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키득거리며 두 번째 편지를 열었다. 엘리자베스 맥카시는 원래 잘 징징대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녀의 편지는 한탄으로 가득했다. 광산 개발이라는 게, 당연하게도, 쉽지가 않은가 보았다.
그럼에도 일반적인 것보다 다소 큰 규격의 봉투에는 흑수정 원석이 편지와 동봉되어 있었다. 초보 광부 브레넌 스톡스가 직접 캐낸 탓인지 수정보단 돌에 가까운 그것은 오브라이언 공작이 찍은 봉랍과 함께 놓였다.
다음 편지의 발신인은 뜻밖의 마르퀴즈 볼턴이었다. 평범한 안부 편지치고는 문장이 죄다 장황한 데다 두서가 없었다. 다시 보니까 그건 암호문이었다. 각 줄의 앞 글자를 연결하니 ‘대체 전하께 뭘 한 거냐’가 되었던 것이다(도저히 ‘냐’로 시작하는 단어를 찾아낼 수 없었는지, 마지막 문장은 정말 뜬금없게도 ‘냐옹’이었다. 그래서 나는 볼턴이 제정신이 아닐 가능성과 그의 편지에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을 가능성을 성공적으로 저울질할 수 있었다.).
전에 브리가 흘리듯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일레스티아 수도에서 발송되는 거의 모든 편지가 황성을 한 번쯤 거친다나. 아마도 볼턴이 끔찍한 문장만으로 작문을 시도한 이유가 바로 그것일 거였다.
그렇다는 건 켈란도 이걸 읽었다는 건데…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가 부관의 허접하기 그지없는 암호문을 해독하지 못할 확률은 없었다. 나는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지르며 편지를 봉투 째 벽난로에 집어 던졌다.
볼턴의 편지가 타오르는 벽난로에 성적표까지 넣고 나니 남은 편지는 하나였다. 말보다 글이 유려한 제이든은 그의 귀향 소식에 하루에도 몇 번씩 스펜서 공작가를 드나드는 귀족가 영애들 때문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스펜서 공작 부부가 본격적으로 제이든을 결혼 시장에 내보내기로 한 것 같았다.
조금 이르지 않나 싶었다. 근데 또 생각해 보면 나라도 사지가 차고 넘치게 멀쩡한 아들이 열아홉 먹도록 거시기에 얼굴 붉히는 숙맥으로 자랐다면, 결혼까지는 아니어도 연애라도 해 보라며 일찌감치 등 떠밀었을 거 같기는 했다.
아무튼 내 입장에선 불구경이었다. 나는 신이 나서 당장 답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저런, 제이든’? 아니지. ‘저런’은 너무 놀리는 거 같잖아. 놀리는 게 맞긴 해도 대놓고 그러면 화가 날 테니까 빼자. 그냥 ‘제이든’만.
그가 보낸 편지의 상태가 너무나 처참한 나머지 다음 문장은 불가항력으로 이어졌다. ‘네가 얼마나 글씨를 눌러 썼는지 가엾은 편지지가 구멍투성이가 됐어. 다음부터는 두꺼운 편지지를 쓰든지, 분노를 조절하는 게 좋겠어….’
“아리엘! 얼른 내려와 봐!”
브리아나 모슬리의 목청이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2층 서재에 있는 나의 귀에까지 걔의 외침이 꽂힐 정도였다. 달튼 항을 오가는 근육질 선원들을 구경하러 간다더니, 어쩐 일로 금방 돌아온 모양이었다.
깜짝 놀란 날다람쥐 집배원은 포도알을 볼에 억지로 욱여넣은 뒤에 날아가 버렸다. 나는 책상 서랍을 뒤져 브리에게 내보일 잡동사니들을 챙긴 뒤 서재를 나섰다.
“왜? 드디어 월시의 부고가 도착했어?”
“그것보다 환상적인 거야!”
내 기준에서 월시의 부고보다 환상적인 건 내 이름이 새겨진 졸업장뿐이었다. 심드렁하게 계단을 밟았다. 사용인들이 무언가를 분주히 나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제각기 크기가 다른 여러 개의 상자였다.
“또 아빠가 산 거야? 엘프식 날염 유행은 안 온다니까! 걔네는 풀만 뜯고 살아서 미감이 맛이 갔다고!”
“아닐 거예요, 아가씨. 요전에 마님께서는 엘프제 날염 원단에 금화를 하나라도 더 쓰면 손모가지를 자르겠다는 각서 없이는 절대 출항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고요.”
사용인들을 도와 상자를 구석에 쌓아 올리던 매디가 온화하게 말했다. ‘그래?’ 지긋지긋한 알록달록 원단 뭉치가 아니라니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어졌다. 나는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 내려갔다. 마침내 홀의 카펫에 발을 디뎠을 때 브리는 흥분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스펜서가 너한테 선물을 보냈나 봐! 열어 봐도 될까?”
“제이든이? 편지에는 그런 얘기가 없었는데.”
브리의 말마따나 상자들은 스펜서 공작가에서 제이든의 이름으로 보낸 것이었다. 나는 그게 엘프제 날염 원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보다 제이든이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더욱 놀랐다. 오늘은 내 생일도 아니었고, 내 생일이래도 이렇게 많은 선물을 제이든에게 받을 이유가 없었다. 영문 모를 불안감이 뒷목을 두드렸다.
브리의 강요에 가까운 권유를 받아 개중 가장 커다란 상자의 리본을 풀어 헤치자, 여러 겹으로 광택이 도는 드레스가 나타났다. 척 봐도 한두 푼 하는 물건이 아니었다. 자칫하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나겠다는 직감이 나를 강타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제이든의 선물을 도로 포장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륙의 모든 상자가 자기 집인 줄 아는 사고뭉치 고양이 릴루는 대담하고 날래게도 그 공포의 드레스에 엉덩이를 비비적대어 버렸다. 또 브리아나는 이미 겉옷과 구두에 이어 모자와 장신구까지 손에 거는 중이었다.
“아리엘, 이거 진짜 하피 꽁지깃이야!”
‘하피들은 죄다 체취가 고약한 줄 알았는데, 엄청 좋은 향기가 나네!’ 브리가 부채를 흔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윽고 부채 안쪽에서 작게 접은 쪽지가 떨어졌다. 어딘가 눈에 익은 생김새였다. 나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그것을 주워 들었다.
눈에 익을 수밖에. 그건 내가 제이든에게 족집게 과외의 보답으로 건넨 ‘아리엘 달튼 1일 자유 이용권’이었다. 제이든 스펜서 특유의 꼭꼭 눌러 쓴 글씨가 반대편에 그려진 내 얼굴을 뚫고 존재감을 뿜어냈다.
도와줘.
***
구조 요청서가 아닌 연회 초대장은 저녁에 도착했다. 밀루아의 영웅이 용을 타고 돌아온 날을 기념하는 연회였다. 생일도 뭣도 아닌 날을 기념해서 어디 쓰나 싶었지만 원래 매일매일 온갖 이유로 연회를 열어 대는 게 귀족이라는 작자들이니 그러려니 했다.
일례로 빌라드 백작가와 그들의 빨간 머리 친척들은 매년 빨간 머리의 날에 채드록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여했다. 공교롭게도, 빨간 머리의 날은 스펜서 공작가의 기념일 바로 전날이었다. 내 가방에 공간 확장 주문을 걸고 숨어들어 가려던 카일의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보통 연회 초대장과 드레스를 같이 보내는 까닭은 뻔했다. 덕분에 남의 그렇고 그런 얘기를 제일 좋아하는 브리아나 모슬리는 엄청나게 신났다. 전부터 제이든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는 둥, 너도 분발해야 된다는 둥,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일에게 눈치도 없이 난리길래 참다못해 입천장에 혀를 붙이는 주문을 외우고 말았다.
“브리, 정말 미안해. 제이든한테 부탁해서 치료사를 찾아볼게.”
그래서 나는 우리를 태운 기차가 수도로 가는 내도록 브리아나에게 싹싹 빌어야만 했다. 나의 처참한 마법 실력이 그녀의 혀를 입천장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 길고, 보라색에, 끄트머리가 약간 갈라지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입천장에 혀를 붙이는 마법진과 뱀 변신 마법진의 구조를 헷갈린 모양이었다.
브리는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노려보았으나 내가 쓴 모자챙의 일부가 뒤집어지자 꼼꼼히 고쳐 주었다. 또 기껏 말아 올린 머리카락이 눌리지 않도록 목 뒤에 베개 같은 걸 대어 주기도 했다.
초대장에 쓰인 이름이 하나였으므로 브리아나는 나의 시녀 자격으로 함께 수도행 기차를 탔다. 나는 친구를 시녀로 부리는 게 그다지 달갑진 않았는데, 브리는 괜찮은 것 같았다. 오히려 다수의 시녀 경력에서 나오는 바이브로 환상적인 서비스를 제공해 줄 테니 기대하라고나 했다.
환상적이기는 했다. 베넷 후작 부인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는 말이 허세는 아닌지, 일등 시녀 브리아나 모슬리를 동반한 여행길은 진짜로 완벽하게 쾌적했다(어쩌면 그녀가 떠들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쾌적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다. 얘는 진짜 다 좋은데 말이 너무 많았다.).
물론 말하지 않는 브리아나가 아쉬울 때도 있었다. 수도 근방의 간이역에 잠깐 내려 구매한 신문에는 다양한 사교계 소식이 실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스펜서 공작 부부가 아들의 혼사와 관련하여 내린 새 지침이 포함되어 있었다. 앞으로 공작가에 청혼서를 넣을 모든 미혼 귀족 여성은 차주에 열리는 연회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말하자면 장기 자랑이었다.
“무슨 동화 같다, 야. 연회장 의자 밑에 완두콩 안 넣어 두나 몰라.”
내 너스레에 브리는 보라색 혀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입을 틀어막고 폭소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에는 다소 침울해진 듯 보였다. 구혼자들을 ‘완두콩을 깔고 잔 공주’에 비유한 여러 농담을 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어서인 듯했다.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린 브리를 보고 있자니 나도 차분해졌다.
우리는 기차에서 열 시간쯤 노닥거린 뒤 스펜서 공작가에서 보낸 마차로 갈아탔다. 화려한 더블릿 위에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망토를 걸친 기사가 나와 브리아나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 수상쩍게도 얼굴을 투구로 완전히 가린 채였다. 일등 시녀 브리아나 모슬리의 뾰족한 눈초리에 거대한 몸이 속절없이 움츠러들었다.
“고마워요.”
시치미를 떼기는 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진작에 알았다. ‘서 스펜서.’ 조그맣게 덧붙여 주었더니 어깨를 들썩거리는 모양새가 제법 웃겼다.
“많이 티 나?”
제이든은 마차에 자리를 잡자마자 투구를 벗어젖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던 건지 이마가 온통 땀이었다. 가방을 뒤져 손수건을 건네었다. 절로 측은지심이 새어 나왔다.
“왜 티가 안 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네, 제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