니베이아 모험기 : 밀루아의 역사적 미남들>을 구하는 건, 여섯 개의 밑줄과 세 개의 별로 강조된 중요 항목이었다. 그건 모험가 니베이아가 밀루아를 떠돌며 만난 잘생긴 남자들의 초상화와 그에 대한 서술이 실려 있는 책이었는데, 자타공인 남자에 환장한 브리아나 모슬리에게는 경전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일등 시녀는 숨만 쉬어도 죽어 나자빠지는 그녀의 아가씨 없이는 스펜서 저택의 손님용 별채를 빠져나갈 수 없었다. 아니, 없을 것이었다. 그 아가씨가 실은 2층 정도 높이의 창문에서는 뛰어내릴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고, 베개에 슈미즈를 입혀 그럴듯한 병자로 꾸미는 법에 통달해 있지 않다면 말이다!

달튼에서 가져온 옷들은 너무 후줄근해서 스펜서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입는 것과 비슷했다. 우리는 실내에서 편하게 입는 드레스만으로 변장을 마쳤다.

탤론은 피츠시몬스 아카데미나 달튼과는 전혀 달랐다. 좁고 작고 유일한 번화가에 모든 사람이 모이는 구조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브리아나가 노래를 부르는 미남 탐방기를 판매하는 곳은 바로 시청과 인접한 벨카나 지역이었는데, 거기에는 대부분의 밀루아 관광서에 실리는 빵집도 있었다. 우리는 그 유명한 ‘레이디 갈레고스의 타르트’를 먹으며 밀루아의 역사적 미남들을 살피기로 입을 모았다.

단, 지극히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레이디 갈레고스의 타르트’는 너무 유명한 나머지 그걸 사기 위해서는 누군가 줄을 서야 했다. 보통 귀족이라 함은 그런 지루한 짓을 사용인에게 떠넘기는 게 특기였다. 그러나 나와 브리아나는 수행원 없이 몰래 빠져나온 몸이었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마주 보다가 간단한 내기용 놀이를 했다.

치열한 접전 끝에 패배를 맛본 브리아나는 지루한 역할을 도맡는 대신 내게 엄청나게 중요한 임무를 내렸다. 여섯 개의 밑줄과 세 개의 별로 강조된 계획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나는 수도가 처음이 아니었으므로 코른토 서점의 위치를 대충 알았다. 비장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기로 <니베이아 모험기 : 밀루아의 역사적 미남들>은 코른토 서점의 전무후무한 베스트셀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책장의 어디에서도 턱이 갈라진 금발 남성이 표지에서 흉근을 자랑하는 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소심한 손짓으로 직원을 불렀다.

“저, 니베이아….”

“‘미남들’이요? 이따 열두 시 넘어서 입고돼요. 이름 적고 시간 맞춰 오시면 순차적으로 호명해 드릴게요.”

문의하는 사람이 많았는지, 직원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드렁하게 종이를 건넸다. 열두 시까지는 대충 이십 분 정도가 남아 있었으므로 근처를 구경하며 시간을 때우면 될 듯했다.

‘미남들’ 구매자 명단에 내 이름을 새기는 건 솔직히 부끄러웠다. 나는 브리아나의 이름을 팔아넘기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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