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나는 되다 만 포옹보다 ‘미안’이라고 말한 부분에서 카일의 기분이 상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친구였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과도하게 의식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속으로 삼십까지 셀 동안 카일은 고민에 빠졌거나 우울해 보였다. 나는 보다 중요한 화제를 꺼내 환기를 시도했다.
“그래서 어떻게 일으키는데? 마나 범람 말이야.”
대꾸하기 전에 카일은 능숙하게 눈동자와 혀끝에서 불필요한 감정들을 지워 내었다.
“머리를 굴려 봐야지.”
그가 짧게 말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나도 그렇게 했다. 곧 뇌리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쳤다.
“있잖아, 카일. 만약에 내가 아예 블로썸을 대체한다면? 정말로 걔를 방해해 버린다면?”
그건 얼핏 완벽한 계획이었다. 시스템은 이미 나를 블로썸으로 착각한 바가 있으니, 거기를 파고 들어가는 건 비교적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더구나 블로썸은 이미 내가 그녀를 방해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캔트렐 때처럼, 나는 억울한 게 지독하게 싫어서 누가 나를 꺼리면 그럴 만한 이유를 만들어 줘야 성에 찼다.
그런데 제대로 듣지도 않고 손사래를 치는 카일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가 않았다. 아니, 밝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되게 열받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이제 다른 관점에서 마티와 닮아졌다. 촌스러운 솜브레로만 쓰면 딱이었다.
“왜? 솔직히 그게 제일 쉬운 방법 아니야? 너는 ‘이벤트’에 대해서도 알고 있고, 또….”
나는 카일이 갑자기 싸늘해진 까닭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계속해서 내 의견을 피력했다. 카일은 처음에는 딴청을 피우다가, 그러고 나서는 무조건 안 된다는 소리만 반복하다가, 나중에는 이를 악물었다. 목소리가 들끓었다.
“너무한 거 아니냐, 너?”
“…어?”
“나라고 그 가능성을 고려해 보지 않았을 거 같아? 잊은 모양인데, 아리엘. 난 너를 사랑해. 지금 당장이라도 네 손을 잡고 싶고,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어서 미칠 거 같아. 네가 도망칠 게 뻔해서 참는 거지.”
‘내 머릿속에 무슨 더러운 생각이 있는지 알게 되면 나랑 친구 못 할걸.’ 나는 카일이 그 말을 하면서 웃기만을 간절히 바랐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평소에 ‘내가 너 사랑하는 거 알잖아’라고 습관처럼 지껄인 뒤 하듯이 ‘농담이야’라고 덧붙이지도 않았다.
그는 단어 하나하나를 뱉을 때마다 나와 가까워졌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하다 보니 등이 물레에 부딪혔다. 그래서 우리는 끝내 한 뼘 정도의 거리만을 두고 마주 섰다.
“근데 네가 다른 자식들하고 연애하는 걸 도우라고? 나더러?”
“야, 카일….”
“정신 차려, 아리엘 미첼 달튼. 나 바보 아냐. 수도자도 아니고.”
카일이 빈정거리며 내 이름을 전부 불렀다. 목구멍을 두드리던 사과의 말이 쏙 들어갔다.
나는 내 풀 네임을 끔찍하게 증오했다. 미들네임이 남자 이름이었기 때문이다(내 이름은 부모님이 자식을 낳으면 붙여 주려고 했던 이름들의 조합이었어서, 만일 내가 남자였다면 내 풀 네임은 미첼 아리엘 달튼이었을 거고 지금과 정확히 반대의 이유로 괴로웠을 것이었다.).
카일도 그걸 알았다. 내가 달튼의 작은 악마이고 그가 빌라드의 울보 도련님이던 시절에는 입에 담을 때마다 냅다 패 버리곤 했으니까, 모르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얘가 나를 ‘아리엘 미첼 달튼’이라고 부른다? 싸우자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신경했던 건 맞았다. 하지만 잘못을 저질렀냐 하면 아니었던 것이다. 애초에 내 감정을 기대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기로 한 것은 카일이었으니까. 불편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그랬으면서. 불쑥 못된 성질이 치밀었다.
“너야말로 잊은 모양인데, 난 이미 너를 거절했어.”
다음 순간 카일은 완전히 돌아 버렸다. 그가 한 손으로 내 허리를 당겼다. 다른 손으로는 뒷목을 감쌌다.
내 발버둥 때문에 카일의 첫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의 부르튼 입술은 내 턱에 떨어졌다. 두 번째 시도에 나는 주먹으로 그를 세게 후려쳤다.
“미친 새끼!”
카일이 손등으로 입가를 찍어 냈다. 입안이 터진 모양이었다. 내 주먹으로 인한 건지 시스템으로 인한 건지 헷갈렸다. 사실 별로 상관도 없었다.
내 손목이나 어깨를 힘없이 붙잡는 카일을 뿌리치고 마녀의 길을 가로질러 달음질쳤다. 온몸에 피가 너무 빠르게 돌아서 심장이 쿵쿵거렸다. 정신은 나가기 직전이었다.
쉬지 않고 뛰어 마물학 교실에 다다른 시점에는 제법 괜찮아졌다. 옆에 앉은 리즈로부터 인사보다 무슨 일 있냐는 소리를 먼저 들었던 걸로 미루어보아 아주 괜찮지는 않은 듯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지극히 냉정하고 침착하게 마물학 교재를 펼쳤다. 변태 성욕자 모나한 교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오늘따라 오만 마물의 짝짓기 습성과 관련된 구절만 눈에 들어왔다.
결코 지성체라 할 수 없는 슬라임마저 짝짓기 시에는 상대의 동의를 구했다. 무릎 꿇고 뭐라도 내밀면서 분위기 잡아도 모자랄 판에 대체 그 무슨 개짓거리란 말인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괘씸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곱씹었을 때 나는 무릎 꿇고 뭐라도 내밀면서 분위기를 잡는 소꿉친구를 상상하고 있었다. 슬라임의 짝짓기를 설명하는 문단은 밑줄을 거듭해서 친 탓에 잉크 범벅이 되어 버렸고 말이다.
***
족보를 따지고 올라가면,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은 켈란 일레스티아의 그리 멀지는 않은 친척이었다. 내게는 지금까지 그걸 실감할 기회가 없었다. ‘지금까지’라고 표현한 것은, 갑자기 생긴 까닭이었다.
아나이스가 휴학계를 냈다. 시험을 정말로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그녀의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으므로 아나이스는 2학기에 복학하여 5학년을 마친대도 유급 처리가 될 것이었다.
파격적인 선택 직전에 있었던 사건이 여간 화제가 되었던 게 아니어서, 온 피츠시몬스가 아나이스와 브리에 대해 떠들었다. 내가 알고 이제는 모두가 아는 토룻처럼 연약한 소녀라면 비명을 지르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놀랍게도, 브리아나 모슬리의 턱주가리에 넓적한 멍을 남긴 아나이스 오브라이언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깃펜을 위협적으로 치켜든 크리스타 에드워즈 앞에서도 제법 당당하게 굴었다.
“숨는 게 아냐. 약속을 지키는 거지.”
얼굴은 창백했고 목소리는 떨렸으나 눈에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약속은 이틀 뒤에 지켜도 되잖아.”
재클린 포크너와 친한 메건 클리블랜드가 투덜거렸다. 그녀는 아나이스의 일방적이고 충동적인 선택으로 포크너까지 졸업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미안해, 메건.”
아나이스가 정중하게 사과했다. 아나이스는 메건 클리블랜드와 전혀 친분이 없었는데도 그녀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녀가 자신의 이복형제인 마누엘-월시의 따까리이자 나와도 악연이 있는 마누엘 클리블랜드가 맞았다-을 끔찍하게 싫어해서, 그와 같은 성씨로 불리길 거부한 탓이었다.
참 사려 깊은 애였다. 나는 아나이스를 알게 된 이후 매일매일 아나이스의 새로운 장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메건 클리블랜드만 아나이스의 선택에 우려를 표한 것은 아니었다. 나도, 리즈도, 켈리도, 심지어는 브리마저 아나이스가 적어도 시험을 본 이후에 아카데미를 떠나길 바랐다. 아나이스는 우리가 그녀를 붙잡을 때마다 뚝심 있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기껏 다잡은 마음이 무너질 것만 같다고 했다.
포크너는 아나이스보다 성적이 아주 약간 좋았다. 유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는 아니었다. 즉 포크너 역시 올해 피츠시몬스를 졸업할 수 없었다. 근데 포크너에게 있어 졸업은 대수가 아니었다. 걔는 어제부터 온종일 통곡하는 중이었다. 아나이스의 머리통에 금화만 한 땜빵이 생겨서 그랬다.
“흑, 아우, 으으… 어엉….”
“재키, 그만 울어. 브리아나가 발모약도 만들어 줬잖아.”
“그걸 어떻게 믿어, 안나…. 쟤한테 수염 난 거 보고도 몰라?!”
포크너가 신경질적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는 포크너의 시야에서 거뭇거뭇한 턱을 차단하기 위해 잽싸게 딴 데를 봤다. 켈리를 제외한 여학생 살롱 멤버들(걔는 시험을 앞두고 부랴부랴 결계술을 연습하다가 자기가 짠 결계에 갇히는 바람에 못 나왔다.)과 메건 클리블랜드는 아나이스와 포크너를 배웅하기 위해 광장을 가로지르는 중이었으므로, 고개를 돌리자 계단에 앉은 애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중에는 에드가도 있었다. 그는 어제 내가 브리아나의 발모약 부작용으로 커닝엄 교수 뺨치는 명품 수염을 가지게 되자, 너무 웃은 나머지 진짜로 토했다. 개자식. 나는 다시금 뒤집어지기 시작한 에드가를 향해 커다란 동작으로 손가락 욕을 날렸다.
“아리엘.”
이틀 내내 솥을 휘젓느라 팔뚝이 단단해진 브리아나 모슬리는 포크너의 냉철한 평가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녀가 포크너가 모시는 아가씨에 이어 포크너와 싸우기 시작한 틈을 타 아나이스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
“물론이지.”
아나이스는 나를 광장과 이어진 산책로로 데려갔다. 가벼운 외출복의 허리춤에서 손바닥만 한 가방이 달랑거렸다.
아나이스의 옷장은 브리아나의 옷장보다 크고 빼곡하게 차 있었으나, 그녀는 오브라이언으로 돌아갈 때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 반드시 금의환향을 하리라는 결의의 표시였다. 만일 아나이스가 이번에도 스스로의 의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방학이 끝났을 때 피츠시몬스 대신 수도원으로 직행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정말 괜찮겠어?”
“아니, 안 괜찮아….”
아나이스의 얼굴이 해쓱했다. 토하기 직전의 에드가보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솔직히 너무 무서워. 선생님이 내 가정 교사가 된 후로 나는 그 사람을 통하지 않고는 부모님께 한마디도 해 본 적이 없거든.”
“하지만 아나이스, 너는 누구를 때려 본 적이 없으면서도 브리아나의 급소를 공격했잖아. 너에겐 격투가로서의 재능이 있어. 달변가로서의 재능도 있을지 모르지.”
내 너스레에 아나이스가 조금 웃었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솟았다.
“있지, 아리엘.”
“응?”
“켈란에게 해명을 들었어. 내 소문을 퍼뜨린 것과 네가 무리하다가 다친 게 자기 탓이래. 브리아나가 화를 낸 이유가 그거잖아….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