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술 마셨어?”
“그런가 봐….”
“‘그런가 봐’라니.”
“감자 맛이 나서….”
켈란은 잠깐 ‘무슨 헛소리야?’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그가 브리아나 모슬리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마도 일레스티아의 정보망은 여자 기숙사까지 뻗어 있나 보았다. 감탄과 약간의 비아냥을 삼키며 늘어진 몸뚱어리를 추슬렀다. 내가 멀쩡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애처롭게 사지를 흐느적대면서는 무엇도 증명할 수 없었다. 이건 비밀인데, 실은 멀쩡하지도 않았다. 켈란의 잘생긴 얼굴이 두 개 반이나 보였다.
“큰일이네. 신성력으로 해독은 불가능한데. 스태포드 교수님이나 험프리스 교수님을 모셔 올까?”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야.”
켈란은 나를 전혀 믿지 않는 듯했지만 주정뱅이를 설득하고 싶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가 엉거주춤 일어서다 도로 앉았다. 그리고 방금까지 읽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어지간히 중요한 서류가 맞는 모양이었다. 내가 오우거를 피해 그의 선실에 난입한 이후로도 켈란은 줄곧 그걸 넘기고 있었다. 평소 보기 힘든 안경을 걸친 차림새였다.
깔끔한 디자인의 가느다란 금테 안경은 켈란의 단정한 외모에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그게 얼마나 그와 잘 어울렸냐면, 나는 켈란이 그걸 쓰는 순간 나를 유혹하려는 줄 알았다.
“정말이야… 5분만 있으면 괜찮아져.”
스스로 판단해도 전혀 신뢰가 되지 않는 말투로 지껄이고 나서, 나는 시계의 초침에 맞추어 초를 세기 시작했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굴던 켈란이 내가 55 다음에 57을 세면 ‘56이 빠졌어’라고 짚어 주는 게 재밌었다.
372까지 세었을 때 나는 5분이 훨씬 지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굉장히 얌전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것을 말해야 하겠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이를테면 고주망태가 아니고서야 절대 언급하지 않을 만한 것들.
“…패닝턴 말이야. 왜 자퇴한 거야?”
아나이스는 휴학계를 낼 때 험프리스 교수의 사무실에서 제임스 ‘지미’ 패닝턴과 관련된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고 했다. 켈란은 안경 너머로 나를 흘긋 본 다음에 대꾸했다.
“자퇴서를 냈으니까?”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좋아. 더는 닮은 암살자를 구할 수 없었거든.”
켈란이 친절하게도 두 번이나 대답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우 억울해져서 허공에 주먹을 내질렀다.
“걔한테 한 방 갈길 게 있었다고.”
“미안. 대신 나를 칠래?”
“아니.”
죽빵을 갈기는 건 내가 그와 하고 싶은 행위를 나열한 목록의 가장 끝에 있었다. 혹여 그게 가능한 상황이 오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켈란.”
뭣 때문에 난데없이 이런 말까지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지금 감자 맛밖에 못 느껴.”
“알아.”
“뽀뽀해도 감자 맛만 날 거래.”
웃겨, 아리엘. 뭐라는 거야? 간만에 아리엘 달튼의 오십 가지 그림자가 아우성쳤다. 너도 자퇴하고 싶어서 그래? 야유를 던지는 이성적인 그림자를 낭만적인 그림자가 찔러 죽였다. 걔는 단번에 내 심장을 찢고 나와서는 목구멍을 기어올라 폭주했다.
“감자 맛이 날 거라고.”
“무슨 뜻이야?”
했던 말을 또 하자 켈란은 나를 뚫어져라 봤다. 나도 그렇게 했다. 초점이 잘 맞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무슨 뜻이냐고? 내가 어떻게 알아. 나불거리는 건 입이지 머리가 아니었다. 드워프제 고도주가 장기들을 완전히 녹여 놓은 탓에, 내 머리는 몸의 다른 부분을 조종하는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문득 입가에 딱딱한 게 있어서 흠칫 놀랐다. 근데 알고 보니 그건 내 손끝이었다. 나는 취했지만 사지의 통제력을 잃었을 뿐 정신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그래서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할 수 있었다.
나는 입술을 더듬고 있었다. 켈란을 쳐다보며. 약간 끈적할 수도 있었다. 그게 어떤 식으로 비추어질지 모를 만큼 순진하진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몰랐다. 아까도 말했지만, 생각했나? 아무튼, 손가락의 의도가 뇌까지 전달되지 않아서 그랬다.
어쨌든 중요한 건 켈란이 금발이고, 눈이 부시게 잘생겼고, 내게 다가오는 중이라는 거였다. 멋진 안경은 팔걸이에 내려놓은 채였다. 후덥지근한 공기에 넘실거리는 술 냄새를 비집고 상쾌한 유칼립투스 향이 가까워졌다.
지나치게.
“…이런 뜻이야?”
등받이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이는 켈란의 움직임은 아주 느릿했다. 문득 도망칠 말미를 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도망쳐 봤자 소용없다고 속삭이는 듯도 했다.
아무튼 나는 도망치지 못했다. 그의 팔은 길고 뺨을 스치는 공단 옷감은 매끄러운 데다가 싸늘했다. 뱀에게 잡아먹히는 생쥐가 된 기분이었다.
먼저 입술을 붙인 것은 나였지만, 지그시 누른 것은 켈란이었다. 우리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러고 있었다.
부족한 호흡을 보충하기 위해 입을 벌리자 켈란은 그걸…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가 내 아랫입술을 약하게 깨물고는 고개를 기울여 깊게 파고들었다.
키스하는 중에 켈란은 조금씩 내 위로 올라왔다. 입안이 온통 그의 숨으로 가득했다. 술기운으로 막 어지러웠다. 아니, 그건 술기운이 아니었다. 자세를 바꾸며 떨어졌던 입술이 재차 급하게 붙을 때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오감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눈꺼풀 안쪽으로는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이런 자극은, 난생처음이었다.
부지불식간에 빠듯하게 닿은 몸을 살짝 물리자 켈란은 순순히 멀어졌다. 동공이 크게 열린 호박색 눈동자에 채 갈무리하지 못한 욕망이 일렁거렸다. ‘어때?’ 그가 낮게 웃었다. ‘무슨 맛이 났어?’ 그제야 나는 그와 입을 맞추면서 감자 맛 같은 것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답했더니 켈란은 다시 키스해 왔다. 이번에는 아까만큼 끈질기진 않았지만 훨씬 격렬한 키스였다. 입술이 부딪치는 각도가 달라질 때마다 축축한 소리가 났다.
누군가와 입술을 맞대는 감각이 이렇게 중독적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느 순간 나는 숨을 헐떡이며 켈란의 가슴팍에 매달려 있었다. 심장이 거칠게 날뛰었고 속이 울렁거렸다.
잠깐, 속이 울렁거려?
낭만적인 그림자에 의해 살해당한 줄만 알았던 이성적인 그림자가 가까스로 켈란을 밀쳐 내는 데 성공했다. 곧바로 성대한 구역질이 이어졌다. 광택이 도는 군청색 공단 셔츠에 말간 물이 쏟아졌다. 구황 작물의 저주로 인해 식사를 거의 하지 않은 탓이었다. 다행이다. 의식이 날아가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가 내게 질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공간 이동 마법진을 통해 도착한 밀루아 남부 출입국 관리청에서, 나는 카일과 함께 내국인 입국 심사 줄에 설 수 있었으나 브리아나와 함께 내/외국인 심사 줄에 서는 것을 택했다. 우리는 가져온 짐과 입국 허가서를 검사대에 올리고 조금씩 이동하면서 계속 떠들었다.
“브리, 혹시 기억을 지우는 약을 만들 수 있어?”
“그건 금지 약물이라 마탑 허가 없이는 못 만들어. 개학하면 험프리스 교수님께 부탁해 볼까? 근데 왜?”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2학기까지 기다릴 수도 없거니와 대체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내가 어제 술에 진탕 취해서 너네 황태자랑 키스를 했는데….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뜨거워졌다.
얼핏 봐도 만만찮은 가격이 아닐 공단 셔츠의 처참한 꼴이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이었다. 다시 눈이 뜨인 순간 나는 침대 속에 있었다. 브리아나에게 듣기로, 그녀가 방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이미 잠꼬대로 휴스턴 교수를 욕하는 중이었단다.
‘냄새가 너무 나서 술통에 빠지기라도 한 줄 알았잖아.’ 브리의 핀잔 섞인 농담을 도저히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선실에서 기숙사로 옮겨지는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가 너무 궁금했다. 동시에 죽어도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나는 공포에 사로잡혀 쥐새끼처럼 은밀히 아카데미를 나섰다.
켈란은 신성력이 해독 작용을 하지는 않는다고 했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내 혀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던 구황 작물의 저주는 켈란과의 입맞춤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감자 맛 뽀뽀 미스터리를 끝까지 풀지 못했다. 대신 심심하면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치를 떨었다.
‘뽀뽀해도 감자 맛만 날 거래’? 미쳤냐, 진짜?
소매 단추에 튀어나온 실밥을 무아지경으로 쥐어뜯다 보니 마침내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나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사는 듯 지쳐 있는 심사관에게 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국인이에요.”
그러자 그가 건성으로 주문을 외웠다. 마나의 성질을 감별하는 것이었다. 이질적인 기운이 전신을 구석구석 돌고 난 후 손등에 밀루아 출입국 관리청의 문양이 떠올랐다.
“통과하세요, 미스 달튼.”
얌전히 비켜서서 짐과 브리아나가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내 다음으로 심사관을 마주한 브리는 과도하게 들떠 보였다. 아주 광대뼈까지 볼살을 밀어 올리고는 분주한 설치류처럼 움직였던 것이다.
심사관은 브리아나의 입국 허가서와 그녀를 자꾸 번갈아 보았다. 그가 브리를 손짓해 불렀다. 손바닥만 한 구멍이 뚫린 유리를 사이에 두고 눈싸움이 한참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살짝 불안해졌다. 브리아나는 방학 일정이 정해진 이후로 도서관에 있는 밀루아 관련 책을 죄다 읽었다. 만일 어떤 이유로 밀루아 입국이 거부된다면 그녀가 느낄 좌절감은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위로의 말을 서른 가지쯤 생각했을 때 브리아나는 곱게 포갠 손으로 가슴을 꾹 누르며 내게로 뛰어왔다.
“뭐가 문제였어?”
“그, 내, 초상화는, 전부… 오리아나 한츠가 그렸거든….”
오리아나 한츠는 피니건 거리에서 가장 비싸고 또 인기 있는 화공이었다. 마법 잉크로 그리는 초상화는 실물 왜곡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신묘한 능력이 있었다.
나는 딱 한 번 한츠에게 월시의 초상화를 의뢰한 적이 있었는데(나의 사촌 조디가 편지에 그녀의 남친 초상화를 동봉한 탓이었다.), 결과물을 받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만일 그 초상화 속 남자가 정말로 애덤 월시였다면 나는 걔와 헤어지지 않았을 거였다.
“입국 허가서에 그런 걸 제출하면 어떡해?”
“몰랐지이….”
브리아나-헛똑똑이-모슬리가 민망한 듯 몸을 배배 꼬았다. 그러자 내국인 줄에 서서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심사를 마친 카일이 가방 여러 개를 겨드랑이에 끼고 냅다 끼어들었다.
“왜 그렇게 오래 걸린 거야?”
“깜짝이야! 너 언제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