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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달튼은 졸업이 하고 싶어서-63화 (63/178)

63화

“내가 헤어지자고 말하긴 했지만, 흐윽, 그렇게 덥석 받는 건, 킁, 너무하잖아!”

브리가 와락 안겨 왔다. 나는 얼떨결에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치료술 시험 전에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넋이 나가 있길래 수상스럽게 여기긴 했다. 근데 그게 월시 때문인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아나이스와의 ‘약속’이 있을지언정, 나는 브리가 월시를 아예 끊어 내리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다투었답시고 울적해하면 까짓것 수염 다시 길러서 웃길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데. 왜냐면 가짜 예언자 행세 없이는 둘을 갈라놓을 방법이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아무래도 아나이스가 브리아나에게 끼친 영향은 내 생각보다 큰 모양이었다. ‘네가 나서서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세상에 많아.’ 머릿속에 카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브리아나가 보여 준 뜻밖의 행동력으로 인하여 시험 끝 기념 모임은 난데없이 월시 여친 탈출 기념 모임으로 탈바꿈했다. 우리는 작은 커피 하우스를 털어먹을 기세로 쿠키와 케이크를 주문했다. 그리고 방학 동안의 일정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엘리자베스 맥카시는 우리 중 가장 바쁘고 보람찬 방학을 보낼 사람이었다. 그녀는 지난 2주 내내 정치학 교재나 고대 마법과 신화 교재 대신에 <광산 개발! 이것만은 알고 하세요>를 펼쳤고 당연한 수순으로 시험을 죽 쑤었다. ‘성적표를 받으면 바로 태워 버릴 거야.’ 리즈가 온화하게 말했다.

켈리 라미레즈는 헤만 사막의 불타는 협곡에서 휴가를 즐길 예정이었다. 나 같으면 ‘불타는’ 장소를 피서지로 택하진 않겠다 싶었는데, 설명을 듣고 나니 환상적인 곳 같았다. 낮에 더운 건 맞지만, 밤이 되면 입김이 나올 정도로 싸늘하다나.

“운이 아주 좋다면 오로라를 볼 수도 있대.”

켈리가 우쭐거렸다. 나는 깎아지른 절벽 위로 일렁이는 오로라를 상상하고 나서 그곳이 불타는 협곡이라 불리는 까닭을 이해했다.

두 달여간의 방학 동안 달튼 부부가 밀루아에 있는 시간은 반의 반도 되지 않았다. 나는 아마 방학의 대부분을 빌라드 저택에서 보낼 것이었다. 카일이 나에게 저지른 개짓거리를 사과한다면 말이다.

그러지 않는 경우 나는 얼마든지 지루한 방학을 경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사실 그리 지루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제이든도 놀러 오겠다고 했고, 또, 결코 질리지 않는 매력의 소유묘 릴루가 있었으니까.

문득 브리아나 모슬리가 지나치게 조용해졌다고 느꼈다. 따지고 보면 피츠시몬스에서 보내는 그녀의 방학이 내 방학이나 다른 누구의 방학보다 지루할 것임은 불 보듯 뻔했다.

플로렌스 벨의 세계에서, ‘애덤 윌리’의 엉덩이를 칠하던 룸메이트의 뺨은 분홍색 크레용만큼이나 발그레했다. 나는 손톱만 한 딸기를 열댓 번에 걸쳐서 깨작거리던 브리아나에게 밀루아 여행을 제안했다.

브리는 안 내키는 척 입술을 비죽이다가 이내 눈물을 쏟았다. 실연을 고백할 때보다 훨씬 커다란 울음이었다.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

나는 여행 가방 두 개에 봄옷과 여름옷을 남김없이 쑤셔 박는 작업을 열 번째 하는 중이었지만 여전히 어려움을 느꼈다. 또 드레스들은 죄다 부피가 컸고, 몇 벌은 등나무 뼈대까지 매달고 있어서 도대체 무슨 수로 접어 넣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전에는 어떻게 했더라.

겨우 매끈해진 턱을 쓰다듬으며 기억을 더듬는 동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나는 문고리를 비틀어 여는 마법진을 간단하게 그렸다. 브리아나가 사육장의 날다람쥐들을 괴롭혀 가며 오매불망 기다리던 밀루아 입국 허가서가 드디어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리엘.”

구둣발이 부드러운 카펫을 밟는 소리가 두어 번 나고 내 이름이 불렸다. 룸메이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손에 쥔 튜닉을 가방 안으로 집어 던졌다. 엉망진창으로 구겨졌다.

“죄송하지만 미스터 빌라드, 보시다시피 제가 지금 짐을 싸느라 바빠서요. 다음에 이야기 나눌 수 없을까요?”

카일은 대충 주문을 외워 내 봄옷을 갈색 여행 가방에, 여름옷을 황색 여행 가방에 차곡차곡 포개 넣었다. 뚜껑이 야속하게 닫혔다. 성질머리 같아선 죄 뒤집어엎고 싶었지만 도무지 다시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말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카일을 노려봤다.

“생각해 봤는데… 괜찮은 것 같아서, 네 ‘계획’.”

“뭐?”

“로즈마리 블로썸의 자리를 대체한다는 거 말이야. 주인공을 위협하는 것 이상으로 시스템에 타격을 줄 만한 방법은 없을 거고, 게다가….”

“그 전에 할 말이 있을 텐데?”

우리는 장난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 성격이 맞는 게 아니어서 빈번하게 투닥거리곤 했다. 대개는 쭈뼛거리는 쪽이 나였고 팔짱을 낀 게 카일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그는 내게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이 익숙지 않은 듯 보였다.

어쩌면 그가 저지른 게 어지간한 개짓거리가 아니어서일 수도 있었다. 나는 월시와 3년을 사귀었으나 친구 포옹이 아닌 연인 포옹(등을 더듬는 포옹을 말한다.)을 겨우 마쳤을 뿐이었다. 첫 키스에 대한 일반적인 환상이 있어서 그랬다. 당연하지만 강제로 당하는 키스는 환상이 될 수 없었다.

“…미안해.”

“그리고?”

“내가 잘못했어.”

“그래서?”

“다시는 안 그럴게. 다시는 네 의사를 무시하고 행동하지 않을게. 감히… 내 감정을 앞세우지 않을게.”

카일의 표정이 참담했다. 그는 울고 싶어 보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울었다간 내가 지랄을 할 것을 알아서인지 꾹 참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 미워하지 말아 줘.”

별안간 내가 뭐라고 얘가 이렇게 매달리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아빠랑 눈이 마주쳤을 때 웃음이 나와서 그게 사랑인 줄 알았다고 했다. 스펜서 공작의 사랑은 ‘햄의 노래’였다. 브리는 밤새워 그녀가 듣지도 않는 과목을 공부했다. 리즈는 스스로의 미래를 노름의 판돈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알고 싶지 않을 만큼 기나긴 시간 동안 운명에 맞서지는 않았다. 숨이 턱 막혀 왔다.

“그 ‘계획’은 됐어. 따지고 보니까 나도 별로 내키지가 않아서.”

눈을 내리깐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블로썸을 대체한다는 건, 조력자 역할을 맡은 카일에게 너무한 처사임은 차치하고, 내가 공략 대상의 운명에 개입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블로썸이 하듯이 그들의 감정을 조종하고 싶지 않았다.

“글쎄, 일시적인 매혹 주문에 놀아나는 대가가 자유라면 고맙게 여길 거 같은데, 나라면 말이야.”

카일의 설득에도 여전히 확신은 들지 않았다. 애초 나로서도 누군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그게 내가 정말로 사랑스러워서인지, 아니면 그의 스위치를 켰기 때문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연애는 사양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어떤 숭고한 목적이 있다고 한들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없기는 했다. 나는 깊은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8월까지만 고민해 보자고. 어차피 방학 중에 그리 대단한 ‘이벤트’는 없거든.”

끝내 긍정적인 반응을 받아 낸 뒤에 카일은 한결 밝아졌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괜찮은 거지? 너랑 나.”

“그래.”

우리는 어른스럽게 악수를 나누었다. 근데 그러고 나니까 갑자기 모든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맞잡은 손이 떨어지자마자 카일을 밀쳐 내고 문을 닫았다.

그러자 그의 등에 가려져 있던 숄이 시야에 굴러들어 왔다. 갈색 여행 가방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오는 드레스를 신경질적으로 내리눌렀다. 어쩐지 코가 시큰거렸다.

***

카일 빌라드는 내일 아카데미가 멸망하더라도 한 번의 장난을 더 칠 임프의 화신이었다. 그리고, 무엇을 숨기리, 나도 그와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내일은 아카데미 최후의 날은 아니었지만 5학년 1학기 최후의 날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의 장난을 더 치기로 합의를 봤다.

공교롭게도, 로즈마리 블로썸의 생일이 오늘이었다. 그녀는 피츠시몬스에서 생일에 연회를 여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아리엘 달튼과 카일 빌라드는 연회에 깽판을 놓을 수 있는 유이한 학생이었다. 달튼 상단은 올해도 무알콜 펀치에 탈 드워프제 고도주를 들여왔다.

브라이스 나돈은 역시나 거대한 마력선을 빌렸다. 어쩐지 내 기억보다 웅장한 듯해서 카일에게 슬쩍 물어봤다. 그랬더니 아무래도 브레넌의 청혼용 마력선에 영향을 받은 거 같다고 했다. 하긴 왕자가 빌린 마력선하고 남작가 영식이 빌린 마력선이 거기서 거기면 안 되지.

시기가 완벽히 맞아 떨어졌으므로, 아카데미장인 마담 바틀렛은 강당의 연단 대신 마력선의 갑판에서 학기를 마무리하는 연설을 했다.

나는 그녀가 ‘방학이라고 풀어지지 말고 피츠시몬스 학생다운 품위를 유지하라’고 말하는 동안 술병을 땄다. 코르크 마개가 날아가는 경쾌한 소리를 카일이 부자연스러우리만큼 시끄러운 재채기로 감쌌다.

일반적인 연회라면 곳곳에 펀치가 담긴 유리 보울이 있었겠지만, 돈 쓰는 게 미덕인 나돈의 막내 왕자는 절대 구질구질한 방식으로 손님을 대접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마력선의 주 갑판에 사과와 파인애플과 멜론이 흘러넘치는 펀치 폭포를 마련했는데, 나로서 이건 호재였다. 습격할 곳이 한 군데로 줄어든 까닭이었다.

내가 아는 걸 휴스턴 교수와 험프리스 교수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펀치 폭포의 근방에서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특히 휴스턴 교수는 무슨 주문에 잘못 걸려서 박제된 사람 같았다. 적어도 마법으로 그의 구두를 춤추게 하려던 2학년 애들을 돛에 붙이기 전까지는 확실히 그랬다.

“너네 쉽지 않겠는데?”

브레넌이 막대에 함께 꽂힌 올리브와 치즈 중에서 치즈만을 야금야금 베어 먹고는 웅얼대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비위가 상한 듯이 그에게서 조금 물러섰다. 그녀가 내게 귓속말했다.

“혹시 편식 습관도 유전되니?”

“자기야, 다 들려.”

마지못해 올리브를 씹어 삼키는 브레넌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는 느릿하게 걸어 위기의 연인에게서 벗어났다. 나의 룸메이트와 노닥거리던 켈리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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