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브리는 안 그래도 내가 아나이스를 돕겠노라며 새벽마다 아카데미를 배회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근데 그러다가 옆구리에 구멍이 뚫려서 돌아왔으니, 또 켈란 일레스티아를 노린 암살자의 소행이라고 하니 그만 피가 거꾸로 솟은 모양이었다. 확실히 켈란을 향한 공격이라면 오브라이언 공작가와 관련이 없기는 힘들었다.
“걔가 날 많이 좋아해.”
나는 어색하게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직 까슬거리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아나이스의 땜빵에 내가 기여한 몫이 없지는 않아서 발모약의 임상 시험 대상을 자처했다. 나선 안 되는 곳에서 털이 날 줄 알았더라면 안 그랬을 거였다. 하여튼 책임감 있어서 탈이지, 아리엘 달튼.
“나도 널 좋아해.”
“요새 고백을 자주 받네.”
뻔뻔하게 굴자 아나이스가 또 웃었다. 이번엔 아까처럼 입매만 움직이는 웃음이 아닌 목을 울리는 웃음이었다. 무슨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나서, 예쁜 애는 웃는 것도 예쁘게 웃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음성 기록 및 재생용 마도구를 통해 내 목소리와 웃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데, 던전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나는, 친구가 거의 없어서… 그렇게 싸워 본 게 처음이야. 재키는, 재키랑은 옛날부터 친구였지만, 걔는 절대 화를 내지 않거든.”
땜빵을 가리기 위해 두른 보닛의 레이스 리본을 엄지와 검지로 매만지며, 아나이스가 말했다. 내가 봤을 때 그걸 계속 만져서 풀어 버리면 재클린 포크너는 화를 낼 거 같았다. 걔는 아나이스의 머리카락에 아나이스 본인보다 진심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재밌었어.”
“재밌었다고?”
“응. 누가 내 머리에 포도주를 들이부은 적은 있지만, 내 머리를 쥐어뜯은 적은 없어서.”
포도주라. 그건 연회에서 누군가에게 수치를 안기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들 중 하나였다. 최대한 실수처럼 보이면서도 진짜 실수라고 착각할 만한 여지는 남기지 않아야 해서, 고도의 감정 연기가 필요한 고도의 기술이라 할 수 있었다. 새삼 오브라이언의 장미가 일레스티아 사교계의 정점에 서기까지 어떤 여정을 거쳤는지가 짐작되었다. 친구가 없는 이유도 말이다. 지고의 자리는 외로운 법이었으니까.
“베개 싸움도 즐거웠어. 레이디 에드워즈가 금지하지만 않았어도 매번 했을 텐데.”
“그거 리즈가 레이디 에드워즈한테 베개 던져서 그런 거잖아. 난 걔 미친 줄 알았어! 진짜 웃겼는데.”
“밤새면서 남자 얘기 한 것도 처음이야.”
“5학년 남자애들이랑 한 번씩은 다 결혼해 봤었지.”
“돌고 돌아 최고의 신랑감으로 뽑힌 보웬 로드리고를 잊을 수 없을 거야.”
걔는 나돈 동부에 작은 영지를 지닌 백작가의 삼남이었는데, 대대로 땅놀이를 하는 집안이라 영지의 크기에 비해 곳간이 컸다. 또 본인의 야망도 능력도 평균을 약간 웃도는 데다가 담은 작아서 구워삶기 딱일 듯했는데, 무엇보다 그가 점수를 딴 부분은 따로 있었다. 엘리자베스 맥카시의 남친이자 로드리고의 룸메이트인 브레넌 스톡스는 속옷을 갈아입는 로드리고의 다리 사이에 크리켓 배트가 달려 있었다고 묘사했다.
“‘배트맨’ 말이지.”
그날 이후로 우리 사이에서 보웬 로드리고는 ‘배트맨’이었다. 아나이스가 참지 못하고 깔깔거렸다.
“꼭 돌아올게. 지금껏 여기만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 없었거든. 내가 신학 수업에서 D+를 받거나, 다 늙은 아저씨랑 사귀었어도 말이야.”
“넌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아름다운 머저리야.”
“아름답고 우아한 머저리라고 해 줘.”
아나이스와 나는 산책로를 빠르게 돌아 정문으로 갔다. 리즈가 메건 클리블랜드의 팔짱을 낀 채 손을 흔들었다. 포크너랑 브리아나가 어깨로 서로를 밀치는 뒤로는 레이디 오브라이언의 추종자 무리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어느새 발 없는 말이 천 마일을 간 모양이었다.
“2학기엔 더 재밌게 놀자!”
일레스티아 서부로 향하는 공간이동 마법진에 오르기 전에, 아나이스가 문득 외쳤다. 그녀가 트림을 해도 환호할 추종자 무리는 아주 난리가 났다. 나는 어떻게 귀를 막는 동시에 인사를 건넬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때를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사라진 아나이스 대신 남은 빛무리를 허망하게 바라보는 내게, 브리아나-똑똑이-모슬리가 새침데기처럼 핀잔을 던졌다.
“어차피 다시 볼 건데 뭐가 아쉽니?”
***
나의 거푸집 자매가 떠났다. 내가 아는 한 피츠시몬스에서 함께 어울릴 만한 거푸집 자매는 아나이스뿐이었는데, 그녀를 보내자니 마음이 여간 싱숭생숭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시험에 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건 핑계였고 그냥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 그랬다. 6년째 같은 수업을 듣는 게 아니었다면 나도 아나이스와 포크너와 같은 유급 열차를 탔을 것이었다.
나로 하여금 시험 전날을 뜬눈으로 지새게 했던 마과학은, 오히려 괜찮았다. 나는 바르가스의 법칙을 완벽하게 서술했다. 시험지에 그려진 바르가스 박사의 초상화는 나를 발견하자 침을 뱉는 시늉을 했지만, 채점은 그가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족집게 강사 제이든 스펜서의 공이 참으로 컸다. 나는 매우 감격한 나머지 ‘아리엘 달튼 1일 자유 이용권’을 그려 제이든에게 선물했다.
“호위로 써도 되고, 종으로 부려도 좋아. 참고로 카일 빌라드는 이동수단으로 사용했었어. 내가 걔를 종일 업고 다녔다는 뜻이지.”
그렇게 말했더니 제이든이 지었던 떨떠름한 표정이 기억에 남았다.
검술은 A부터 F까지가 아니라 P와 NP로 등급을 나누어 비교적 널널한 수업이었다. 그리고 나는 학기 내내 일레스티아의 성기사와 밀루아의 용기사에게 단련된 몸이었다. 제비뽑기를 통해 선정된 3학년 남자애를 무릎 꿇리는 것쯤은 식은 수프 마시기였다.
마물학도 문제없었다. 식견은 넓으나 흥미 범주는 지독하게 좁은 모나한 교수가 내는 문제는 거기서 거기였다. 나는 5년 동안 5학년으로 살면서 시험지 위의 모든 문제들과 구면이 되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깃펜을 놀렸다.
최고의 마법 정원 대회를 앞둔 스태포드 교수는 그녀의 온실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어서 시험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시험을 치는 교실에조차 그녀 대신 삼두견을 들여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태포드 교수 본인보다 도살자와 척추 분쇄기 그리고 핏빛 어금니가 더욱 효율적으로 학생들을 감독하는 듯했다(켈리는 그녀의 사악한 작명에 대한 보상으로 이빨이 달린 염소 모양의 식물을 받았다. 당초의 계획대로 그것은 여학생 살롱이 열리는 장소-나와 브리의 방-에 놓였다. 여학생 살롱 멤버들끼리는 모든 고난과 영광을 함께해야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보조 마법 실습이었다. 실습실에 모인 학생들은 복잡하게 꼬인 매듭을 푸는 주문을 사용하여 청소 도구함에서 실습 파트너를 구출해 내야 했다. 하필이면 내 파트너는 수업에 거의 참여하지 않은 노먼 케이시여서, 나는 케이시가 버벅거리는 동안 내 폐를 철저히 망가뜨리고도 남을 먼지를 집어삼켰다.
케이시라고 해서 상황이 다르지는 않았다. 5년간 보조 마법 실습 시험에 등장한 적 없는 주문이 바로 매듭을 푸는 주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충분히 연습하지 않았다.
또 나처럼 마나 부족에 허덕이는 학생들에게는 마법진의 정확성이 매우 중요했다. 근데 하필이면 마법진을 그릴 내 검지는 염소 식물에게 물려 너덜거리는 중이었다.
끝끝내 케이시를 청소 도구함에서 구해 냈을 때, 그는 대걸레와 격렬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케이시를 제외한 모두가 즐거워했다-심지어 커닝엄 교수마저 말이다! 경직된 시험 분위기가 나로 인해 풀어졌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길 바라며, 나는 친구들이 기다리는 피니건 거리로 달려갔다.
“그래도 끝나니까 후련하다.”
“으, 나는 찝찝해서 죽을 거 같아. 아리엘, 약초학 4번 문제 답이 뭐였어?”
리즈의 말에 켈리가 스푼으로 음료를 휘저으며 투덜거렸다. 음료를 내온 직원은 아무래도 이 까무잡잡한 나돈 미녀에게 관심이 있는 듯했는데, 그의 마음이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하트 모양 거품이 무심한 손동작에 바스라졌다.
“뭐? 고대 원예 도구에 사슴뿔이 쓰였던 이유?”
나는 켈리에게 그것을 일깨워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음료에 하트를 그리는 짓을 아무리 해도 지금의 그녀에게 어떤 인상을 남기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까무잡잡한 나돈 미녀 켈리 라미레즈는 음악만큼이나 자신의 영적 멘토인 폴라 이모에게 심취해 있었다. 폴라 이모는 나돈에서 약간 알려진 점성술사로, 그녀에 따르면 켈리에게는 아직 케이시의 뒤를 이을 남친이 생길 때가 되지 않았다.
“하나, 떨어졌다가 자랐다가 하는 사슴뿔이 갱생과 회복을 상징해서. 둘, 마법 세계와 흙을 이어 주는 매개체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내가 이건 확실히 외웠지.”
“에이, 아쉽다.”
“뭐라고 썼길래?”
“싸서, 그리고 예뻐서.”
“요만큼도 안 아쉽네.”
어처구니가 없어서 코로 웃자 켈리는 한참을 낄낄거리더니 엘리자베스의 음료를 은근슬쩍 마셨다. ‘야!’ 리즈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브레넌이랑도 컵 같이 안 쓴단 말이야!”
그녀가 냅킨으로 컵의 입구를 부지런히 닦으며 켈리를 흘겨보았다.
“그나저나, 브리아나는 언제 오는 거야?”
“치료술이 마지막 시험이니까 올 때가 됐는데….”
귀족은 못 되는 브리아나 모슬리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습을 보였다. 치료술을 가르치는 채프먼 교수는 실전에 약한 만큼 이론에 빠삭하였으므로 끔찍한 난이도의 문제를 제출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우리의 똑똑이를 절망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브리, 왜 그래?”
당황하여 브리아나의 손을 붙잡자 훌쩍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리즈는 혼란을 틈타 그녀의 음료를 노리는 켈리의 팔뚝을 찰싹 때리고 나서 브리아나를 달래 앉혔다.
“시험 문제가 너무 어려웠어?”
브리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슬픈 와중에도 아닌 건 아닌 모양이었다. 켈리가 숨을 헙 삼키며 입을 틀어막았다.
“채프먼 교수님이 연구실에 원서 넣으래?”
브리는 이번에도 도리질을 쳤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월시랑 무슨 일이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