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맙소사, 저거 블로썸한테 진짜 딱이다.”
브리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내가 다가온 것을 알았음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쬐끔 서운했지만 그래도 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였다. 이어서 켈리 라미레즈가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비싼 불사조 수정으로 귀걸이를 만들었네. 우리 왕자님이 또 국고를 터는구나.”
갑판의 중앙에 내 키만 한 높이로 상자가 쌓여 있었다. 생일을 맞은 소녀를 위한 선물들이었다. 블로썸은 픽시의 날갯짓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그것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이를 고르게 드러내는 미소와 사르르 휘어지는 눈꼬리가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귓불에는 투박하게 커팅된 보석이 매달려 있었는데, 안에서 보랏빛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켈리의 말마따나 브라이스 나돈이 선물한 것이었다.
그의 형제가 국고를 털었기 때문인지, 에드가 라모스의 선물은 별로 굉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미색의 장갑은 블로썸에게 정말 잘 어울렸다.
일레스티아의 성기사는 반짝거리는 핀 세트를 선물했다. 블로썸의 잘게 땋인 머리에 군데군데 꽂으니 낮에 보이는 은하수 같았다. 의복 센스가 좋은 볼턴다운 선택이었다.
제이든에게는 그런 센스가 없었다. 그는 사실 나에게 자문을 구해 선물을 준비했다. 상대가 블로썸인 걸 알았다면 그렇게 열심히 고민하진 않았을 거였다.
아무튼 그녀는 내가 고르고 제이든이 선물한 마도구가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그건 반지였는데, 손가락에 끼우고 돌릴 때마다 형태가 바뀌곤 했다.
푸른 실크 리본으로 감싸인 상자가 열릴 때에는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켈란의 선물이었다. 다른 모든 장신구의 빛을 잃게 할 만큼 화려한 목걸이가 섬세한 손가락에 걸렸다.
켈란은 그걸 손수 블로썸의 목에 걸어 주었다. 명화처럼 아름다운 남녀는 아주 행복해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서 억지로 눈을 돌려 딴 데를 봤다. 달이 밝구나. 별은 빛나고.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백파이프와 피아노가 각각 주선율과 대선율을 연주하는 가벼운 분위기의 춤곡이었다. 선물 수여식 이후로 자취를 감춘 켈란을 대신하여 나돈과 볼턴이 블로썸을 에스코트했다.
두 사람의 팔짱을 낀 블로썸이 선물 더미 주위를 뱅글뱅글 돌면서 스텝을 밟았다. 누가 봐도 주인공의 모습이어서, 순식간에 자신감이 0이 되었다. 아무래도 별것도 아닌 갈색 머리 여자애로서는 넘봐선 안 될 자리가 맞지 않나 싶었다.
“아리엘, 너 펀치에 독이라도 탄 거야?”
내가 울적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엘리자베스 맥카시가 남친을 등에 지고 나타났다. 브레넌의 안색은 흙에서 막 캐낸 고구마 같았다.
“내 건 아직 여기 있는데, 카일이 성공했나 보다. 혹시 죽었어?”
“불행히도 살아 있어. 아까 제대로 게웠거든.”
리즈의 턱이 가리키는 난간에 반쯤 구울이 된 애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역시 드워프 술은 오버였나? 속으로 혀를 차며 험프리스 교수와 휴스턴 교수의 눈치를 살폈다. 험프리스 교수는 난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학생들을 빨래 걷듯이 걷어 올리는 중이었다. 휴스턴 교수는, 그는, 저기서….
가까워지고 있는데?
“젠장, 망했다! 나중에 봐! 브레넌한테 위장약 꼭 먹이고!”
실행범이 카일이래도 당장 손아귀에 술병을 쥐고 있는 내가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나는 선실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좁은 복도와 어두운 모퉁이는 장난꾸러기의 좋은 피난처가 되어 줄 것이었다.
“달튼! 거기 서라!”
휴스턴 교수의 손에서 쏘아진 석화 주문은 벽에 몇 번 튕겨 그에게 돌아갔다. 쌤통이다! 크게 웃어 주고 나서 복도를 내달렸다. 나돈 왕자의 자존심이 마력선의 규모를 터무니없이 키워 놓은 터라, 적당히 돌다 보면 헤매지 않을까 싶었다.
“아리엘 선배, 포기하시죠.”
물론 휴스턴 교수가 말이다. 내가 아니라!
“네가 야망이 있는 타입인 줄은 몰랐는데, 켄드라.”
내 지력이 3만 되었어도 지나온 길과 아닌 길을 구별할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2였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 켄드라 브래들리와 대치하게 되었다. 켄드라는 휴스턴 교수를 도와 나를 쫓던 4학년 애들 중 하나였다.
“제가 봉사 점수에 왜 목을 맸겠어요.”
휴스턴 교수는 4학년 징계 담당으로 모든 4학년 학생의 상벌 사항을 관리했다. 또 그것을 기준으로 차기 학생회장 후보 추천 명단을 꾸릴 수 있었다. 켈란 일레스티아는 휴스턴 교수로부터 역대 가장 상점이 많고 벌점이 적은 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은 뒤 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아마도 켄드라 브래들리가 원하는 게 그거인가 보았다. 브래들리 공작 부부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로 켄드라는 후견인인 윌킨슨 후작과 줄곧 대립하는 중이었다. 확실히, 성년을 앞둔 그녀에게 피츠시몬스 학생회장은 가주로서 입지를 굳히기에 나쁘지 않은 지위일 거였다.
“오세요, 선배. 제가 최대한 봐 드릴게요.”
켄드라가 까닥이는 손가락의 일부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석화 주문의 후유증인 듯했다. 굳은 모양새가 절묘하게 욕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너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지?”
“에이, 설마요. 하늘 같은 선배님께.”
말과 달리 하나도 공손하지 않은 태도였다. 대충 웃다가 바로 달아났다. 켄드라는 나보다 날렵한 데다 다리도 길어서, 따돌리기 위해서는 정말 열심히 뛰어야 했다.
이윽고 양쪽으로 문이 늘어선 복도가 나타났다. 갈림길도 없고 곧아서 켄드라에게 따라잡히기에는 완벽한 장소였다. 나는 2학년 애들처럼 돛을 장식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손에 닿는 아무 문고리나 잡아 돌렸다.
“살려 주세요! 오우거가 쫓아오고 있어요!”
그러자 나의 간절한 호소에 응답이라도 하듯 두꺼운 철문이 바닥을 스치며 열렸다. 다음 순간 군청색 공단 옷감에 감싸인 팔이 허리를 휘감아 당겼다. ‘오우거라니, 너무하시네요!’ 분노한 켄드라의 외침이 닫히는 문틈으로 서서히 멀어졌다.
싱그러운 향이 훅 끼쳐 왔다. 나무가 빽빽하게 자란 숲을 거닐 때나 맡을 법한. 유칼립투스 잎으로 기름을 내서 손목에 바르지 않아도 이런 체향을 풍기는 사람을 나는 딱 하나 알고 있었다.
“켈란?”
“오우거가 아직 복도에 있어.”
웃음을 가까스로 눌러 가둔 속삭임이었다. 말마따나 씩씩대며 나를 찾는 켄드라 브래들리는 여전히 가까운 곳을 배회하고 있었다.
“순순히 잡히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시게 될 거예요!”
삼류 악당이 칠 법한 대사로부터 조금 기다리니 켄드라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도대체 무슨 장난을 쳤길래 밖이 난리야?”
켈란은 그제야 나를 놔 주었다. 내 허리춤에서 떨어지는 그의 손에 웬 서류가 쥐여 있었다. 블로썸의 생일 연회를 뒤로 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는 걸까. 거기서부터 시선이 올라갔다. 나는 갑판에서와는 달리 다소 풀어헤쳐진 공단 셔츠의 옷깃을 멍하니 보다가 켈란의 질문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어… 뭐?”
“넌 나랑 친해지긴 싫으면서 내 몸은 좋아하는 거야?”
“허, 참,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켈란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서 더 민망했다. 나는 켈란과 친해지기 싫은 게 아니라 그와 친해지는 모습을 블로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 또 그의 몸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얼굴을 더 좋아했다. 켈란의 말은 반이 맞고 반이 틀렸는데 구구절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괜히 더위가 느껴지기에 무심코 손에 든 것을 들이켰다. 묽고 약간 톡 쏘는 감자 포타주는 내가 지금까지 마신 다양한 감자 포타주 중 목 넘김이 나쁘지 않은 편에 속했다.
브리아나 모슬리의 발모약은, 그녀가 마법약 과제로 제출했던 무엇이든 감자 포타주 맛이 나도록 하는 약을 변형한 거였다. 그래서 나는 털투성이가 된 것 외에도 간신히 탈출했다고 생각했던 감자 지옥에 다시 떨어지는 부작용을 겪었다.
턱은 금방 돌아왔지만 혀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내 삶의 목적 중 하나인 식도락을 온전히 추구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아마도 켈란을 위해 마련된 널찍한 선실에는 침대로 써도 될 만큼 커다란 소파가 있었다. 어찌나 푹신한지 앉으면 엉덩이가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되었다. 나는 소파에 폭 파묻힌 채 켈란과 수다를 떨었다. 최근에 피츠시몬스 학생들끼리 만나면 대개 그러하듯 시험과 방학이 화제였다.
켈란은 시험에 대해서는 별로 떠들 게 없어 보였다. 하기는 그가 약초학 4번 문제의 답이 뭐냐고 묻는다면 놀라울 것이었다.
방학에 대해서는, 아니었다. 켈란은 블로썸이 그의 어머니에 의해 황성에 초대를 받았으므로, 아무래도 방학을 같이 보낼 것 같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불현듯 아까 봤던 광경이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흰 목덜미를 미끄러지는 손가락, 찬란하게 빛나는 목걸이, 흠잡을 데 없는 미소… 로맨스 소설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갑자기 모든 것이 되게 부질없게 느껴졌다. 나는 적당히 사교적인 대꾸를 쥐어짜 냈다. 그리고 적당히 사교적인 작별 인사를 건네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근데 하늘이 핑 돌았다.
“아리엘?”
맞은편 소파에 앉은 켈란의 몸이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기울어진 건 켈란이 아니라 나였다. 발밑의 땅이 훅 꺼짐과 동시에 시야가 돌아갔다. 머릿속은 완전히 뒤죽박죽이었다. 조그마한 생물체가 뇌를 쥐고 마구 흔들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오래전에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나와 카일과 블로썸이 각자의 실패를 맛본 졸업 연회에서 말이다. 그보다 전에는 평생의 숙적 마베릭 빌라드가 포도 주스라고 속이고 내 잔에 와인을 따랐을 때 그랬다.
말하자면, 나는, 취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묽고 약간 톡 쏘는 감자 포타주의 정체는 브레넌을 흙에 심긴 꼴로 만든 드워프제 고도주였다.
힘이 쭉 빠지는 바람에 뭘 쥐고 있기가 어려웠다. 술병이 소파의 완만한 굴곡을 데굴데굴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기서 새어 나온 액체가 카펫을 적셨다. 독한 냄새가 코를 찌르자 켈란은 드디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