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방금까지만 해도 카일은 짐 검사대 부근에서 제이든 스펜서와 뭔가 심각하게 말하고 있었다. 무심코 그쪽을 쳐다보자 짐을 내리던 제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짧은 목례를 나누고 나서, 제이든이 입모양으로 ‘편지할게’라고 했다. 나는 조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든의 덩치가 너무 거대해서인지, 그의 여행 가방은 아기 장난감처럼 보였다.
“쟤도 어차피 기차역 가는 거 아냐?”
“뒷문으로 나간대.”
카일이 그가 챙긴 내 가방들을 건네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긴, 제이든 스펜서는 밀루아 최고의 유명 인사였다. 그의 인형(의 짝퉁)은 몇 달째 달튼 상단 최고 인기 품목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내가 알기로 지난 학기에도 제이든은 출입국 관리청부터 기차역까지 이동하는 내내 추종자들에게 시달렸다.
“야, 빌라드! 왜 내 거는 안 가져와?”
“네 게 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브리아나가 씩씩대며 짐 검사대로 간 사이 나는 카일에게 입국 허가서에 하필이면 오리아나 한츠가 그린 초상화를 제출한 누구 이야기를 했다. 짐을 끌고 돌아온 누구에게 그녀의 수치가 까발려진 사실을 고자질하는 바람에 내 팔뚝에 생긴 손자국까지 포함하여, 카일은 되게 즐거워했다.
***
기차가 밀루아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가는 동안 브리아나 모슬리는 정말로 자는 시간 외에는 줄곧 창문에 코를 박고 있었다. 이러다가 내릴 때쯤에는 고개가 왼쪽으로 꺾여 버리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밀루아는… 상당히… 목가적이구나.”
브리가 ‘시골’이라는 말을 돌려서 했다.
“일레스티아에 비하면 그렇지 뭐.”
카일이 막대에 꽂힌 소시지를 씹으며 그랬다. 말마따나 땅만 넓었지 낙후하기 그지없는 밀루아와는 다르게, 일레스티아 국토의 대부분은 개발되어 있었다. 보통 그런 데서는 ‘목가적인’ 분위기가 나기는 힘들었다.
“너는 왜 너네 객실에 안 있고 자꾸 남의 객실을 침범해?”
“거기 캠든 보우만 있단 말이야. 난 걔 싫어. 발냄새 나. 애초에 왜 공간 이동을 안 하고 기차를 탄 거야? 돈도 많으면서.”
내 면박에 되레 구시렁대며, 카일은 은근슬쩍 옆자리로 엉덩이를 댔다. 버릇처럼 어깨에 올라온 팔꿈치는 앉은 거리를 조금 벌리니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음에도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카일을 볼 때마다 심장이 따끔거렸다. 어쩔 수가 없기는 했다. 내 첫 키스에 대한 환상을 지킨답시고 얘를 주먹으로 때린 지 진짜 며칠도 안 되어서 켈란이랑 키스해 버렸으니까. 술 취해 들이대 가지고 성사한 첫 키스에는 얼마나 대단한 환상이 있단 말인가.
갑자기 되게 궁금해졌다. 나는 도대체 켈란 일레스티아와 뭘 하고 싶은 걸까? 또 켈란은? 걔는 무슨 이유에서 내 억지를 들어줬을까? 그냥 험프리스 교수를 불렀다면 전부 해결되었을 텐데.
의문들에 대한 답을 구할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만일 내가 쥐새끼처럼 숨지 않았다면 말이다. 기차역에서 마주친 켄드라와 미아는 켈란이 나를 찾는 모습을 적어도 세 번은 봤다고 했다. 여자 기숙사에서, 광장에서, 밀루아행 공간 이동 마법진 앞에서.
아쉬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여자 기숙사나 광장이나 공간 이동 마법진 앞에서 켈란을 만났더라면 지금쯤 뭔가 달라졌으려나. 어쩌면 모처럼의 방학을 찝찝한 기분으로 보내지 않을 수도 있었을는지 몰랐다.
하지만 솔직히, 그 짓거리 이후에 켈란과 대면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켈란은 일레스티아의 황태자였고 피츠시몬스의 학생회장이었다. 정말로 토가 나오게 잘생기기도 했다. 그에게 여자애랑 키스하는 건 간식 먹는 거랑 비슷한 감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일 나 혼자 그 키스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거라면, 그걸 확인하게 된다면 쪽팔려서 죽고 싶을 거 같았다.
아냐. 사실 그건 다 변명이었다. 내가 켈란을 마주하지 못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내 탓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너무 달라져 버린 우리의 관계와, 앞으로 그것이 낳을 혼란을 감당할 만큼 용감하지 못해서. 회피 외의 해결책을 떠올릴 만큼 현명하지 못해서. 내 마음에 대한 확신조차 없을 만큼 단단하지 못해서. 즉, 비겁한 데다 무르기까지 한 머저리여서.
간식이라. 카일이 맛있다고 난리인 소시지를 뺏어 입에 욱여넣었다. 짭짤했다.
최초의 국외 여행에 엄청나게 흥분한 브리아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말 그대로 모든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녀가 던지는 끝없는 질문들에 엉터리로 대답하는 일은 처음에는 재미있었으나 반나절이 지나자 재밌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내게는, 산양이 절벽에서 추락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가짜 설명 외에도 고민할 게 많았던 것이다.
켈란과 카일과 기타 등등에 지나치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나는 기관사의 안내 방송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물음표 살인마 브리아나 모슬리가 ‘샌크릭이 어디야?’라고 묻지 않았다면 기차를 하루 넘게 타고도 비싼 돈 내고 공간 이동을 해야 됐을 거였다.
허겁지겁 짐을 챙겨 기차에서 내렸다. 한 무리의 빨간 머리가 즉시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샌크릭에서 이디스를 다 보네!”
“아리엘, 숙녀는 치맛단이 뒤집어진 채 뛰지 않는단다.”
“이거 치마 아냐.”
내가 허벅지 아래로 오는 치맛자락을 들어 안쪽에 입은 바지를 보이자 브리가 내 손등을 찰싹 때렸다. 드레스를 살짝 잡고 무릎을 구부리는 그녀에게는 얄미운 우아함이 있었다.
“페터슨 후작 부인, 브리아나 모슬리입니다.”
“카일에게 얘기 들었어요, 미스 모슬리. 이디스라고 불러요.”
“저도 브리아나라고 불러 주세요, 이디스.”
“고마워요, 브리아나. 아리엘의 룸메이트라고 했죠? 실례가 많겠네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자 브리는 눈을 내리깔고 모른 체를 했다. 그러더니 이디스와 친근하게 팔짱을 끼고 앞서 나가는 것이 아닌가. 마차 정류장까지 가는 길도 모르는 주제에!
먹고 죽으려도 쓸모가 없는 악우가 에테릴 강 오리알 꼴이 된 나를 삿대질하며 낄낄거렸다. 나는 여행 가방을 단단히 고쳐 쥐고는 그를 향해 휘둘렀다. 평소 둔기 수련에 힘쓰지 않아 잽싼 빌라드를 응징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다행히 오갈 데 없는 분노를 해소할 다른 빌라드가 금방 나타났다.
“마베릭은 또 뭐 하러 왔어?”
“네 짐 들어 주러 왔다, 왜.”
마베릭이 내게서 여행 가방을 받아 들며 덧붙였다.
“그리고 신디가 오후 세 시까지 너 안 데려오면 가만있지 않을 거래.”
“최대한 서둘러야겠네.”
카일이 엄숙하게 말했다. 나도 비장해졌다. 신시아는 원래도 잘 토라지는 애였지만 저렇게 예고까지 한다는 건 진짜 지독하게 토라질 예정이라는 뜻이었다. 새삼 방학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근래 들어 접하기 어려웠던 충만한 평화가 느껴졌다.
***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도 갔다. 이디스가 결혼하고 나서 샌크릭에서 그녀와 어울리는 것은 정말이지 오래간만이었다.
이디스와 코넬리아, 브리와 나 그리고 올해부터 스스로를 ‘숙녀’라고 칭하기 시작한 신시아는 저녁을 먹고 나서 아주 오래도록 티타임을 가졌다. 나는 이디스의 남편의 둘째 동생이 내 후배인 미아 페터슨이라는 사실을 빌라드 저택의 응접실에서 처음 들었다(이디스는 그녀의 짐보다 가족에게 건넬 선물을 훨씬 많이 싸 들고 왔다. 미아와 미아의 오빠가 부탁한 것이라고 했다. 페터슨 후작령이 위치한 힌리치는 수공예로 이름난 곳이어서, 다들 갑자기 돈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액세서리투성이가 되었다.).
티타임을 주최한 것은 신시아였다. 이 귀여운 열 살배기 숙녀는 그녀가 동생인 벤자민과는 달리 더는 어린이용 찻잔-보호 주문이 걸려 있어서, 떨어뜨려도 잘 깨지지 않고 일정 수준 이상으로 뜨거워지지 않는-을 사용하지 않는단 사실을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우리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을 뽐내듯이 집어 든 새침데기에게 칭찬의 말을 번갈아 가며 얹어 주었다. 결과적으로 별로 좋은 처세는 아니었다. 어깨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간 신디가 홍차를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디가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했다는 건 늦은 밤까지 아무도 빌라드 저택을 떠날 수 없다는 뜻이 되었다. 그래서 나와 브리가 빌라드 가문의 마차를 빌려 타고 달튼 저택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새벽이 깊은 시각이었다. 착한 나의 유모 매들린은 졸음을 얼굴에 주렁주렁 달고도 ‘늙은이가 되면 잠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안해하는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브리아나 모슬리에게는 방학을 알차게 즐길 두 달 치의 완벽한 계획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계획에는 내 존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슬프게도 나는 브리가 원하는 만큼 한가하지 못했다.
대충 10년째 격무에 시달리고 있는 달튼 영지의 경영 대리인 뎀시 준남작은 자작 부부의 외동딸이 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온갖 장부들을 들이밀었다. 내가 이어받을 건 영지가 아니라 상단이고, 그가 은퇴에 성공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말해 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브리는 내게 자신을 스타닉 산이나 프라스웰 호수에 데려갈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를 무참히 버렸다. 운명처럼 코넬리아 빌라드를 만난 까닭이었다. 티타임 이후로 브리아나는 코넬리아를 꽤나 멋진, 그리고 한가한 선배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코넬리아는, 명탐정 코넬리우스의 활약상을 들을 귀만 있다면 그게 밴시였어도 마땅히 친해졌을 거였다.
내가 봐도 둘은 짝짜꿍이 잘 맞았다. 나는 코넬리아와의 외출을 위해 치장하는 브리에게 ‘그래도 제일 친한 친구는 나지?’라고 물었다가 집착하는 사람은 매력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서운했다.
“야, 집착하는 사람은 매력 없어?”
“나한테 하는 말이야?”
카일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검지로 제 가슴을 짚었다. 그는 내게 게임과 공략 대상들에 대한 특별 과외를 하는 중이었다. ‘아니.’ 나는 짜증스레 깃펜을 내던졌다.
“그런 얘길 하자는 게 아니잖아.”
키스 미수로부터 시간이 꽤나 지났고, 켈란과의 사건으로 인한 죄책감이 나를 꽤나 물렁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카일은 요새 좀 느끼해졌다.
책상에 깔린 여러 장의 종이에는 공략 대상의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카일이 편찬한, 일종의 족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유감스러운 그림 실력 역시 십분 발휘되어, 얼굴 특징을 열받게 잡아 실물보다 4할쯤 못생긴 초상화도 함께였다. 에드가 라모스가 이걸 봤다가는 얘를 태우고도 남겠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