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그가 손짓하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그야말로 기함했다. 아나이스가 본격적으로 브리아나를 쥐어뜯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너는!’ 아나이스가 씩씩대며 악을 썼다.
“내가 뭘!”
“왜 월시한테 싫다고 안 해?!”
당황한 브리는 눈을 부릅뜬 채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나이스가 그녀의 약점을 제대로 찌른 것이었다. 나조차 쉽사리 접근하지 않는, 가장 숨기고자 했던 부분을.
“왜 걔 과제를 네가 해? 왜 너와 네 친구들을 기만하도록 두는 거야?!”
“입 닥쳐, 아나이스 디안드라 오브라이언!”
“그렇잖아,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며! 그런데 너는….”
아나이스의 비난이 채 끝나기도 전에 브리의 손바닥이 아나이스의 뺨에 닿았다. 이내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아나이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커크패트릭과 소토를 위시한 구경꾼 무리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미아도 마찬가지였다. 포크너는 기절하듯이 주저앉았다.
“야, 이게 해결되는 거야?”
당장에라도 뛰쳐 들어가려 했지만, 카일이 나를 너무 꼭 붙잡고 있는 통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를 갈며 묻자 카일은 내 정수리에 턱을 대고 장난을 쳤다.
“여유를 가져, 아리엘. 너는 항상 너무 급해서 탈이야.”
그가 말할 때마다 나의 머리는 위아래로 흔들렸다.
브리아나는 아나이스에게 손찌검을 날린 자세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인 모양이었다. 아나이스는, ‘피츠시몬스의 얼음 여왕’답게, 방금까지 엉엉 울던 애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등을 꼿꼿이 편 그녀에게서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느껴졌다. 헝클어진 금발은 뿌리가 갈색이고, 온 얼굴이 눈물로 젖은 상태이며, 심지어는 잠옷 차림인데도 말이다!
일레스티아 사교계의 정점, 오브라이언의 장미는 싸대기 같은 것은 치지 않았다. 그녀는 주먹을 쥐었다. 브리아나의 턱이 새빨개졌다.
그러고 나서는 완전히 개싸움이었다. 흥분한 관중들은 이제 브리아나와 아나이스의 이름에 가락을 붙여 응원하고 있었다. 포크너만이 그 아비규환을 수습해 보겠다고 끼어들었다가 몇 대 맞았을 뿐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켈란 일레스티아가 험프리스 교수를 대동하고 등장했다. 그녀는 비극에 짓눌린 인생을 사는 사람처럼 우울해 보였지만, 쓰레기를 분류하는 주문을 두 번 외워 자리를 정리했다.
“네, 네가 말하기로 약속한다면, 흑, 나도, 히끅, 그렇게 할게….”
험프리스 교수에게 뒷덜미를 쥐여 끌려가기 직전에, 브리가 말했다. 우느라고 발음이 말이 아니었다. 턱이 이따만 해져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볼이 퉁퉁 부어오른 아나이스가 환한 웃음으로 답했다. 항상 장식처럼 두르고 있던 슬픔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내가 만난 어떤 아나이스보다 보기 좋았다.
“어때?”
카일이 그것 보라는 듯 우쭐거렸다. 나는 얘가 이럴 때마다 반박하지 않고는-비록 그가 맞고 내가 틀렸다고 해도-견디지 못하는 병을 앓는 중이었는데, 아나이스의 그늘 없는 미소를 보고 나니 그러고 싶지가 않아졌다.
대충 장단을 맞춰 주자 카일은 잔뜩 신이 났다. 그는 이상한 춤을 추며 노름판 쪽으로 향했다. 허겁지겁 치우는 중이던 커크패트릭과 소토와 잠시 떠들고 나니, 불룩한 주머니가 카일의 손에 들려 왔다.
“내 룸메이트가 내 아이디어로 돈을 벌었으니, 내게도 지분이 있는 거잖아.”
아무래도 커크패트릭과 소토가 내 친구들로 돈을 번 데에는 카일 빌라드가 한 몫을 했나 보았다. 나는 한심하다는 듯이 소꿉친구를 흘기는 한편 잽싸게 그의 주머니를 낚아챘다. 금화가 서로 부딪히는 짤랑짤랑 소리가 경쾌했다.
“험프리스 교수님, 여기 소매치기예요!”
“아시죠, 미스터 빌라드? 서약서의 초안은 제가 제공했다는….”
볼턴와 제이든에게 맞으며 기른 민첩성으로 주머니를 노린 카일의 손길을 피하던 와중이었다. 별안간 시야의 오른쪽 구석이 반짝 빛났다. 카일이 퍼붓는 인신공격과 간지럼 공격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집중하자, 깨알 같은 글자가 두둥실 떠올랐다.
[소지금 : 52골드]
뭐?
***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운명의 물레’ 앞에서 짧은 비상 대책 위원회가 열렸다. 내 손에는 아직도 카일의 금화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거기서 금화를 하나 꺼내 바닥에 던지니 [소지금 : 52골드]는 [소지금 : 51골드]가 되었다.
“줄었어.”
멍하니 중얼거리자 카일은 사색이 되었다.
“말도 안 돼. ‘상태창’은 주인공한테나 보이는 거라고.”
내게 ‘상태창’이 보이는 건 아마도 카일의 지루하게 긴 삶에서 한 번도 없었던 현상인가 보았다. 나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 여기에 대해서도 카일이 답을 쥐고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는데, 그러지 않아서 사뭇 막막해졌다. 한숨을 내쉬며 눈을 굴렸다.
[□력 : □□] [지력 : 2LV] [□□ : 5LV]….
[소지금 : 52골드] 말고도 나의 시야에 날파리처럼 따라붙는 것들이었다. 나는 스태포드 교수가 지그재그로 접힌 잎을 지닌 마법 식물에게 멱살을 쥐였을 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자들은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끈덕지게 매달려 왔다.
“있잖아, 레벨이라는 건 5가 최고인 거야?”
“10인데.”
제기랄! 나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나의 똑똑함을 수치로 환산했을 때 그게 2보다는 높을 거라고 자부해 왔다. 내가 갑자기 주먹을 휘두르자 카일은 흠칫 놀라 들썩거렸다.
“깜짝이야, 왜 그래?”
그가 과장스레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나는 ‘지력’에 ‘잔머리’도 포함되는 건지 묻고 싶었으나 너무 구질구질하기도 하고 카일이 알아챌 것 같아서 대충 대꾸했다. 다행히도 카일은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당장 생각할 거리가 많은 탓이었다.
“블로썸이 내게 힘을 뺏긴 걸까? ‘이벤트’를 뺏긴 것처럼?”
“아니, 그랬다면 걔가 진작에 나를 찾았을 거야. 게다가 네 ‘상태창’은 불완전하다며.”
“응. 일부만 보여.”
“보이는 게 어떤 거야? 공통점이 있어?”
내 지력이 절망적인 수치라는 사실은 무덤까지 가져가 마땅한 비밀이었다. 적어도 돌림노래 전문가인 카일 빌라드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마베릭 다음으로 악한 빌라드였으며 나를 놀리기 위한 십수 가지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 실은 군데군데 잉크를 흘린 것처럼 새까매서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그래서 정색을 하고 둘러댔더니, 카일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거짓말할 때 엄청 티 나는 거 알아?”
나는 관자놀이를 찌르는 시선을 피하며 손끝에 닿는 나무토막을 주웠다. ‘야, 이게 뭘까? 되게 신기하다.’ 무지 바보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들이민 것을 보고 카일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줘 봐.’ 말투가 심각했다. 얼떨떨하게 넘겼더니 그는 구르듯이 뛰어 ‘운명의 물레’ 쪽으로 갔다.
“뭐 해?”
“기다려 봐… 여깄다!”
물레바퀴는 지나치게 거대했고, 느리지만 뱅글뱅글 돌고 있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카일은 물레 주변을 거닐다가 용케도 어떤 바큇살이 끄트머리가 약간 뜯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다. 내게서 받아 간 나무토막을 가져다 대니 딱 맞았다.
“어제 왔을 때는 이런 건 없었어.”
“갑자기 부서졌다고? 그 튼튼한 ‘운명의 물레’가?”
지력이 2인 나라도 그게 우연일 수 없다는 것쯤은 알았다.
“내게 ‘상태창’이 생긴 것과….”
“관련이 있겠지. 잠시만.”
내 말허리를 잘라먹기 위해 카일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나는 입술을 비죽이며 픽시의 날갯짓만 한 소리로 그의 성대모사를 했다. ‘관련이 있겠지, 잠시만? 날카로운 척하기는.’ 그러자 눈치 빠른 카일 빌라드는 심사숙고한 결론을 내놓기 전에 엄숙하게 말했다.
“우선, 아리엘. 넌 성대모사에 재능이 조금도 없어.”
분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는 피츠시몬스의 5학년 중 가장 성대모사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다음으로, 혹시 시스템이 주인공을 헷갈린 건 아닐까?”
“나와 블로썸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 너는 이미 블로썸 대신 ‘이벤트’를 본 적도 있고, 또….”
카일은 약간 껄끄러운 듯이 이어지는 말을 빠르게 뭉갰다.
“공략 대상들의 너에 대한 호감도가 낮지 않아 보였거든.”
“네 말은, 학생회 말이야? 확실히 친해지긴 했지.”
“그게 아니라….”
카일이 커닝엄 교수의 애완 원숭이(이름은 마티였는데, 허구한 날 분노해 있었다. 커닝엄 교수는 마티를 자식처럼 아껴서 이를 드러내고 캑캑거리는 걸 웃는 거라고 굳게 믿었다.)처럼 가슴을 쥐어뜯었다.
“됐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걔들을 도와.”
“뭔 소리야?”
“됐다고.”
카일은 힘을 주어 방금 한 말을 강조했다. 묘한 짜증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브리아나가 뻘쭘할 때 하는 것처럼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 돌렸다.
“아무튼, 시스템은 상상하는 만큼 현명하지 않아. 그건 아주 복잡하게 짜인 마법 회로랑 비슷해서, 설계해 놓은 대로만 움직인다고. 내 생각에, 시스템이 주인공을 가려내는 조건에 네가 부합해 버린 것 같은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시스템은 하나가 아닌 주인공을 수용할 수 없어. 아마도 주인공을 가려내는 작업을 반복했을 거야. 하나라는 결과를 받아 낼 때까지. 너도 알지? 마나 범람 보조 장치 없이 짧은 회로에 계속해서 마나를 공급하면 어떻게 되는지.”
“회로가 터져 버리지.”
무심코 대꾸하고 나서 숨을 집어삼켰다.
“회로가 터져 버려!”
“정답이다, 달튼. 하나 자만하지는 마라.”
카일은 그가 제일 자신 있어 하는 휴스턴 교수의 성대모사로 분위기를 더욱 고양시켰다.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면 만약에 시스템에 계속 마나 범람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운명의 물레’를 망가뜨리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맙소사, 카일 다미앙 빌라드! 네가 최고야!”
나는 너무 벅찬 나머지 카일을 마음껏 껴안았다. 그랬더니 그는 포상하는 거냐면서 변죽 좋게 굴었다. 대수롭지 않은 척하는 태도와는 달리 귓불이 붉었다. ‘아, 미안.’ 머쓱해서 몸을 물리자 카일은 눈썹을 찡그리고 억지로 웃었다. 조금 상처받은 모양새였다.