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아무튼, 족보에 따르면, 지금 시점에서 제일 공략이 시급한 건 바로 에드가였다. 쌍둥이는 한쪽을 공략하면 다른 쪽이 따라오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나돈이 블로썸에게 로즈마리 왕비의 귀걸이를 넘기기 전에 어떻게든 에드가로부터 그걸 얻어내야 한다고 했다.
다음으로 제이든의 이름이 나왔다. 그의 ‘이벤트’는 대개 2학기에 몰려 있었으므로 블로썸도 제이든은 거의 공략하지 않았다.
“전에 내가 아직 때가 안 됐다고 했던 거 기억하지?”
나는 당당하게 부인했다. 전혀 기억이 안 났다. 카일은 되게 측은하다는 듯이 나를 보더니 앞으로 호두를 챙겨 먹으라고 했다. 화가 났다.
볼턴은, 포기하는 게 빠르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에드가처럼 파고들 만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블로썸에게 이미 완전히 매료된 이상 노력해 봐야 절친이 한계라고 했다. 그와 친구하는 게 싫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볼턴은 잔소리가 너무 많아서 절친까지 되면 괴로울 거 같았다. ‘으.’ 나는 멋진 척을 하며 안경을 추켜올리는 볼턴의 초상화를 책상 끝까지 밀어냈다.
마침내 켈란 일레스티아의 4할이 못생겨져도 여전히 잘생긴 초상화를 집어 든 순간 카일이 무심코 혀를 찼다. 나는 얘가 친분과는 별개로 켈란에게 적개심 비슷한 걸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종종 받았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카일은 켈란의 신상보다도 그를 공략함으로써 감수해야 하는 위험들을 먼저 읊어 내려갔다. ‘버그’가 생겼던 인물이라 블로썸이 주시하는 중이고, 속을 알기 어렵다는 게 주어진 설정값이라 호감도가 오르는 선택도 종잡을 수가 없고, 케이틀린 대제와 대립해야 하는 만큼 힘든 일도 있을 거고….
“물론 어느 정도 공략은 되어야 하겠지, 시스템을 흔들려면. 내 말은….”
기나긴 서두 끝에 마침내 카일은 아마도 그가 진짜로 하려던 말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켈란을 사랑하지 말아 줘.”
“뭐?”
“내가 아니어도 괜찮아. 라모스여도 괜찮고, 제이든이어도, 분하지만 밀루아에서 걔한테 비빌 결혼 상대는 없으니까, 괜찮아. 하다못해 네가 마르퀴즈 볼턴을 사랑하게 된대도 응원할 수 있어. 응원에는 도가 텄거든. 하지만 켈란은 아냐.”
“…….”
“약속해 줘, 아리. 무슨 일이 있어도 켈란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그와 ‘이벤트’를 보고, 그의 ‘루트’를 따르게 되어도, 네 마음만은 주지 않겠다고.”
‘나를, 네 친구를, 너를 무엇보다 아끼는 카일을 위해서.’ 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볍게 불어온 목소리가 한참이나 귓가에 맴돌았다. 사뭇 진지한 모습이었다. 나를 슬프게 하지 않겠노라던 언젠가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다른 공략 대상보다 켈란과 가장 많은 것을 나눈 상태였다. 심지어는….
문득 그 키스를 짚고 넘어가지 않는 건 카일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 처사처럼 생각되었다. 카일이 내게 진실한 만큼 나도 그렇게 해야지 맞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로즈마리 블로썸의 생일 연회에서 벌어진 사건을 최대한 솔직하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얘를, 내 친구를, 나를 무엇보다 아끼는 카일을 위해서.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카일은 꽤나 황당해 보였고, 잠깐은 욱했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의기소침해졌다. 그가 지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잘해 보고 싶은 거야? 켈란 일레스티아랑?”
“난, 어… 모르겠어. 그냥 걔가 너무 잘생겼고, 그리고 술도 마셨고….”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올 줄은 몰라서, 스스로 듣기에도 멍청한 대꾸가 뇌를 거치지 않고 흘러 나갔다. 나는 즉시 혹독한 후회에 몸서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일은 퍽 단호하게 굴었다.
“안 돼. 켈란은, 걔는 그럴 자격 없어. 나한테 네 마음을 강제할 권리가 없다는 걸 아는데, 그래도.”
내가 알기로 켈란에게는 그에게 퍼부어지는 의문스러운 분노를 감당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카일은 생각이 달라 보였다. 그리고 그걸 내게 알려 주고 싶지도 않은 듯했다.
정말로 궁금해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으나, 아무리 캐물어도 카일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젓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켈란에 대해 언급하면 언급할수록 그는 점차 턱과 어깨가 완전히 여문 열아홉의 카일에서 빌라드 저택의 울보 도련님이 되어 갔다.
“왜 하필 너처럼 매정한 애한테 반해 가지고….”
집요한 추궁 끝에 남은 거라고는 설움이 전부였다. 카일이 어느새 빨개진 눈가를 꾹 누르며 웅얼거렸다.
“나도, 너랑 뽀뽀하고 싶었단 말이야….”
“맙소사, 카일!”
어지간한 경우 나는 내가 울린 카일 빌라드에게 지극히 관대했으나 이번만은 아니었다.
“넌 거의 영원히 살았어! 고작 뽀뽀에 매달릴 나이가 아니라고!”
기가 막혀서 외치자 카일은 나랑 하는 뽀뽀가 ‘고작’ 뽀뽀가 될 수는 없다고 우겨 댔다.
그 빈틈없는 궤변을 듣고 있자니 어안이 벙벙한 한편 어떤 충동이 나를 지배했다. 이런 미친. 못돼 처먹은 릴루는 나랑 뽀뽀하기 싫어서 우는데, 얘는 나랑 뽀뽀를 못 해서 우네. 다음 순간 이 나잇값과 덩치값을 한꺼번에 시궁창에 내던진 소꿉친구가 매우 한심하고 또 약간은 깜찍하게 느껴졌다.
“좋아, 카일 다미앙 빌라드. 난 널 사랑하진 않아도 많이 좋아해. 입술 정도는 내줄 수 있을 만큼.”
첫 키스의 환상이 무참히 깨졌기 때문인지, 전처럼 카일과의 뽀뽀가 거북하게 상상되지는 않았다. 까짓것 릴루라고 최면 걸면 못 할 것도 없을 듯했다. 큰맘을 먹고 팔을 벌리자 카일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딸꾹질을 했다.
“싫어? 싫음 말고.”
“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 좀, 그게, 그러니까, 갑작스럽다는 거지….”
“그게 그거지!”
“아냐! 나는 그냥, 나는 엄청 하고 싶지만, 네가, 너는 나랑 그러고 싶지 않을 거니까….”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나 지금 되게 부끄럽단 말이야!”
내 낯이 암만 두꺼워도 이런 상황에서까지는 아니었다. 귓불이 타오르는 기분에 채근을 하니까 카일은 잽싸게 내 앞에 섰다. 근데 그러고 나서도 지겹게 미적거리는 것이 아닌가.
팔이 떨어져 나갈 거 같아서 욕을 좀 했다. 그건 죽은 낭만을 되살리는 마법 주문은 아니었으나 느림보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마법 주문은 맞았다.
“나중에 후회할 거 같긴 한데… 일단 이걸로 견뎌 볼게.”
불현듯 뜨끈한 손바닥이 입가에 닿아 왔다. ‘야, 뭐 하자는 거야?’ 뜻밖의 감각에 입술을 오물거리자 카일은 비명을 지르면서 떨어져 나갔다. 사과의 의미로 어깨를 으쓱이고 나니까 다시 손이 내려앉았다. 느리고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입맞춤은 내 입술이 아닌 그의 손등에 떨어졌다. 즉 우리는 카일의 손을 사이에 두고 뽀뽀를 한 것이었다. 눈을 감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나는 소꿉친구의 남자답게 튀어나온 눈썹뼈와 가지런한 눈썹을 아주 가까이서 접했다. 긴장으로 떨리는 속눈썹에는 미처 닦아 내지 못한 물기가 맺혀 있었다.
숨을 참고 있는 모양인지, 손바닥 너머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확실히 켈란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뭐랄까, 경건한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신의 발등에 입을 맞춘대도 이러지는 않을 거 같았다. 더구나 나는 신이 아니고 사람이었다. 속이 굉장히 간질거렸다.
“그냥 하는 거보다 더 이상해.”
내 불평에 카일은 수줍게 웃었는데, 그건 얘한테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종류의 얼굴이었다. 기분이 엄청 묘했다.
그래서 나는 책상을 정리하는 척하면서 켈란의 못생겼지만 잘생긴 초상화가 담긴 종이를 뒤집었다. 그가 지금의 나를 보지 못하도록.
***
아리엘에게.
안녕, 아리엘. 잘 지내고 있니? 나는 잘 지내고 있어. 놀랍게도 말이야.
너는 내가 숨겨진 달변가일지도 모르겠다고 했지만, 글쎄, 틀린 것 같아.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아주 오랫동안 내가 느껴 온 것들을 전부 설명했는데 부모님께서는 반도 알아듣지 못하셨어. 그리고 그건 두 분의 문제만은 아니었지. 왜냐면 내가 너무 심하게 떨었거든. 재키는 그런 식으로는 바보도 설득할 수 없을 거라고 했어. 너희가 재키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알지만, 걔는 거짓말을 지독하게 못해.
그래서 다른 활로를 찾기로 했지. 내게 달변가의 재능이 없더래도 확실히 격투가의 재능은 있었으니까. 브리아나는 내가 소리 내지 않는 것을 답답해했지만, 꼭 소리로만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가끔은 그저 행동해 버리는 게 수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야. 나는 나의 혀보다 주먹에서 어떤 가치와 가망을 발견했어. 도넬리 준남작의 낭심을 걷어찼을 때 공작께서 보였던 표정은 그야말로 걸작이었어.
이번 방학은 오브라이언 저택에 갇힌 채 종일 감시를 당하며 보내게 될 거야. 하지만 나의 새로운 성서 속 율법들을 준수하는 와중에는 충분한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거기 적힌 구절은 단 하나거든. 참지 않도록 하라. 어쩌면 너희 신문에도 일레스티아의 오브라이언 공녀가 미쳤다는 소식이 실릴 수 있겠지.
결론적으로 수도원에 갈 일은 없어졌으니까(공작 부인께서는 광증을 가진 상태에서 신을 모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어. 나도 그녀에게 동의해.), 성공한 거라고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네. 그래도 확실히 속은 후련해지더라. 다시 한번 고마워.
너의 아름답고 우아한 머저리가.
추신1. 아버지, 제 편지를 읽는 걸 알고 있어요. 제발 부탁인데, 봉랍을 뜯을 거면 다시 찍을 때는 제대로 해 주세요. 저는 그걸 찍는 각도를 정말 오래 고민한단 말이에요!
추신2. 만일 뜯기 이전처럼 깔끔하게 찍는 게 어려우시다면 꽃이라도 같이 찍어 주세요. 아리엘은 꽃을 좋아해요.
아나이스의 편지에 흉하게 달라붙은 봉랍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끼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떼어 책상 서랍에 보관했다. 나중에 브리한테 보여 줘야지.
편지를 가져온 날다람쥐에게 껍질을 깐 포도 한 알을 건네자 또 다른 편지가 내 무릎에 떨어졌다. 신입 집배원이 드디어 선배들로부터 노하우를 전수받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